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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작가를 만나다] 이충호 “만화는 왜 정치적이면 안됩니까”

이충호 작가

지금의 20대는 만화가 이충호를 잘 모를 수도 있겠다. 1993년 이충호 작가가 만화잡지 ‘아이큐점프’에 연재를 시작한 ‘마이러브’는 넘사벽 ‘드래곤볼’을 밀어내고 인기 순위 1위에 오를 정도로 사랑받았다. ‘마이러브’ 단행본은 무려 150만 부가 팔렸다. 초등학교 동창인 스토리 작가 엄재경과 콤비를 이뤄 ‘까꿍’으로 2연타 히트를 쳤다. 1990년대 한국 출판만화 부흥기를 이끈 4대 천왕 중 하나로 이 작가를 손꼽아도 무리가 없다. 그렇다고 그가 과거의 영광에만 매몰된 사람은 아니다. 그는 지금 다음 웹툰의 프랜차이즈 스타다. 2007년 ‘무림수사대’로 웹툰을 시작, 꾸준히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담은 만화를 잇달아그려 주목받기도 했다. ‘이스크라’ ‘제 0시: 대통령을 죽여라’ 같은 사회성 짙은 만화가 대표적이다. ‘대통령을 죽여라’는 박정희의 망령이 떠도는, 망령에 지배되는 사회를 풍자했다. 작가는 만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부관참시했다. 이 작품은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2012년 연재됐다. 그는 박근혜 정부 시절 작성된 문화계 블랙리스트 9473명 중 하나에 이름을 올렸다.

이 작가는 지난 2014년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원로작가들이 돌아가며 협회장을 맡던 관행을 깬 파격적 선거였다. 이 작가를 지지한 대다수는 협회에 새로 등록한 웹툰 작가들이다. 신진 작가들은 “충호 형이 협회장을 하면 나도 가입하겠다”며 합류했다. 출판만화 밀리언셀러 작가가 웹툰 전성기에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 역할을 맡은 셈이다.

협회장 직을 내려놓고 신작 ‘보다’를 준비 중인 이충호 작가를 지난 21일 서울 연남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올해 쉰 하나인 그는, 옷차림이나 말투로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성격은 꽤나 까칠해서, 마음에 없는 소리는 잘 하지 못했다. 그래서 좋았다. 대답은 솔직했다. 타이핑 치는 것도 잊고 얘기에 집중했다. 만화가 가상인물의 삶을 대리체험할 수 있어 재밌는 것이라면 이 인터뷰 역시 그의 삶을 따라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근작 ‘대통령을 죽여라’를 인상 깊게 봤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연재됐고, 박정희 공과 논란이 첨예하게 맞붙던 때기도 해서 화제가 됐을것 같은데, 생각보다 작품이 많이 알려지진 않은 것 같다

보는 사람들이 좀 어려워했다. (메시지가) 세다 보니까, 관심 있는 사람들만 보는 만화가 됐다.

대선 직전에 연재를 시작했는데

대선 직전에 반, 대선 끝나고 나머지 절반을 연재했다. 박근혜 씨가 후보이던 시절 6개월, 되고 난 후 6개월이다. 왜 그랬나 모르겠다(웃음).

박정희라는 코드를 꺼낸 것은 대선을 염두에 둔 소재인가

내 만화가 대선에 영향을 끼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박정희는 지금까지도 역대 대통령 순위 상위에 있다. 게다가 그때는 1위였고. 그게 나는 인정이 안됐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내 만화를 통해서 독자들에 알리자는 태도가 있었다. 박근혜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박정희 때문이다. 그 유령이 박근혜 뒤에 있기 때문에, 박근혜를 통해 박정희를 보며 신처럼 추앙하기 때문에 그런 표가 나온게 아닌가. 토론회에 나와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데도 찍지 않나. 만화 ‘대통령을 죽여라’를 통해 부관참시를 한 거다. 박정희를 끄집어내서 다시 한 번 죽이는 이야기를 한건데, 그렇게라도 한 번 해보자는 살풀이다. 누군가는 프로파간다라고 이야기 하는데, 동의한다. 이 작품은 프로파간다여도 상관없다는 태도가 있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 살짝 아쉬운 것은 있다. 극적으로 조금 더 재미있게 그릴 걸. 메시지가 너무 선명하니까 도망쳐 버리는 독자들이 있었다. 메시지는 조금 숨기고 극적으로 조금 더 재미있게 포장해서 전달했다면 더 효과적이 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후회하나

