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년 반만의 기다림 끝에 인텔이 4세대 제온 스케일러블 프로세서를 공식 출시했습니다. ‘사파이어 래피즈’로 잘 알려져 있죠. 당초 인텔이 밝혔던 사파이어 래피즈 출시 예정 시점은 2021년 하반기였습니다만, 공정 복잡성과 수율 문제 등에 봉착했다는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 왔습니다. 결국 인텔은 일부 고객사에 사파이어 래피즈를 미리 공급하기로 하고, 공식 출시일은 계속 미뤘습니다. 그렇게 해서 2023년 1월에 그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죠.

그래도 업계에서는 사파이어 래피즈의 출시 시점이 예상보다 많이 늦어지지는 않았다고 보는 분위기입니다. 일각에서는 사파이어 래피즈가 5월쯤에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거든요. 물론 공식 출시를 했다 해도 본격적으로 출하가 이뤄지는 시점은 4월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긴 합니다. 그럼에도 출시 자체만으로도 시장 곳곳에 미칠 영향이 적잖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업계에서도 꽤 주목하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가 공개한 24Gb DDR5 (출처: SK하이닉스)

메모리 업계, DDR5 출하량 증가 기대중

사파이어 래피즈 출시가 주목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국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부분은 메모리 시장에 미칠 영향입니다. 사파이어 래피즈는 DDR5를 지원하는 서버용 중앙처리장치(CPU)입니다. DDR5는 D램의 일종인 DDR(Double Data Rate) 시리즈 중 가장 최상급 메모리를 말하고요. 2014년부터 지금까지 주로 사용되는 DDR4에 비해 데이터 전송 속도는 2배 빠르고, 전력 소모량은 10% 줄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죠.

DDR5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주요 메모리 기업이 기대를 걸고 있는 제품 중 하나입니다. 개당 판매 수익이 높은 품목인 것이죠. 따라서 메모리 기업 사이에서는 DDR5가 캐시카우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침체됐던 메모리 시장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나오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지난 실적발표 당시 “서버용 CPU 출시로 DDR5 시장이 확대될 것을 기대한다”고 직접 언급하기도 했죠.

세 기업이 모두 작년부터 DDR5를 제공하기 시작했지만, 이렇다 할 큰 수요처가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CPU 제공업체가 DDR4와 DDR5를 모두 지원하는 프로세서를 출시하긴 했습니다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굳이 DDR5를 사용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DDR5 가격이 DDR4에 비해 2~3배 가량 비싸거든요.

하지만 인텔의 사파이어 래피즈와 지난 해 11월 출시한 AMD의 4세대 에픽 프로세서는 DDR5만 지원합니다. 여기에 사용자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서버용 CPU 교체 시기도 다가왔죠. 인텔과 AMD는 이 시기에 맞춰 제품을 출시했는데요, 성능과 저전력성을 함께 강조했습니다. DDR5도 전작 대비 전력 소모가 줄어든 메모리였고요. 저전력으로 구동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전력 소비를 아껴 총소유비용(TCO)을 줄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서버 운영자는 비용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서버용 CPU 교체를 대대적으로 진행할 것으로 보입니다.

더불어 인텔은 CXL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요, 이 또한 메모리 기업에게는 기회로 다가올 전망입니다. CXL은 Compute Express Link의 약자로, CPU와 그래픽 처리장치(GPU), 메모리 저장장치 등을 효율적으로 연결하는 인터페이스를 말합니다. 원래는 부품마다 각기 다른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원활하게 연결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결국 인텔이 제품에 CXL을 적용했다는 말은 곧 메모리와의 연동성이 늘어남을 의미합니다. 이는 메모리 업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윤곽 드러나는 CPU 시장구도, 다음 세대는 누가 승자?

사파이어 래피즈 출시가 메모리 업계에만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차세대 서버용 CPU 시장이 본격적으로 개화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거든요. 인텔 외 타 반도체 설계업체(팹리스)라면 신제품 출시 지연을 반길 듯 싶지만, 막상 업계 관계자나 시장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AMD가 오히려 사파이어 래피즈 출시를 기다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대부분입니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프로세서 시장 생태계를 이끌고 있는 곳이 인텔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AMD가 치고 올라왔다고 해도, 우선은 인텔 제품부터 사용하자는 인식이 업계 전반에 깔려 있는 것이죠. 익명을 요청한 업계 관계자는 “통상 CPU 협력사는 인텔 제품을 먼저 사용한 후, AMD 제품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며 “이는 서버용 CPU도 마찬가지로, 인텔에서 신제품을 내지 않으면 AMD도 정체기를 보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본래 인텔은 2021년 하반기에 서버용 CPU 신제품을 출시할 계획이었죠. 이에 맞춰 다른 협력사도 인텔의 규격에 맞게 부가적인 인프라 구축을 진행했을 겁니다.

