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권 이사회 의장(출처=정원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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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는 어쩌다 이사회 의장이 됐나

<십자군 이야기> 작가 김태권, 정원엔시스의 AI 전환을 이끌다

서울대에서 미학, 라틴어·그리스어를 공부하던 만화가 김태권 작가가 갑자기 48년 된 서버 회사의 이사회 의장이 됐다. 그는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라는 교양 역사 만화로 이름을 알린 인물이기에, 중견 IT 회사의 이사회 의장 자리가 왠지 낯설 법하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게 다른지 모르겠다”고 한다. 지난 7월 31일 서울 강남 정원엔시스 사옥에서 만난 그는, 만화가로서 세상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짜던 방식과 지금 회사를 경영하는 방식이 의외로 닮아 있다고 말했다.

김태권 의장은 정원엔시스 창업자의 3세다. 흔히 기업의 승계라고 하면 후계자가 미리 입사해 실무를 익히는 절차를 떠올리지만, 그의 경우는 달랐다.

“원래는 회사 경영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어요. 아버지(김현종 전 대표) 건강이 갑자기 안 좋아지신 다음에 회사 일에 관여하게 됐습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저도 계획이 없었고, 아버지도 계획이 없으셨고, 회사에서도 계획이 없었어요.”

그렇다고 완전히 준비 없는 등판은 아니었다. 정원엔시스 이사회에 합류하기 전, 그는 이미 오랫동안 AI에 빠져 있었다. 만화가로 활동하면서도 코딩을 독학했고, 코딩 공부는 자연스럽게 자연어처리(NLP)로, 다시 지금의 LLM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것저것 직접 짜보고, NLP를 활용해 댓글과 게시판 여론을 분석하는 데이터 저널리즘 칼럼을 쓰기도 했다.

AI에 대한 이런 관심 때문일까. 그는 정원엔시스 이사회에 합류하며 AI 전환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

“기존의 IT 인프라 사업은 꼬박꼬박 매출이 나고, 흑자도 계속 나는 사업이에요. 저는 여기에 AI 사업을 붙이기 위해 이사회 의장을 맡았습니다.” 그의 이사회 합류는 갑작스러운 사건이었지만, AI 전환에 대한 그의 확신만큼은 오래전부터 쌓여온 것이었다.

회사 내부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림 그리던 사람이 갑자기 뭘 할 수 있겠느냐는 시선이 있었을 것 같다”는 질문에 그는 “저항이 있는 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AI부터 로봇까지, 방향에 대해서는 다 동의하고 있어요. 오히려 ‘우리도 바라던 바’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어요.”

현재 기존 IT 인프라 사업과 같은 본업은 한덕희 대표가 챙기고, 김태권 의장은 AI와 같은 신사업을 이끌고 있다.

김 의장이 그리는 AI 밸류체인

정원엔시스의 AI 전략은 두 갈래다. 하나는 기존 서버 사업에 AI를 얹는 것, 다른 하나는 AI 솔루션 자체를 사업화하는 것이다.

“클라우드 시대가 왔지만, IT 인프라를 직접 구축하고자 하는 산업은 여전히 있습니다. 공공·금융·제조·대학·의료 쪽은 여전히 온프레미스를 선호합니다. 이들에게 온프레미스 AI를 함께 공급하면 시너지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대표적으로 병원의 환자 상태를 카메라로 판독해 등급을 매기는 시스템, 여기에 LLM을 결합해 환자 정보를 요약해주는 서비스 등을 이미 공급했다고 김 의장은 밝혔다. 그는 “환자 정보는 클라우드에 올릴 수 없으니, 저희의 기존 서버·워크스테이션 사업하고 딱 맞는다”고 설명했다.

김 의장은 여기서 더 나아가 피지컬 AI까지 아우르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로봇 유통과 로봇 SI(시스템 통합) 사업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로봇 제조사에서 구매한 로봇을 공장에 그냥 넣는다고 작동을 하는 건 아닙니다.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기존 시스템과 연결을 하고 AI 프로그램 붙여야 생산라인에서 작동합니다. 피지컬 AI, LLM 같은 유행하는 단어들이어서 굉장히 새로운 사업으로 느껴지지만 IT 인프라를 깔고 필요한 기술을 제공하던 일을, 로봇과 AI 솔루션으로 확장하는 것뿐입니다.”

김태권 의장이 내건 비전은 “중소기업을 위한 팔란티어”다. 다만 이 표현이 자칫 과장으로 들릴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한 듯, 그는 구체적인 사례로 설명을 이어갔다.

“앞으로는 중소기업도 자기만의 딥러닝 모델을 갖고 싶어질 거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두부 공장에서 깨진 두부를 찾아내는 일을 사람이 할 필요 없이 AI 카메라가 확인하는 수요가 생길 수 있습니다. 두부 사진 150장만 찍어서 저희가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넣으면, 독자적인 두부 검사 AI 모델을 만들 수 있습니다.”

김태권 이사회 의장(출처=정원엔시스)

인과관계가 상관관계로 바뀌는 시대

미학과와 서양고전어학(그리스어·라틴어) 대학원을 나온 그에게 요즘 AI를 둘러싼 철학적 논쟁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딥러닝 시대로 넘어오면서, 인과성이라는 인문학의 중요한 규칙이 상관성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늘 ‘A가 일어나면 B가 일어난다’는 인과관계의 틀로 세상을 봐왔죠. 그런데 LLM은 그 틀 없이, 확률적 상관관계만으로도 사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어버렸어요.”

그가 말하는 ‘확률적 상관관계’란 LLM의 작동 원리 자체를 가리킨다. 인간의 언어는 앞 단어가 원인이 되어 뒤 단어가 나온다고 여겨져 왔지만, LLM은 앞선 토큰 이후에 어떤 토큰이 나올지를 그저 확률적으로 계산할 뿐이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모른 채, 통계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다음 단어를 이어 붙이는 것만으로 인간처럼 논리적인 문장과 추론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만화가와 경영인은 다르지 않다”

코스닥 상장 기업의 이사회 의장이지만, 그는 여전히 만화가다. 회사에 합류하기 전 계약된 책들을 여전히 마무리하고 있고, 한겨레·시사IN 등에 연재도 계속하고 있다. 이사회 의장직과 창작 활동을 병행하는 게 가능하냐는 물음에 그는 “의외로 두 일이 비슷하다”고 답했다.

“만화가로 있을 때 가장 중요한 고민이 두 가지였어요. 어떤 소재와 주제가 팔릴까,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쉽고 재미있게 전달할까. 경영을 할 때도 똑같아요. 어떤 사업이 돈이 될까 기획하고, 그 사업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쉽게 설명할까 고민하죠.”

그는 지금의 경험 자체가 언젠가 만화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사업하는 분도 많고, 인문학 공부한 분도 많고, 만화 그리는 분도 많지만, 이 세 가지를 다 해본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훗날엔 그 경험을 만화로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만화가가 어느 날 갑자기 IT 기업 이사회 의장에 올랐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계획에 없던 자리에 앉은 사람치고는 꽤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심재석 기자>shimsky@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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