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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작가를 만나다]엄재경, 게임판에서 더 유명한 만화가

내가 엄재경이다!

엄재경은 만화가인가? 게임 해설자인가?

개인적으로 생각건대, 만화가 중 투잡에 성공한 대표적 인물이 엄재경이다. 1990년대 소년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엄재경은,  ‘까꿍’ ‘마이러브’ 같은 메가 히트작의 스토리를 쓴 만화가로 기억된다. 그러나 2000년대 스타크래프트에 열광한 지금의 30~40대들한테는 엄재경은 대체불가 스타 해설자다. 지금도 길을 걸으면 “엄재경 아냐?”하고 수군거리는 이들이 꽤 많다. 스타 경기를 꽤 열심히 시청했던, 그러니까 지금의 나같은 아재들 말이다.

엄재경 작가를 인터뷰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사실 지난해 11월이었다. 엄 작가는 그때 스타 리마스터의 해설을 맡았다. 아재의 추억을 TV 앞으로! 다시 스타가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그런 설레발을 치던 시기기도 했다. “충분히 가능성 있습니다!!” 하고 소리지르던 엄재경, 아니 엄옹, 아니 엄식신이 자연스레 다시 기억에 떠올랐다.

그렇다고 e스포츠 때문에만 엄 작가에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아니다. 그는 현재 네이버 웹툰에 ‘팀피닉스’와 ‘마법스크롤상인 지오’ 등 총 두 편의 웹툰을 연재하고 있다. 수많은 웹툰 작가에 ‘네이버’는 꿈의 무대다. 그런 네이버에 두 편의 동시 연재라니, 그는 현재 아주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역 웹툰 작가다. 지금의 엄 작가의 팬은 주로 20대다. 그러니까, 1990년대 태어난 이들에게 엄재경은 판타지 만화 스토리를 쓰는 웹툰 작가다.

엄재경 작가를 최근 그의 화실이 위치한 서울 마포구 성산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이 커피숍 바로 앞엔 연예기획사가 있었고, 우리 테이블 바로 옆에선 유명한 힙합 가수가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엄 작가는 이 핫한 동네에 1층엔 집, 2층엔 화실을 꾸린 주택을 지어 ‘스노우드롭’ ‘크레이지 커피캣’ ‘우렁집사’ 등을 그린 인기 동료 작가 최경아 씨와 함께 살고 있다. 사석에서 몇 번 이 부부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솔직히 엄재경 작가가 장가 잘 갔다.

인터뷰 내내 엄 작가는 진지하고 유쾌했다. 동료 작가들이 그를 “박식하다”고 평가하는데, 그 말대로 대답에 막힘이 없었다. 인터뷰는 꽤 길었고, 그 어떤 질문에도 진중하고 솔직한 답이 이어졌으며, 그래서 그의 말 상당 수를 여기에 소개 못한 게 아쉽다. 그렇지만, 여기에 실린 Q&A도, 만화 만큼 흥미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Q. 인터뷰 오기 전에 엄재경 작가를 만난다고 하니까 게임 해설자 아니냐고 되묻는 사람이 많았다. 엄 작가 스스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뭐라고 보나

게임 해설자로 굉장히 잘 나갈 때는 게임 인터뷰를 많이 했다. 그때도 단 한번도 빠짐 없이 만화가라고 했다. 게임으로 돈도 더 많이 벌고 일도 훨씬 많았지만 내 정체성은 만화가였고, 지금도 만화가다.

Q. 말씀하신대로 게임으로 더 유명해졌는데?

방송의 힘이기도 하고, (스타 해설자를) 한참 할때는 계속 커나갔으니까. 그런데 ‘내 것’의 개념이 조금 다르다. 만약 내가 송재경 대표(현 엑스엘게임즈 대표, a.k.a ‘리니지의 아버지’)처럼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였다면 (만화보다) 게임에 더 애정이 있을 수도 있었을 거다.

