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순간] 관행을 부수면 시장이 열린다, 엔카닷컴

성공한 기업의 역사를 돌아보면 현재의 성공을 가능케 한 결정적 순간을 찾을 수 있습니다. 모든 기업은 중요한 결정적 순간을 맞이합니다. 이 순간에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좌우되기도 합니다. 그저 평탄한 길만 걸어온 기업은 없습니다. 이에 바이라인네트워크가 창간 8주년을 맞아 창간 기획 시리즈 <결정적 순간>을 연재합니다. 국내 대표 테크 기업을 성공으로 이끈 결정적 순간을 돌아봄으로 해서 많은 스타트업과 창업가, 테크 기업이 그와 같은 결정적 순간에 성공의 길을 선택하길 기대합니다.
<연재 순서>

⑫ 관행을 부수면 시장이 열린다, 엔카닷컴

“얼마까지 알아 보고 왔어요?” “지금 이 차가 제일 싸게 나온 거예요” 

2000년의 중고차 시장에서 쉽게 들을 수 있던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중고차 거래가 시작된 것은 1970년대 말. 장안평을 시작으로 전국에 중고차 매매업체가 늘어났고, 오프라인 중심으로 시장이 만들어졌죠. 그런데 이 시장엔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소비자가 본인이 사려는 중고차의 정보를 알 길이 없어, 딜러의 말에만 의존해야 했죠.

이렇게 거래 당사자 중 한 명만 ‘정보’를 쥐고 있어서, 불신 때문에 싼 물건만 사고 팔게 되는 시장을 흔히 ‘레몬 마켓’이라고 부릅니다. 레몬 좋아하는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시큼하고 맛없는 과일’이란 뜻에서 유래한 말인데요. 불량품을 뜻하는 속어로 통합니다. 이 중고차가 사실은 얼마에 팔려야 적합한지, 기존에 사고 이력은 없는지 등과 같은 정보를 소비자가 모르기 때문에 소비자와 딜러의 눈치싸움이 중요해졌고, 통상은 진짜 정보를 쥐고 있는 딜러에게 유리한 거래가 많이 일어났죠.

그러다 2000년이 왔습니다. 벤처붐이 일던 시기였고, 대기업 내에서 사내벤처의 싹이 트던 때이기도 합니다.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지마켓과 같은 온라인 커머스가 막 대중적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엔카는 그런 분위기를 타고 SK주식회사에서 시작한 사내벤처였습니다. SK 내부에서 벤처를 키워보자고 ‘비전 프로젝트’란 걸 했는데, 당시에 평가가 좋아서 비즈니스 모델로 발탁된 경우였죠.

“중고차도 온라인으로 사고팔 수 있지 않을까?” “중고차를 거래할 때 소비자가에게 가장 필요한 정보는 뭐지?” “중고차 거래에 신뢰를 확보하려면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이때 ‘온라인 중고차 거래’라는 엔카 모델을 제안하고 주도한 이들은 사내에서도 비교적 젊은 대리, 과장급의 소수 인물이었습니다. 개인이 살 수 있는 가장 비싼 물건 중에 자동차가 세 손가락 안에는 들 텐데, 이 시장의 페인 포인트를 고칠 수 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라고 봤습니다. 이들이 선택한 것은 ‘신뢰의 회복’. 당시 중고차 시장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중고차 가격 표시제’와 ‘중고차 진단 및 수리보증 서비스’였죠. 중고차 거래 시장의 관행이 바뀌게 된 계기, 결정적 순간입니다.

가격이 미리 표시된다면, 딜러를 만나서 “이 차가 얼마인지”를 눈치 싸움 할 필요가 없겠죠. 이 사업모델을 엔카팀은 굉장히 빠르게 만들어냈습니다. 사실, 대기업에서는 긴 의사결정 과정 때문에 새로운 사업이 빠르게 자리잡긴 어려운데요. 사내벤처라는 강점을 살려 결제 기간을 대폭 간소화했습니다. 덕분에 사업착수 100여일 만에 사이트를 열고, 본격적인 사업에 들어갔습니다. 이 때의 추진력은 지금도 엔카에서 회자되는 이야깁니다. 대리, 과장급 직원들이 마치 임원처럼 움직일 수 있어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죠.

반응은 어땠을까요? 불같았습니다. 누가요? 기존의 딜러들이요. 엔카 때문에 딜러들이 여의도 광장에 수천여 명이 모여 반대 집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가격을 미리 공개하는 것은 관행이 아니다” “기존 중고차 시장을 대기업이 잠식한다”는 것이 딜러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뒤집어보면, 엔카가 나오자마자 시장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단 뜻도 됩니다. 중고차 시세 정보를 통해 “가격을 먼저 안다”는 것은 소비자의 협상력을 키울 수 있게 했고, 또 제품에 대한 품질 정보가 데이터 기반으로 공개 된다면 조금 더 비싼 가격을 내더라도 안심하고 중고차를 살 수 있게 했으니까요. 