(웃음) 그렇진 않다. 살면서 후회 같은 건 잘 안 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조사 때 발표된 문화계 인사 블랙리스트에 이충호 작가 이름이 있었다. 만화 때문에 블랙리스트에 올랐을거라 생각했는데, 보니까 박원순 서울시장후보 지지선언 때문에 올라서 의외기도 했다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건 작품 때문은 아닌 거 같다. 박원순 시장 지지 선언 때문인 걸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국정원이 블랙리스트를 만드는데 그렇게까지 꼼꼼하진 않다. 작품의 정치적 성향을 파악해서 하지 않고, 그냥 지지선언하면 그때 그냥 올린 거다(웃음). 이명박 정권 때는 좀 촘촘했나 모르겠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그렇게 촘촘하지 않았던 것 같다.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분은 어땠나

그걸로도 충분한 탄핵 사유 아닌가. 말이 안 되는거다. 얼마나 시대가 후퇴하고 후진적으로 변했는지, 박정희 시대로 돌아갔는지 보여준 사례다. (블랙리스트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다들 생각했다. 이명박 시절때부터 있다고들 했으니까. 그런데 나는 (내가 거기 들어간 이유가) ‘대통령을 죽여라’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을 죽여라’ 댓글에 많은 이들이 걱정을 하더라. 작가님 어디 다치는 거 아니냐고

그런 걱정을 하는 시대라는게 어이 없었다. 그런 작품을 한다고 작가를 걱정하는 시대인게 걱정스러운 거지, 다른 걱정은 그다지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딱히 일어나지도 않았고. 국정원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대통령을 죽여라’가 끝나고 내가 만화가협회장을 했다. 그때 회장을 하게 되니까 국정원에서 연락이 오더라. 국정원에 문화 단체 관리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같이 밥 먹고 그랬다.

뭐라고 하던가

내 작품 얘기는 삼국지 밖에 안하더라.

못본걸까?

아니, 봤다. 봤는데 그 얘기를 꺼내기는 되게 민감하지 않겠나. 그래서 서로 웃으면서 그냥 ‘아, 그런 팀이 있느냐’ 그런 애기를 했다. 전임 협회장님이 소개를 해줘서 같이 봤다.

정권이 바뀌고 달라진 게 있나

일단, 기분은 좋지 않나(웃음). 뭔가 바뀌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나도 내가 만협 회장 되자마자 ‘뭐가 바뀐거야’ 이런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조금 기다려’라고 답했다(웃음).

지난해 11월, 이충호 작가가 주도해 올린 만화가 시국선언.

국정농단 사태 땐 만화가 시국선언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때 내가 만화가협회 회장이었어서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아예 개인으로 하는 거라고 전제를 깔았다. 페이스북에 만화가 친구들과 지망생 친구들이 많으니까. 약간 답답했다. 상황(국정농단)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움직이는걸 알고 있고, 시국선언도 여기저기서 나오는데 만화가협회에는 보수적이 선생님들도 계시니까 만협 이름으로 무언가를 하기는 쉽지 않았다. 어찌됐든 뭔갈 하기는 해야겠는데 마감이 바쁠때였다. 그래서 앉아서 할 수 있는 시국선언을 찾았다(웃음). 내가 만화가니까 캐릭터를 하나 얹어서 돌리면 거기에 동참하는 이들이 그림을 붙일 수 있도록 하면 재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이스북에 올리고 캐릭터 달라고 했더니 순식간에 그림이 쫙 붙었다. 최종적으로 200개가 넘는 캐릭터가 들어왔다. 멋있었다.

이전 인터뷰에서 그런 얘기가 있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대학생 친구들이 학생 운동을 할 때 함께 하지 못한 부채의식이 있다고. 그것이 시국 관련 만화를 그리는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는데, 그 얘기를 조금 더 해달라

부채의식이 있다. 내가 87학번이니까. 전문대는 사실 그렇게 시위를 하거나 운동을 하는 문화는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학교에 입학하고도 틈만 나면 수세미 가방을 들고 수세미를 팔러 다녀야 했다. 그래야 학비를 벌 수 있었으니까. 내가 수세미 가방을 들고 다닐 때 최루탄 가스가 돌아다니곤 했다. 부끄럽진 않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해야만 했던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소식은 다 들었다. 왜냐면 재경이가 고대를 다녔으니까. 재경이랑은 초등학교 동창이다. 평생의 친구고. 재경이를 통해서 듣기도 하고, 그 당시에도 정상적으로 기사를 내보내는 신문은 있었다. 그리고 상황을 보면 뭐가 옳고 그른지 알 수 있었다. 수세미를 팔며 학교를 다니면서 쌓인 것들이 지금 나온 게 아닐까. 세월이 흘렀고, 나는 그때 못했던 게 있고.