작가들이 이런 표현을 많이 하는데, 만화는 내 새끼다. 내가 만든 거니까. 그런데 게임은 그렇진 않다.

Q. e스포츠가 태동하고,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가 궤도에 오르기까지 엄 작가의 공이 크지 않았나. 스타 프로리그 탄생을 놓고 보면 엄 작가도 e스포츠를 ‘내새끼’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다르다. 뭐가 다르냐면, 나는 e스포츠를  만들었다기보다 태동할 때 같이 있었던 거다. 나는 갑판원이나 항해사 정도이지 선장은 아니다. 당시 투니버스에서 일하던 황형준 이사(현 DIA TV 본부장)가 선장이고 나는 조력자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주인의식은 있다(웃음). 나는 스타크래프트의  팬이었지만, e스포츠가 곧 스타는 아니지 않나. e스포츠 자체는 굉장히 큰 건데, 스타로 그 출발의 점을 찍었다 그 정도 역할이다.

Q. 스타에서 엄재경은 대체불가 해설자였다. 그렇지만 해설을 맡았을 땐 달랐다

롤(LOL) 초기에 욕을 많이 먹었다. 롤이 확 뜨는데 결승전 해설을 해달라고 하더라. 결승전을 야외에서 하니까,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 와서 관중들이 ‘으아~~~’ 할 수 있게 만들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롤을 잘 몰랐다. 준비 기간 없이 며칠을 급하게 공부해서 갔다. 나오는 유닛의 이름과 기술을 외우고 그냥 투입됐다. 그러니까 뭐 되겠나. 나중에 한 시즌을 중계하고 나서 할만 했는데 그때 갑자기 스타2 중계를 하게 됐다. 스타2가 잘 안 될 거라 예상은 했었지만, 그래도 맡았다. 미련은 없다.

Q. 갑자기 게임 해설을 그만둬서 이유를 궁금해 했던 사람들도 있다

3~4년 전 쯤, 게임 일을 완전히 손에서 놓았다. ‘하스스톤’이라는 게임 해설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때 많은 생각을 했다. 하스스톤이 머리를 써서 하는 게임이라 내가 계속 해설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말을 하면서 동시에 계산을 하는 게 나는 잘 안 되더라. 나이가 든 거다. 생각만 하거나, 말만 하면 됐을 거다. 그런데 동시에 하니까 말이 엄청 꼬이고 실수가 생겼다.

당시 온게임넷에서 활동하던 ‘홍차’라는 친구가 나보다 현저히 해설을 잘했다. 젊은 친구들은 말과 계산을 동시에 하더라. 이 친구들이 나보다 객관적으로 나은데 내가 돈은 더 많이 받는게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게임 일을 계속 하면 상당한 연봉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빨리 내 작품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딱 그만뒀다.

Q. 지난해 스타 리마스터 중계를 했었다.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다

좋았다. 리마스터로 리그를 해도 잘 되겠다 싶었다. 다른 게임으로는 e스포츠에 미련이 없었지만, 리마스터로 한다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e스포츠의 전성기가 오나 기대도 있었고. 그런데 온게임넷과 블리자드 간 조율 기간이 길어졌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데, 그 시기를 놓쳤다. 협상 기간이 길었고, 서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 오간 것으로 들었다.

Q. 해설을 쉬고, 다시 웹툰을 연재하기까지 딱 1년이 걸렸는데 생활은 괜찮았나?

1년간 연재 준비를 했다. 그 사이 빚을 졌다. 재산은 있지만 부채가 있는 사람이 있다. 어쨌건 형편이 어려워지면 부동산은 돈이 아니다. 계속 대출을 받고 그랬다.

Q. 지금 네이버 웹툰에만 두 작품을 연재 중이다. 하나는 ‘Ze-yAv’ 작가랑 함께하는 팀피닉스이고 다른 하나는 호패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마법스크롤상인 지오다. 이충호 작가와 단짝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새 그림 작가는 어떻게 만났나?

