만화는 재미와 웃음을 주는 콘텐츠지만, 만화계가 걸어온 길은 굴곡지다. 지난 50년간 만화계는 끊임없이 심의나 불법복제와 싸워야 했다. 표현의 자유를 위해 오랜 시간 법원에서 다퉈야 했고, 때로는 ‘청소년 일탈’의 원인으로 지탄받았다. ‘혼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만화가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려 만든 곳이 ‘한국만화가협회’다. 지난 1968년 시작해 올해로 50년이 됐다.

역대 만화가협회장을 역임한 박기정(1, 3대), 이두호(20대), 김수정(21대), 이현세(23대), 이충호(26대), 윤태호(27대) 작가와 신일숙 만협 부회장, 그리고 연제원 웹툰작가협회장을 지난 11일 열린 ‘한국만화가협회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만나 짧은 인터뷰를 나눴다. 이들에게 각자의 협회장 시절 가장 중요했던 만화계 이슈와, 앞으로 만화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1980년대,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최고 인기를 얻었던 이현세 작가는 1990년대 들어 ‘천국의 신화’로 고초를 겪는다. 서울지검은 이 작가의 만화가 미성년자보호법을 위반했다고 보고 300만 원의 벌금 약식 기소를 걸었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만화계는 이 사건에 주목했다. 검찰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1998년 시작한  싸움은 대법원이 최종 무죄를 선고한 2003년까지 6년을 끌었다. 이현세 작가의 승리로, 한국만화계에는 숨통이 틔었다. 그러나 어려움은 여전했다. 청소년 보호법이 강화되면서 전국의 서점과 가판이 성인 잡지 유통을 꺼렸다. 2000년대 이후에는 종이에서 디지털로 플랫폼의 변화도 있었다. 이때는 그동안 출판에 매진해왔던 작가들이 변화하는 플랫폼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은 시기이기도 하다. 이 작가가 만화가협회 회장을 맡았던 2005년 1월부터 2008년 1월까지의 3년은 ‘한국만화 생존’이라는 화두가 무겁게 내리깔린 기간이었다.

 

이현세 작가

만화계 ‘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큰 역할을 하셨는데요. 당시를 회상해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청소년보호법 이전하고 이후로 나눌 수 있겠죠. 청소년보호법 이전에는 정책, 전략적으로 무언가가 필요해지면 가장 많이 이용했던 게 어린이들 공부에 방해가 되는 만화를 단속해 “아버지 어머니의 시름을 덜어드리겠습니다”라는 취지의 접근이 많았어요. 일반적으로 시사 만화가들은 신문이라는 배경이 있으니까 대응을 적절하게 해오고 있었는데, 거기에 비해 우리 만화가들은 대단히 약했죠. 일반적으로 벌금이든 뭐든 다 받아들이고 반성문 쓰고 그랬는데, 청소년보호법이 고쳐지고 난 뒤에 스포츠 신문에 연재하던 사람들하고 제가 ‘천국의 신화’로 문제가 돼서 이 상황이 만만치 않았죠.

그때 상황은 어땠나요?

왜냐하면, 그때 만화잡지가 많이 생기면서 제1의 부흥기라고 봐야 하나? 막 올라가고 있었는데 대단한 찬물이 될 수 있으니까,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죠. 자존감도 걸려 있던 문제고. 후배들도 나를 많이 지켜보고 있었어요. “이현세가 손들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이현세가 어떻게 할까?” 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죠). 재판은 귀찮은 일이잖아요? 만화가들이 제일 싫어하는 건 귀찮은 일이거든요. 300만 원 벌금만 내버리면 (귀찮은 일에서) 아웃되는 건데, 물론 전과는 남겠지만. 그래도 (후배들이 보니까) 이거는 그냥 물러설 문제가 아니라 싸워야 되겠구나, 투쟁을 해야 할 부분이구나 (생각했죠). 그때 처음으로 작가들이 정식으로 개인 변호사를 선임해서 전체적으로 투쟁에 들어갔는데 그 후에 어쨌든 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죠. 스포츠 신문에 연재하는 분들도 끝까지 잘 버텨주셨고. 거기는 나름 신문사가 뒤에 있으니까 약간은,

당시에는 신문사가 플랫폼 같은 거였잖아요?

든든한 편이죠. 편집국장이나 신문사 사장도 같이 증인대에 서야 하니까. 근데 이제, 나는 같이 일을 했던 출판사 사장이 벌금을 내고 빠져버렸어요.

보호를 해줘야 하는데,

보호는 안 하더라도 같이 가줘야 하죠. 그런데 한술 더 떠서 재판이 끝날 때까지 만화를 못 내게 됐으니까 계약금을 돌려달라고 하는 거야.

출판사에서요?

예, 그걸 갚느라고 애를 먹었죠. 그렇게 6년 재판을 했는데, 그 도중에 타협하자는 얘기가 검찰에서든 어디에서든 많이 들어왔지만 6년을 끌었죠. 싱겁게 무혐의로 정리됐고. 어쨌건 그 뒤로는 옛날처럼 쉽게 검사들이, 국가 권력이 쉽게 만화가들을 다루거나 하지는 않았죠. 그 이후로 검찰이나 그쪽에서 다른 창작자들도 똑같이 조심하고 동등하게 대우를 하고 그렇지만, 그래도 여전히 청소년보호법 이후에 생겼던 큰 문제가 뭐냐면, 부흥기에 있던 모든 만화 잡지, 그중에서도 성인 만화잡지를 작살을 내버렸죠.

그 이후에요?

아 그렇죠. 그때 TV 프로 중에 ‘이경규가 간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그때 ‘청소년한테 술을 파는가, 성인만화를 파는가. 담배를 파는가’를 보려고 나이가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고등학생을 찾아서 시키는 거예요. 담배랑 술을 사 오라고. 그런데 그게 걸리면 벌금이 2000만 원이야, 그 당시에. 그때부터 모든 한국에 있는 서점이나 가판들이 성인 만화 잡지를 유통을 안 시켰죠. 그래서 한국의 성인 만화 잡지는 청소년 보호법과 함께 몰락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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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장으로 계실 때 가장 중점을 두셨던 건 어떤 일일까요?

오프라인 만화에서 인터넷 만화로 전환할 때고, 주로 P2P 업체들이 무단으로 만화를 공짜로 불법 유통시킬 때였어요. 전체적으로 만화 대여방이나 대본소가 사양길로 들어섰을 때기도 하죠. 엄밀하게 보면 아날로그 대본소나 대여점이 디지털 대본소 대여점으로 넘어간 거죠. 그 과정에 협회가 있었으니까, 인터넷 만화 서비스 사이트도 만들고 작가들 지원도 하기 위해서 국가로부터 지원금을 많이 받는 것이 중요했어요. 돈을 많이 벌어와서 작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쓰는 것 말이죠.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