어떻게 보면 그당시에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했던 이들이 2012년엔 입을 다물거나 오히려 엄한 소리를 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울 수도 있었을텐데

내가 목소리를 낸 것은 ‘대통령을 죽여라’가 처음은 아니고 ‘이스크라’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스크라’는 2009년 작이다. 108회를 연재했다. ‘무림 수사대’를 할 때 미국산 소고기 파동이 터졌다. 광화문 광장에 처음 나갔다. 그리고 다시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 전까지는 인터뷰를 할 때 ‘당신한테 만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굳이 따지자면 만화는 나한테 내 존재를 증명하는 도구였던 측면이 강했다. ‘내가 여기 살아 있어, 나 이만큼 해, 나 이런 작가거든, 내 작품 보여?’ 이런 태도가 기본적으로 되게 강했던 거다.

근데 그 시점(소고기 파동)이 딱 변화의 시기였다고 본다. 시대 정신 같은 걸 보기 시작했다고 해야 하나. 소고기 파동도 직전 쯤에 ‘체 게바라’ 평전을 읽었다. 그리고 소고기 파동 때 광장에 나가고. 그런 체험을 쌓고 있는데, 마침 다음과 차기작을 논의하면서 수호지를 하자는 얘기를 나눴다. 보름 간 유럽 여행을 다녀와고, 그 후 (원작) 수호지를 읽었다.

수호지를 도둑떼 이야기로 볼 수도 있지만, 민란의 이야기다. 혁명 이야기였다. 그 관점에서 ‘이스크라’가 나왔고, 그 연장선에서 ‘대통령을 죽여라’가 나왔다고 봐야 한다. 내 만화가 내 존재를 과시하거나 증명하는 도구로만 쓰이는건 재미가 없다. 시대정신을 담는 작품을 통해 메시지를 주고, 그 메시지가 세상을 1mm라도 좋은 방향으로 변하는데 일조할 수 있다면 작가로 사는 삶이 조금 더 가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작품은 정치적이면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우리 삶이 정치인데 만화가 정치적이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다. 조지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라는 책이 있다. 작가가 가져야 될 태도를 순서대로 꼽으면 처음엔 나처럼 ‘과시욕’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시대를 담아야 한다. 그 시대를 담는다는 것은 정치와 함께 하는 거다. 시대정신이라는 것에서 정치를 빼고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나.

이충호를 알린 만화는 누가 뭐래도 ‘마이러브’와 ‘까꿍’이다. 나도 학창시절, 엄청나게 열심히 봤다. ‘드래곤볼’을 꺾은 만화 아닌가

대한민국에서 판매부수로 ‘드래곤볼’과 ‘슬램덩크’를 꺾을 수 있는 만화는 없을 거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드래곤볼’이 아마 비공식 600만부를 기록한 걸로 알고 있다. 내가 ‘마이러브’를 2년 조금 넘게 그렸는데, ‘드래곤볼’과 연재 시기가 완전히 겹쳤다. 아이큐점프에서 엽서 집계로 인기투표를 매번 했다. 한 번도 이기지 못하다가 내가 딱 두 번 이겼다. ‘마이러브’가 한창 힘을 받을 때고, ‘드래곤볼’이 힘이 조금 빠져 있었던 때다. 서울문화사에서 ‘드래곤볼을 이기는 만화가에게 상금 천만 원’을 걸기도 했었다. 그때 당시 1천만 원이면 꽤 큰 돈이었다.

상금은 받았나

안 주더라. (웃음). 비공식적으로 술자리 같은데서 이야기했던거라, 막상 이기고 나니까 팩스를 한 대 사주더라.  한 20만원했나 그랬다. 근데 그때 당시 인세가 통장에 다달이 1~2천만원 씩 꽂힐 때라 상금 천만 원 뭐, 이러면서 웃으면서 넘겼다.