연제원 작가가 “형, 호패 한번 만나보시라”고 추천했다. 그림을 진짜 잘 그리는데 만화를 접었던 친구였다. 연재하면서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림이 좋아서 시나리오 시놉시스를 보여줬다. 재밌겠다고, 그날 바로 하자고 했다. 캐릭터를 짜서 보내줬는데 너무 맘에 들었다. 호패 작가는, 만화를 그만두고 아버지가 하는 택배 사업을 돕던 중이었다. 연제원 작가가 우리 둘을 구원해준 거지. 호패 작가도 판타지 마니아기도 하고.

Q. ‘마법스크롤상인 지오’도 판타지 작품이다. 이충호 작가와 함께한 데뷔작 ‘까꿍’ ‘마이러브’도 그렇고, 이 장르를 좋아하나보다

좋아한다. 그렇다고 소위 덕후까진 아니다. 나는 ‘블빠(블리자드 팬)’라 디아블로나, 월드오브워크래프트 같은 것의 스토리를 파는 스타일이지만, 던전앤드래곤을 잘 알고 드래곤의 설정은 뭐 이래야 하고 하는 세세한 것에 목을 매는 정도는 아니다.

Q. ‘마법스크롤상인 지오는 어떻게 나온 시나리오인가?

지오는, 꿈에서 설정을 잡았다. 꿈 속에서 마법을 판매하고 로열티를 받는 거다. 그리고 판매를 중개하는 애가 있다는 꿈을 꿨다. 꿈 속에서 마법이 실패할 확률이 있는 스크롤이나 인기가 좋은 스크롤의 로열티를 조정하더라. 이런 식의 꿈을 꾸다가 깨서 그 생각이 현실에서 그대로 이어졌다. 그게 이 만화의 스토리가 됐다.

Q. 팀피닉스도 영웅들이 나오는 판타지 만화다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발리 옆에 있는 롬복이라는 섬에 휴가를 갔을 때 떠올린 시나리오다. 나는 작가는 그냥 빈둥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안하고 빈둥대니까 머릿속에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은 두번째 에피소드를 연재 중이다. 엄청난 공상이 들어가는데 그 이야기의 핵심 골격을 롬복에서 빈둥대면서 짰다.

팀피닉스는 엑스맨 같은 이야기다. 처음에 이 이야기가 나왔을때, 사람들이 시빌워 표절이라고 했다. 나는 내가 먼저 그린 줄 알았다. 그런데 동료 작가가 마블로는 엑스맨이 훨씬 전에 있었다고 하더라. 그렇지만, 연재가 조금 진행되고 나선 표절 이야기가 들어갔다. 3~4회만 지나도 완전히 다른 이야기니까. 초능력자끼리 패가 갈려서 싸운다는 기본 설정만 비슷하다.

Q. 그림을 직접 그리지 않는 이유가 있나

나도 어렸을 땐 그림을 잘 그렸지만, 그림쟁이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거라 생각한다. 좋아하는 만큼 앉아 있어야 한다. 어깨 나가면서까지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못한다.

Q. 글, 그림 작가가 따로 있으면 서로 영향을 받게 되나? 스토리를 짤 때 그림 작가의 영향을 받는지 궁금하다

그림작가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얘기가 달라진다. 그림 작가가 스토리에 개입하지 않아도 그렇다. ‘마법스크롤상인 지오’가 처음에는 옴니버스처럼 구성됐다. 그런 형태로 계속 진행하고 드래곤이 나오거나 하는 건 훨씬 뒤에, 한 1년은 연재한 다음에 나오게 하려고 했는데 호패 작가가 그려오는 그림을 보니까, 이 이야기를 빨리 진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굉장히 이야기가 급진전했다. 호패 작가의 영향으로 스토리도 많이 달라졌다. 물론, 협업 상태에 따라 영향을 받는 정도는 달라질 수 있다. 만약 스토리 작가가 한꺼번에 끝까지 써서 넘긴다면 그땐 영향을 덜 받겠지.

