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의 신간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모 중소기업 대표가 직원들에 보냈다는 단체 카톡인데, 그 내용이 조금 우습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일으킨 흙탕물도 맑게 가라앉으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 맑은 물을 유지하려면 서로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이 카톡은, 에어컨이 망가져서 덥다는 민원을 들은 사장이 작성한 것이다. 직장 근무 환경에 문제를 제기한 직원을 미꾸라지에 비유했다.

퇴근길에 서점에 들러 이 관장의 책을 사들고, 저녁을 먹으면서 읽은 구절이다. 같은날 오후 서울 현대미술관에서 있었던 ‘공정한 웹툰 생태계 조성을 위한 토론회’를 방청하고 나온 참이었다. 이날 현장에서는 작가들의 피해 사례가 발표됐고, 표준계약서 작성 등 작가와 플랫폼이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이 논의가 됐다. 방청석에서 나온 질문은 대부분 작가가 던진 것이었고, 어떤 이는 눈물을 삼키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입은 피해를 항변했다.

그런데 하필, 토론회 막바지에 레진코믹스가 보도자료를 보내왔다. 레진이 보낸 자료는 짧다. 전문을 옮기자면 이렇다.

“레진엔터테인먼트는 최근 일부 작가 등에 의한 근거 없는 레진 비방 사태와 관련해, 법적 대응을 시작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를 위해 허위 사실을 퍼트린 두 명의 작가에 대해 법무법인을 소송대리인으로 선임하여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장을 제출했습니다.

이는 허위 사실 적시와 그로 인한 확산으로 인해, 회사는 물론 레진코믹스에 작품을 연재 중인 다른 대다수 작가에도 피해가 커질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레진엔터테인먼트는 앞으로도 작가를 비롯한 회사의 파트너들과는 함께 발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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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두 작가는, 맨 처음 공개적으로 레진 측에 작가들의 복지 개선을 요구하고 블랙리스트 문제를 공개한 은송, 미치 작가다. 레진은 두 작가가 허위 사실을 적시해 회사는 물론 다른 작가들에게도 피해를 입혔다고 말한다. 레진의 말은 이렇게도 해석된다. 문제제기하는 소수의 작가 때문에 플랫폼이 망하면, 너희가 다른 작가들의 생계까지 책임질 수 있느냐, 는 것이다. 얘기인즉슨 두 작가는 레진코믹스의 미꾸라지다.

한국 사회는 아직도 집단주의가 강하고 조직이 개인에 우선한다. 문제제기를 하는 개인을 못 참아한다. 이럴때 쉽게 쓰는 협박이 있다. “너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보잖아.” 쌍팔년도에나 쓰였을 법한 이 말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진다. 불합리한 구조에 문제를 제기하는 개인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동료가 피해볼까 하는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을 건드림으로써 조직은 개개인의 불만을 효과적으로 억압할 수 있다. 그래서, 더 아쉽다. 혁신기업으로 입길에 오르던 스타트업에서 ‘선량한 다른 작가’ 를 언급하는 것이 불량해 보여서다.

개인을 제재하는 방식으로 소송을 택한 것도 적절치 않아 보인다. 소송은 말 안듣는 작가들을 통제하는 재갈물리기로 느껴질 수 있다. 소송으로 한 번 호되게 당한 작가들이 앞으로는 SNS에 공개적으로 불만사항을 말하지 못할 것이라고, 본때 보여주기 용으로 고른 수로 보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번지 수를 잘못 짚었다. 레진의 소송은, 오히려 작가들의 연대를 불러왔다.

한국만화가협회와 웹툰작가 협회는 성명을 내고 두 작가를 고소하려거든, 그간 레진 블랙리스트를 거론하고 제보를 수집하고 성명서를 낸 협회도 고소하라고 규탄했다. 두 작가가 이 소송을 개인으로만 감당하게 하지 않을 것이며, 협회가 할 수 있는 모든 협력을 다 할 것이라는 입장도 밝혔다. 작가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그림 그리는 손을 꺾는 자들과 끝까지 싸울 것이라는 의지도 보였다.

한국만화가협회와 웹툰작가협회가 낸 성명서.

 

앞서 말한 이정모 관장은 칼럼에서 미꾸라지를 변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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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꾸라지도 사실 깨끗한 물을 좋아한다. 더러운 물에서도 살아주는 것이다. 미꾸라지가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으면 웅덩이 바닥은 아예 썩어서 곧 아무것도 살지 못하게 된다. 미꾸라지가 흙탕물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나마 웅덩이에서 무언가가 살 수 있다.”

조직의 잘못을 공개하고 환경을 개선하려 노력하는 것이 미꾸라지라면, 나는 그런 미꾸라지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본다. 은송, 미치 작가의 문제 제기는 작가들이 처한 환경을 개선코자 하는, 그래서 작가들이 조금 더 나은 상황에서 작업할 수 있게 하고자 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플랫폼 입장에서 작가들의 행동이 미꾸라지 같았다면, 소송 말고 조금 더 진지한 대화에 임했으면 어땠을까.

이날 웹툰 토론회에 참석한 한 토론자는 “젊은 작가들이 문제제기를 하는 용기를 높이 산다”고 말했다. 혹자는 말한다. 만화판 불공정 사례는 출판 만화시장 때부터 있던 것 아니냐고. 그런 관행은, 깨져야 마땅하다. 비교적 개인주의 세대로 자라난 젊은 작가들이, 집단과 조직의 잘못된 관행을 깨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연대를 배우고, 실패보다는 성공을 맛보았으면 좋겠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젊은 작가들이 싸가지가 없는 것이라면, 그놈의 싸가지 개나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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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