베스트프렌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마이러브’와 ‘까꿍’ 의 스토리를 쓴 엄재경 작가의 데뷔가 이충호 작가 때문 아닌가? 지금 엄 작가는 게임 쪽에서 더 유명한 것 같다. 어떻게 엄 작가를 꼬셔서 스토리를 쓰게 했나

재경이는 초등학교 5학년때 같은 반이라 친해졌다. 엉뚱한 상상을 하고 수다 떨기를 좋아했다. 학교에서 우리 집까지 10분, 우리 집에서 재경이네 집까지가 15분 거리였다. 학교 끝나고 둘이 집까지 걸어오면서 수다를 떨어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집에 가방을 던져놓으면서 ‘재경이 배웅하고 올게’ 하고 소리치고 또 다시 재경이네 집 앞까지 수다를 떨며 걸어갔다. 재경이네 집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도 둘이 계속 수다를 떨 정도로 너무 잘 맞았다. 중학교 가선 나는 그림을 그렸고, 재경이는 이야기를 구성하고 글 쓰는 걸 좋아했다. 나중에 니가 스토리 쓰면 내가 만화 그릴래, 그렇게 얘기도 했었다. 사실 실현될 가능성이 없던 얘기지.

내가 ‘마이러브’를 연재하고 있을 때 재경이는 군대에 있었다. 문하생이 아내 밖에 없던 때라 반년 동안 혼자 스토리도 쓰고 그림도 그리느라 죽을거 같더라. 첫 주간 연재였는데 반응이 좋다고 해서 쉴수도 없었다. 그때 재경이가 제대를 했다. 마이러브를 3권까지 연재했을 때다. 너무 힘들어서 재경이한테 ‘너 한 번 스토리 써볼래?’하고 보여줬더니 ‘우리가 꿈꾸던 작품은 이런게 아니잖아’ 하고 거절하더라. 그리고 재경이가 학비를 벌려고 노가다를 뛰었다. 사흘 뒤에 재경이한테 연락이 왔다. ‘충호야, 쓸게’라고. 재경이가 들어오고 작품 색깔이 변한 건 있다. 개그 코드와 판타지 코드도 더 강해졌다. 중후반으로 가면서 로맨스 만화가 판타지 만화가 됐다.

‘까꿍’ 2부 연재 계획이 있다고 들었었는데

여전히 갖고 있다. 지금 모 에이전시랑 ‘까꿍2’를 계약하고 진행하기 위해 물밑 움직임을 하고 있다.

출판만화로 인기를 얻다가 2007년 ‘무림수사대’로 다음에서 웹툰을 시작했다. 출판 만화 출신 중에선 웹툰을 굉장히 빨리 시작한 케이스다

출판만화가 붕괴하고 나서 갈 데가 없었다. 그때 얻었던 대중적 성취 상업적 성취로 받은 대가-원고료-가 최고 수준이었다. 그러다보니 출판만화가 붕괴되면서 제일 먼저 제거되는 사람 중 하나가 됐다. 단행본을 1백만부 팔 때면 이충호에게 그만큼 줘도 남는 장사라 상관없는데, 지금 단행본이 이렇게 안 팔리니까 이충호한테 그만큼 줄 수 없단 태도가 출판사에 있었다.

2002년에 내가 이혼을 하고, 당시 있던 재산을 모두 아내에게 준 뒤 홀로 상경했던 때다. 혼자 원고를 만들어서 당시 친했던 서울문화사 편집자를 만났다 홍대 한 찻집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내가 그린 원고를 보지도 않고 ‘고료가 너무 세다’는 이야기부터 하더라. 사실 그 전날 굉장히 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시장이 어려워진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니까, 내가 이만큼의 원고료였는데 어느 정도 깎으면 될까 그런 생각을 갖고 나갔었다. 그래도 내가 서울문화사에 건물을 한 채 올려준 사람이었는데, 일단 내 원고를 보고 예의를 갖춰 말했으면 좋았을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꼭지가 돌았다(웃음). 그래서 ‘그래? 알았어, 안녕’하고 원고도 보여주지 않고 나왔다. 웃으면서 ‘그래도 원고 한 번만 보고 얘기하자’고 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건 못하겠더라(웃음).