Q. 남들은 한 작품만 연재해도 마감을 지키기 어렵다고 하는데, 두 작품을 매주 연재하는데 마감 압박은 없나

마감을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다. 나는 스토리 작가이기 때문에 그림 작가의 일정에 차질을 빚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건 단언할 수 있다. 다른 스토리 작가 친구들이랑 모였을 때 내가 “마감도 못 지키는 것들이!”하면 찍소리도 못한다(웃음).

Q. 부부가 함께 웹툰 작업도 했다. ‘크레이지 커피캣은 최경아 작가가 그리고 엄재경 작가가 스토리를 짰다

‘커피캣’의 시작은, 최경아 씨가 출판사가 꺼리는 작가가 된 데서 시작했다. 최경아 씨의 몸값이 비쌌다. 단가가 센 작가들은 출판 쪽에서 약간 꺼려했다. 이 사람(최경아 작가)이 힘들어 하더라. 그때 내가 웹툰을 하라고 제안했다. 지금은 비리비리해도 그게 미래라고 했다. 그런데 웹툰은 컬러 아닌가? 경아 씨가 스토리 쓰고 컬러까지 혼자 다 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스토리를 쓰겠다고 했다.

Q. 커피캣은 순정만화다. 주로 판타지를 해왔는데 스토리를 쓰기 어렵지 않았나?

힘들었다. 도전한다는 생각으로 했지. 그래서 커피캣은 여타 다른 순정만화와는 다르다. 다른 순정만화를 보면 감정이 뚝뚝 떨어진다.

Q. 건조한 순정만화를 만들었나?

상당히(웃음). 러브러브 한거는 경아 씨 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조언을 들었다. 어떨때는 시나리오를 보고 경아 씨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이건 정말 아니다”하고 고쳐주기도 했다. 감성적인 면에서 경아 씨한테 의지를 많이 했다. 회사 장면 같은거는, 내가 회사를 다녀봤으니 그 경험 이야기를 담았다.

Q.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나

경아 씨하고 주중에는 매일 같이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운동하고 돌아온다. 오면서 밖에서 같이 점심을 먹거나, 장을 보고 집에 와서 음식을 해 먹어 치우고 위층으로 출근(엄 작가의 집 2층을 작업실로 만들었다)해서 같이 일을 한다. 매일 같이 있는다.

Q. 매일 같이 있으면 안 싸우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데 고정된 시간에 규칙적으로 나오나?

생각보다 별로 안 싸운다. 자기 전에 스토리 생각을 많이 한다. 불면증이 심하다. 스토리를 생각하는 동시에 잠에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더 못 잔다. 잠이 안 올 때 이런 생각도 하고, 저런 생각도 하면서 스토리를 생각하지.

Q. 글로 먹고 살 수 있을만한 시나리오 작가가 되려면 재능과 노력 중 어떤게 더 중요한가?

한동안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이 나오면 솔직히 조금 재수가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잔인한 말을 했었다. 재능은 거의 타고나는 거라고. 솔직히 말해서 재능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 일을 하고 있지 않나?

나는  작법서를 몇 권 읽었을 뿐 시나리오에 대해 배운 것이 없다. 쓰는게 어렵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열혈강호의 전극진 작가는 “나는 작가가 될 거라고 단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열심히 노력해서 된 거다”라고 말한다. 지금은 나도 노력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전 작가는 재능이 있지 않은가!

Q.앞으로 어떤 만화를 준비하나?

별자리 만화를 준비 중이다. 캐릭터 위주의 일상물 중심인 별자리 만화다.

Q.엄 작가의 별자리는 무엇인가?

양자리다. 양자리의 특성이 가장 어린애 같다는 거다. 천진하지만 동전의 앞뒤면이 있다. 뒷면은 이기적이다. 아이들의 특성이다. 자기 중심적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을 잘 못한다. 진취적이고 저돌적이다. 양자리가 열성적이고 열정적인거는 좋은데, 주변을 돌아보지 않으니까 주위에 상처를주기도 한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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