대표적인 예로 2022년 6월 엔비디아는 자사 AI컴퓨팅 제품 라인인 DGX H100 시리즈에 사파이어 래피즈를 활용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사파이어 래피즈에 맞춰 제품 설계도 다 하고,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는 의미죠. 엔비디아 외에도 서버에 들어가는 부품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인텔의 신제품 출시에 맞춰 부품을 준비한 협력사는 더 많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데 인텔이 아닌 AMD 제품이 세상에 먼저 공식적으로 나왔죠. 협력사 입장에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제품 개발을 인텔에 맞춰 진행했는데, 타사 제품을 적용해야 하는 상황이 왔기 때문입니다. 고성능을 요구하는 인프라의 경우에는 부품 간 호환성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약간의 호환성 차이로 데이터 처리 속도와 전력 소모 차이가 나거든요. 결국 기업은 사파이어 래피즈 출시를 먼저 기다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사파이어 래피즈가 시장에 나왔으니, AMD의 서버용 CPU 신제품도 점차 판매량이 늘어날 전망입니다. 쉽게 말해, 사파이어 래피즈가 서버용 CPU의 새 시대를 연 것이죠.

다만 일각에서는 추후 주요 협력사가 AMD CPU에 좀 더 초점을 맞춰서 부품을 개발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 글로벌 반도체 시장 전문가는 “인텔은 서버용 CPU 에메랄드 래피즈와 그래나이트 래피즈 등 이후 출시 예정인 프로세서도 사파이어 래피즈처럼 소량 생산을 먼저 하고, 공식 출시는 더 늦은 시기에 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겠다고 밝혔다”며 “결국 협력사는 사파이어 래피즈와 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 하에 AMD에 맞춘 제품을 먼저 준비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인텔, ‘칩렛 생태계 강화’ 큰그림 그리나

인텔과 AMD가 각각 출시한 서버용 CPU를 보면, 두 기업의 추후 전략과 어느 부분에 중점을 두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AMD는 코어 수를 늘려서 기본 성능을 높였고, 인텔은 단순히 코어 수를 늘리기보다 AI 가속기를 12개 탑재하는 방식으로 전반적인 워크로드 처리 성능을 끌어올리고자 했습니다. 4세대 에픽 시리즈는 최대 96개 코어를 탑재할 수 있는 반면, 사파이어 래피즈는 최대 60코어를 지원합니다.

두 기업은 모두 서버용 CPU에 칩렛 기술을 적용했습니다. AMD는 칩렛 디자인을 도입해 코어 숫자를 쉽게 늘릴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고요, 인텔은 사파이어 래피즈에 칩렛 구조를 적용해 AI 등 다방면에서 전작 대비 2배 이상 높은 성능을 낼 것이라고 자부했습니다.

여기에 인텔은 AI가속기를 대량 탑재해 구조가 복잡해진 점을 감안해, 원API 툴킷을 함께 발표하기도 했죠. 원API 툴킷은 복수의 인텔 프로세서가 탑재된 시스템을 좀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개발하도록 돕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CPU와 그래픽 처리장치(GPU), 현장 프로그래머블 게이트 어레이(FPGA) 등 여러 부품을 이용해 신속하게 워크로드를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겁니다.


이는 인텔이 좀 더 칩렛 생태계를 염두에 두고 CPU를 출시했음을 의미합니다. 앞서 언급한 반도체 시장 전문가는 “인텔과 AMD 모두 칩렛 구조를 적용했지만, 여러 종류의 부품 간 결합과 툴킷을 함께 제공한 인텔이 좀 더 칩렛 생태계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며 “인텔은 특히 칩렛 규격을 정의하는 UCIe 컨소시엄의 중요성도 지속해서 강조하고 있는데, 모두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증권가에서는 당장 사파이어 래피즈가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확언하기에는 어렵다고 보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두 기업의 프로세서 개발 접근 방식이 상이했거든요. 하지만 장기적으로 칩렛 구조가 본격적으로 확산될 때에는 인텔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설명했습니다. 이후에도 두 기업 간 제품 경쟁은 치열하게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그에 따른 기술 개발도 진일보할 것이 기대되네요.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배유미 기자>youme@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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