돌아 나오곤 막막했다. 그때 문학동네 강태형 대표가 홍대로 나를 찾아왔다. 황미나 선생이 그만한 사람이 없을 거라며 나를 추천했다고, 황석영 작가의 ‘삼국지’를 만화화 하자고 했다. 이거 만들어 놓으면 노후 보험은 될 거라고 말했다. 그때가 이문열의 ‘삼국지’가 100만 부, 200만 부 씩 나가던 때였다. 먹고 살려고 덜커덕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게 잘 되지 않았나

적당히는 됐다. 40만 부에서 50만 부 정도. 4년을 그걸 그렸는데 재미가 없었다. 어린이 대상 학습만화 삼국지라는 게 순수하게 내 창작물로써 재미를 줄 순 없었다. 4년 동안 힘들었고, 그래서 일본 진출을 하려고 했었다. 웹툰과 일본 진출을 놓고 저울질을 한 거지. 일본 진출 조건으로 내가 건건 딱 하나였다. 소년만화잡지에 연재할 것. 그 당시엔 국내 만화가가 일본 소년만화 잡지에 들어간 사례가 없었다. 거의 다 성사됐었는데 막판에 결렬됐다. 그리고 나서 다음에서 웹툰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다음에만 웹툰을 연재하고 있고.

이충호 작가의 만화 ‘제 0교시: 대통령을 죽여라’의 한 장면. 출처=다음 웹툰

지금 작업 하는 것은 어떤 내용인가

사실은 연재에 이미 들어갔어야 하는데 아직 못들어갔다. CJ랑 계약했고 재담이 에이전시 하고 다음에 연재하는 작품이다. ‘보다’라고, 미스테리 스릴러다. 제가 요즘 추리에 꽂혀 있다.

새 작품 ‘보다에도 시대 상황이 들어가나

이번에는 세련되게 담으려고 한다. 죽음과 관련한 다섯명의 메인 캐릭터가 나온다. 한 명은 미래에 일어날 죽음을 보고, 한 명은 죽은 자를 본다. 또 하나는 죽은 자이고, 다른 이는 죽었다 살아난 자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죽이는 자다. 이 다섯명에 관련한 이야기다. 죽이는 자인 연쇄 살인마 한 명에 넷이 맞서는 이야기라고 봐야 한다. 죽음과 관련해 우리가 꽤 큰 일을 겪지 않았나. 작품을 보고, 깊게 읽으시는 분들은 (함의된 속 뜻을) 읽으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새 작품은 언제 볼 수 있나

원래 계획은 9월이었는데 10월로 넘어갔다. 10월은 실현가능한 스케줄이긴 한데, 마침 네이버 거장전을 한다. 이번에 1990년대 데뷔한 작가까지 포함한다고 해서 단편을 하나 주기로 했다. 근데 단편도 어렵지 않나. 그 스케줄 때문에 11월이 될 수도 있다.

장편 데뷔작인 ‘마이러브’나 인기작이었던 ‘까꿍’은 판타지 개그물이었다. 그러다 삼국지와 수호지를 그렸고, 정치만화도 그렸다. 이젠 스릴러에 꽂혔다고 하니, 장르가 계속 바뀌는 게 독특하다. 그렇게 계속 새로운 장르, 새로운 캐릭터를 그리는 이유가 있나

주변에선 내 별자리가 ‘쌍둥이자리’라서 그렇다고 한다. 호기심 많고 자꾸 변하는 거(웃음). 내가 만화가로 사는게 기쁜 이유 중 하나가  조금씩 내가 똑똑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아서다. 나는 집안환경이 굉장히 어려웠다. 만화가 중에 집안이 어려운 이들이 많은데, 나도 아마 가난 배틀을 뜨면 순위권에 있을 정도로 힘들게 살았다. 이렇게 말하면 그렇지만 똑똑한 편이라 공부도 제법했다. 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쳤는데 한 반 60~70명 중에서 3등인가를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못갔다. 10만 원이 안 되는 등록금이 없었다. 정상적인 교육을 제대로 못받았고 검정고시를 쳐서 전문대에 갔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면서도, 공부를 할 환경은 아니었다. 거기서도 만화가가 되야지 하고 그림만 팠다. 만화가가 된 후엔 쉬지 않고 만화를 그렸다. 바탕 없이 계속 쏟아내기만 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예를 들어 안식년으로 1년을 책만 읽거나 강의를 듣거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니 작품을 하면서 공부를 하는 수밖에. 사실은 ‘대통령을 죽여라’를 하면서 1979년 당시 정치 상황에 관련한 전문가가 됐다. 삼국지를 그리면서 삼국지 전문가가 됐고.