당시의 엔카 직원들은 그래서, 시장의 딜러들을 거의 일 대 일로 만나 설득하는 것이 매일의 주요 일과였다고 합니다. 딜러들의 마음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엔카를 통해 딜러들도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였습니다. 거래 플랫폼이 열리니 딜러들은 더 많은 중고차 매물을 확보할 수 있게 됐고, 또 차를 사려는 소비자도 더 많이 연결할 수 있게 됐습니다. 게다가 엔카의 성장속도가 빨라 딜러들도 매출이 늘어나는 것을 빠르게 체감할 수 있게 된 것도 중고차 거래 제도 개선에 중요한 요인이 됐죠.

지금은 어떨까요? 엔카가 시작한 중고차 진단 서비스와 유사한 ‘성능점검법’이 현재는 제도화되었습니다. 엔카는 이 서비스를 ‘엔카진단’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엔카진단 차량은 전국 엔카진단센터에서 사고 여부, 옵션 유무, 등급 등을 엔카가 직접 확인한 것을 말하는데요. 이 과정을 거쳐 무사고로 확인된 중고차만 ‘엔카진단’ 마크를 달고 플랫폼에 등록하고 있습니다. 매년 엔카진단센터에서는 약 40만대의 매물을 진단하는데, 비중으로 따지면 플랫폼 상시 등록 매물의 약 40%에 달한다고 합니다.

엔카는 현재 연간 120만대가 등록되는 최대 규모 플랫폼으로 성장했습니다. 중고차 광고와 진단 노하우가 쌓였죠. 그래서 최근에는 또 다른 성장 모멘텀을 마련하고 있는데요. 그중 하나가 모바일 AI 진단입니다. 최근에는 AI를 통한 사진 판독 기술력이 많이 올라왔는데요, 바로 이 기술을 중고차 진단에 활용한다는 겁니다. 

엔카 모바일 AI 진단 서비스 모습

AI가 차량 내·외부 사진을 가지고 번호판, 옵션, 주행거리, 세부 모델 등의 정보를 자동으로 판별하는 것이 핵심인데요. 이렇게 되면 사람이 일일히 확인하던 때와 비교해서 차량 한 대 당 들어가는 등록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죠. 즉, 매물을 빠르게 확대하는 데 유리하단 뜻입니다.

이 모바일 AI 진단은 현재 전국 엔카 진단센터에서 활용중입니다. 확산 전에 1년 정도, 전국에서 중고차 시장이 제일 큰 수원의 고색지점에서 테스트를 했는데요. 이때 가장 중요하게 본 것이 “사람이 수기로 진단, 체크를 할 때 오류가 생길 수 있는 부분을 줄이고 보완하자”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또, 딜러들 입장에서는 빠르게 사이트에 차량이 등록되는 것이 매출과 직결되다 보니, 속도 측면도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엔카 측은 “현재 모바일진단 AI는 약 1700개 모델을 99% 식별가능하다”면서 “신규 모델과 옵션 등을 학습시키면서 지속적으로 고도화하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AI만 100% 믿고 있을 순 없기 때문에 추가로 인력을 투입, 검수하는 과정을 거쳐서 신뢰성을 확보하려 하는 중입니다.

앞으로 엔카는 뭘 하려고 할까요? 우선은 서비스 고도화입니다. 현재 엔카는 중고차 진단과 광고 외에, 직접 중고차 거래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서비스 발전 방향을 잡았습니다. 차를 팔고 사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시세, 진단, 상담, 결제, 금융, 탁송, 환불 등의 서비스를 엔카 안에서 해결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죠.

IT 기술과 인력 확보 같은 인프라 투자 역시 엔카가 집중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중고차 시장의 불투명성을 해소하는데 AI와 빅데이터 같은 기술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인데요. 현재 엔카닷컴 본사에서 일하는 이들의 40%가 개발인력이라고 합니다. 

사업 확장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최근에는 엔카진단 차량을 대상으로 중고차 과거 주요 이력을 확인할 수 있는 ‘차량 이력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데요. 진단 차량의 ▲신차 출고 정보 ▲소유자 변경 ▲보험 처리 ▲정비/수리 ▲자동차 검사 내용 등 10여개 이상의 주요 차량 이력을 간편하게 확인할 수 있는 서비스 입니다. 또, 개인에게 맞는 차량을 편리하게 확인 할 수 있도록 ‘AI 차량 추천 기능’을 고도화하고 있기도 하고요.

엔카는 궁극적으로 중고차 시장의 ‘슈퍼앱’을 지향하고 있는데요. 그러려면 더 많은 이들이 엔카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하겠죠. 예나 지금이나, 중고차 시장의 열쇠를 쥘 곳은 누가 더 소비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냐, 그 싸움에서 이기는 데겠네요.

[관련기사: 중고차 거래, 호구를 피하고 싶으신가요?]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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