2014년 만화가협회 회장이 됐고, 3년간 역임했다. 이 작가는 1967년 생인데, 지금은 60~70년대 생 작가들이 원로 작가와 신진 작가의 가교가 되는 허리층이지 않나

그래서 회장이 된 거다.

협회장이 되면서 했던 말 중 하나가 웹툰 작가들의 권익 보호다. 웹툰 작가들이 협회에 들어온 것이 그때가 기점이었던 것 같은데

거슬러 올라가면 만화가 협회에 웹툰 작가가 없었다. 웹툰 작가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나나 윤태호 작가, 이런 사람들이었는데 우리는 사실 출판만화 시절부터 만화를 하다가 웹툰까지 하게 된 케이스다. 웹툰 태생 작가는 거의 없었다고 봐도 된다.

2012년에 방심위 사태라고, 방심위와 조선일보가 손을 잡고 웹툰 표현의 자유를 건드린 적이 있다. 그때 비대위원장을 지금 협회장을 하고 있는 윤태호 작가가 맡았다. 그에 탄력받은 이론가들과 태호가 같이 웹툰작가협회를 설립하려고 했다. 그때 나도 태호도 만화가협회 이사로 있었다. 이사회에서 ‘웹툰작가협회가 따로 설립되면 여긴(만협) 그냥 노인정 된다, 우리가 막내로 끝난다’고 이야기 했다. 이충호, 신영우, 김수용 이런 작가들이 막내가 되는 거다. ‘그러면 여기는 그 순간에 사라지는 단체가 될 거다, 우리는 끝난다’고 태호랑 이야기를 했다. 태호와 내가 쇄신 위원장을 맡아서 젊은 웹툰 작가들을 협회로 데리고 오는 역할을 했다. 그 때 웹툰작가들이 대거 가입하게 된 거다.

그때 합류한 웹툰 작가들의 규모는 얼마나 되나

회장 선거 때까지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300~400명 정도가 가입했다. 특히 회장 선거 과정에서 굉장히 많이 가입했다. 만협이 어떤 모습을 갖춰야 할지 같이 논의하던 웹툰 작가들이 내가 회장이 나고 나서 협회 이사도 맡았다. 그때 그 작가들이 요구한게 ‘우리가 협회에 들어가는데 만약 회장이 또 원로 선생님이면 우리는 안들어갈래요. 충호형이나 태호형 둘중에 아무나 회장해야 우리가 들어가지’였다. 그래서 내가 태호보다 두 살 형이니까 먼저 했다. 임기가 끝났고 지금 태호가 협회장을 한다. 그 흐름으로 만협이 지금까지 변해 온거다.

웹툰 작가들이 투표권을 가졌던가?

투표권을 가질 수 있는 날짜 전에 가입한 사람들은 다 투표권을 가졌다. 그때 내 득표율이 67% 정도였다. 그중 반 이상이 웹툰 작가가 던진 표라고 보면 된다.

그전엔 웹툰 작가들이 협회에 들어가지 못할 규정 같은게 있었나

규정이 조금 더 빡빡하긴 했었다. 단행본이 나와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애초에 진입장벽 자체가 너무 높으니까 이게 웹툰시대에 적합한 규정이 아니니 정관을 이사회를 통해 개정했다. 그 이사회에는 원로 선생님들도 있었다. 합의 하에 개정을 한건데도, 선거 기간에 꽤 말이 많았다.

어떤 말들이 있었나

음해 하는 쪽에선 그걸 거의 쿠테타처럼 바라봤다. 조금 혁명적이긴 했으니까. 그 전에는 회장을 연배 순으로 돌아가며 했다. 그 순서대로 갔으면 나는 한 20년 후에나 후보로 언급 됐을 거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거부한 거다. 그렇지 않으면 협회는 무용지물이 될 테니까.

(원로) 선생님들하고 문제는 없나

딱히 문제는 없다. 원래 협회 이사였을때도 쓴소리 하는걸 좋아해서 선생님들이 나를 편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선배여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냥 대놓고 얘기하니까.

기억 나는  것 중에 가장 날카롭게 쓴소리 한 게 무엇인가

예전 만협 시절, 이사 중 한 분이 본인 업체를 통해서 중국에 콘텐츠를 유통하는 비즈니스를 했는데, 그 계약을 만협 이름으로 진행하더라. 이게 무슨 소리냐고 당시 이사회와 싸우다시피 해서 계약서를 뜯어고쳤다. 당시 협회장이던 분이 나를 ‘이 검사’라고 불렀다. 그때는 만협이 좋은게 좋은 시절이었다.

만화나 인터뷰를 보면 성격이 까칠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오늘 보니까 실제 성격이 그런거 같다(웃음)

(웃음) 기본적으로 까칠한 편이다. 예민한 편이기도 하고. 날카로운 얘기도 해야 할때는 잘 한다.

협회장 시절, 드라마 ‘킬미힐미’가 자신의 작품 ‘지킬박사는 하이드씨’의 아이디어를 도용했다고 문제제기해 논란이 있었다. 서로 덮고 넘어가긴 했지만, 앞으로도 저작물에 대한 표절시비는 반복될 수 있지 않나

법적으로는 핵심 아이디어 도용은 보호받지 못한다. 표절 판정 기준이 애매하게 되어 있다. 디테일에서 유사성이 없으면 표절 판정을 받지 못한다. 윤리적으로 욕을 먹거나 책임을 물을 순 있어도 법적으로는 책임이 없다. 소송으로 가봐야 실익이 없다. 실제로 예전 사례를 보면 소송을 제기한 쪽이 다 졌다. 그 전의 사례를 보면, 이긴 사례가 없다.킬미힐미의 경우 여론전만 하다 끝났다. 여론전으로는 내가 게임이 될 수 없다. 나를 옹호하는 매체는 소수였다. 저쪽은 보도자료도 뿌리고 기사도 많이 나왔다.

아이디어 도용도 표절의 경계 안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례를 만들지 않으면 계속 이렇게 갈 수 밖에 없다. 내 전후에도 유사한 사례가 꽤 있었다. 김수현 주연의 ‘별에서 온 그대’나 신하균이 주연한 ‘피리부는 사나이’도 논쟁이 있었다. 합의를 본 걸로 안다.

표절문제와 관련해 만협 차원에서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었나

성명서를 몇 차례 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 인터뷰하는 기자도) 모르지 않나. 어디서도 그렇게 크게 들어주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민감함 이슈기도 하다. 법적으로 아이디어 도용이 모호하니까 어디까지 선을 그을지 애매하다. 영상물을 만드는 분들의 도덕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현재로서는 그분들이 조금 더 당당하고 정당하게 판권을 확보해서 가져가 주길 바라고, 그런 태도를 갖춰주길 바라는거 말고는 없다. 시점이 민감한데, 눈가 보인다면 먼저 나온 시점을 기준으로 판권료를 가져가는게 의심 받는거보다 더 낫지 않겠나.

웹툰 플랫폼에도 변화가 오고 있는 거 같다

성인물이 아니고도 다음이나 네이버에서 열쇠로 잠가놓고 하나씩 풀어보는 유료 모델도 수익이 생기기 시작하지 않았나. 지켜봐야 한다. 네이버와 다음도 웹툰이 최근 독립을 했으니 이익을 내야 한다. 유료 플랫폼들도 굉장한 투자를 받아서 유지를 한 측면이 있는데, 투자가 끊겨 가고 있다.

이제는 (돈을) 넣을 만큼 넣은거다. 위기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모양새가 갖춰질 거다. 무언가 탄탄히 갖춘 곳은 살아남을 거고, 돈 놀이 하려던 곳은 플랫폼을 접고 정리가 될 거라고 본다. 예측으로는 건강한 플랫폼 한 열군데 정도 가 살아남는다고 본다. 그 정도면 괜찮다. 그런 과정에서 생기는 부작용이 지금의 작가와 플랫폼 간 충돌 같은거다. 조금은 건강하지 않은 모양새로 자신들의 수익을 확보하려던 태도 때문에 충돌이 일어나는거다.

그런 사례가 있나

한 플랫폼에서 수익 쉐어와 관련해 룰을 바꾸면서 문제가 있던 적도 있다. 코인 수익 배분 관련해서다. 이거 말고, 최근에는 플랫폼이 에이전시 역할까지 다 하려고 하는 문제도 있다. 플랫폼에 작가가 연재할 수 있게 하는 대신 수익날 수 있는 모델은 우리가 다 관리하겠다는 태도다. 2차 비즈니스나 해외 진출 같은 걸 예전에는 플랫폼에서 신경도 안 썼다.

다음이나 네이버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이제 묶어서 관리하려는 태도가 생겼다. 작가들 입장에서는 플랫폼이 잘 해줬을 때는 좋은 일이지만 역량이 안 될 때는 다른 사람 하고 하는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어떻게 될지는 더 지켜봐야 하지만 그런 부분에서 민감한 이슈들이 조금씩 나온다.

작가가 그 권한을 플랫폼에 주기 싫거나, 이미 다른 에이전시랑 계약을 했다고 해도 플랫폼에 연재를 해야 하지 않나. 근데 플랫폼에서 ‘너 다른 에이전시랑 게약을 했으면 우린 싫다’ 이래 버리면 충돌이 일어난다. 지각비 이슈도 있다. 연재가 늦으면 지각비를 내는 거? 그게 대체 뭐 하는 일인가.

최근 웹툰 트렌드가 무엇이라고 보나. 학원물이 대세 아닌가

트렌드를 쫓아서 만화를 했던 적이 없다. 그런 태도가 생기려면 처음 내 작품이 실패해야 했다. 오만한 얘기지만 첫 장편이 잘 됐다. 웹툰 들어와서도 PD나 플랫폼이 간섭하는 경우가 없다. 그래서 트렌드를 읽을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한테 트렌드는 시대정신일 수도 있고. 시대가 나한테 보여주는 모습, 그런데만 촉수를 세우고 있다.

네이버 같은 플랫폼은 독자가 10대가 많다보니 트래픽이 학원물에 몰릴 수밖에 없다.그런 부분에 대해서 고민하는 경우도 있더라

내가 ‘마이러브’를 그릴 때는 아이큐점프 주 독자가 초등, 중등생이었다. 내가 스물일곱에 시작했으니까 독자들과 10년 정도 나이 차이 밖에 안 났다.  비슷한 시대를 공유할 수 있는 나이였다. 지금  내 나이가 쉰하나다. 지금 10대 아이들과 30년 이넘게 차이가 난다. 그걸 쫓아가려는 게 옳은 태도인가 하는 생각이 있다. 나이를 먹은 작가는 나이를 먹어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거나, 자신의 태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억지로 트렌드를 맞출 이유는 없다. 다만, 만화 안에서 10대가 나온다면 10대가 쓰는 언어라든가 세계에 대해 고민은 해야 할 거다. 예를 들어 윤태호 작가가 ‘미생’을 트렌드를 쫓아서 그런건 아니지 않나.

그림체가 독특하다. 전통적인 한국만화에 일본, 미국만화의 느낌이 섞여 있다. 만화마다 조금씩 작화 느낌도 다르고.

작품마다 작화 풍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고생한다. 매번 작품 초기에 오래 걸리는 이유 중 하나다. 이번에도 또 바뀐다. 이번엔 모바일에 최적화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컷분할에서 벗어나 TV 비율로 바꿨다. 이유가 뭐냐면 웹툰을 모바일로 90%가 본다고 한다. 모니터 비율로 바꾸면 가운데 그림을, 위 아래로 말풍선을 넣으면 딱 떨어진다. 연구 끝에 이렇게 했다. 작품의 색도 많이 달라졌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뭔가

그림은 일단 이야기에 맞춰서 가야 한다는 태도가 있다. 스타일이 없는 작품이 싫기도 하고. 만화에서 스타일은 스토리보다는 연출과 이미지의 작용이 크다. 우리가 흔히 스타일리스트라고 부르는 영화 감독 중 대표적인 이가 팀버튼이나 이명세 감독이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결국 이미지를 갖고 논다. 만화가 초창기 시절, 나는 그림만 그리고 재경이가 스토리를 했다. 그때 스토리를 쓰지 않는것에 대한 갈증과 컴플렉스가 있었다. 그걸 덮기 위해 강화한게 스타일이다. 뭔가 하나를 더 갖춰야만 했다. 지금은 스토리도 쓰고 있지만, 이미지를 갖고 끊임없이 변화 시도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 독고탁이나 까치처럼 하나에 정착하고 싶은데, 나는 그렇게 하나로는 못간다. 욕구와 욕망이 그렇게 맞춰져 있는 거 같다. 작품이 달라지면 배우도 달라져야지 않나.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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