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 생애주기 담는 DPP, 산업 경쟁력의 새 기준으로

지난 10월 말 다쏘시스템이 바이오소재 스타트업 마이셀(Mycel)과 함께 전과정평가(LCA))와 디지털 제품 여권(DPP)을 코피니티X(Cofinity-X)와 연계하는 프로젝트를 공식 수주했다. 이 프로젝트는 국내 기업이 LCA·DPP·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통합 도입한 첫 사례로, 다쏘시스템이 주도적 기술 파트너로 참여해 국제 표준 기반의 데이터 협업 체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LCA는 제품의 원료 취득, 제조, 운송, 사용, 폐기에 이르는 전 생애주기동안의 환경 영향을 정량적으로 평가하는 과학적 방법론이다. 단순히 공정 단계의 탄소 배출량만이 아니라, 원료의 조달 경로와 재활용 여부까지 포함해 전체 시스템 차원에서 환경 영향을 계산한다.

이 LCA를 기반으로 등장한 글로벌 제도가 DPP다. 이는 모든 제조품이 수출될 때 생산 과정과 탄소 배출 이력 등 제품의 생애 정보를 담은 디지털 여권(QR 코드 등)을 제출해야 하는 제도다. DPP의 핵심 입력값은 제품 탄소발자국(PCF)이며, ISO 14067 표준에 따라 LCA 기법으로 산출된 수치다.

국내 제조업은 현재 세계적으로 높은 제조 경쟁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 전반의 디지털화는 여전히 부족하다. 이제 LCA와 DPP 도입은 규제 대응을 넘어, 한국 제조 산업의 디지털 전환을 위한 첫 출발점이자 필수 과제로 변모하고 있다. 제품의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넘어 탄소 데이터의 투명성이 새로운 경쟁력의 기준이 된 것이다.

다쏘시스템은 지난달 29일 부산에서 ‘수출 경쟁력 강화를 위한 LCA·DPP 전략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지금까지 완성차 OEM이 주로 공장 중심 ESG 보고 체계를 운영해왔다면, 이제 유럽 배터리 규제 이후 LCA·DPP는 공장에서부터 재활용까지 확장되는 실시간 데이터 체계가 됐다는 판단에서다.

‘수출 경쟁력 강화를 위한 LCA·DPP 전략 컨퍼런스’에서 트레스웍스 홍석진 대표는 LCA를 “탄소 책임의 새로운 언어이자 산업 경쟁의 패러다임 전환”으로 규정했다. 그는 기존의 생산지 중심 탄소 산정 방식(프로덕션 모델)이 소비지 기준(컨섬션 모델)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제 탄소 책임은 ‘누가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누가 소비하는가’에 따라 나뉘며, 소비자는 제품의 전 생애주기 전체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변화의 배경에는 탄소 예산(Carbon Budget) 개념이 있다. 지구 평균 온도 상승을 1.5℃ 이하로 억제하려면 사용할 수 있는 총탄소량이 이미 절반 이상 소진된 만큼, 원료 조달부터 재활용까지 전과정 관리가 불가피하다. 유럽이 이를 산업 전략으로 받아들여 리쇼어링 정책과 결합시키면서, LCA는 단순한 환경 보고서를 넘어 ‘산업의 운영 언어’로 자리 잡고 있다.

LCA와 DPP: 생애주기를 담아내는 디지털 여권

앞으로 완성품 제조 기업은 납품된 모든 부품 정보를 하나의 QR코드에 통합해야 하며, 납품사 역시 자체적으로 DPP 생성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수출 시장에서 배제될 위험에 놓인다. 따라서 DPP는 이제 단순한 환경 규제가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 경쟁력의 필수 요소다.

유럽연합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배터리법, 지속가능 제품 규제(ESPR) 등 강력한 환경 법안을 도입하며 환경 규제를 산업 전략의 축으로 삼고 있다. 특히 DPP 제도는 2024년 7월 13일부로 발효되었고, 배터리 산업은 2027년 2월 18일부터 의무 적용이 확정됐다.

이로 인해 기업 관리 단위는 기업 단위에서 제품 단위로 전환됐으며, 개별 부품·공정·소재별 데이터 확보가 수출 허가의 필수 요건이 됐다. EU의 이러한 정책은 단순한 환경 보호를 넘어 데이터 주권을 중심으로 한 산업 경쟁력 확보 전략으로 해석된다.

한국 기업이 대응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DPP 미도입 시 EU 수출이 사실상 제한되므로 수출 경쟁력 확보의 측면에서, 공급망 전체의 ESG 이행 여부가 평가 항목으로 반영되므로 지속가능성의 측면에서, 친환경 제품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며 브랜드 가치와 직결되므로 소비자 인식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측면에서다.

이제 글로벌 규제 대응의 무게 중심은 디지털화된 LCA로 옮겨가고 있다. DPP에 필요한 탄소발자국(PCF) 데이터는 스마트팩토리 환경에서 이미 수집되는 생산량, 전력 사용량, 원자재 투입량 등 제조 데이터로부터 도출할 수 있다. 이를 기반으로 자동화 시스템이 구축되면, ESG 공시와 공급망 보고가 실시간으로 처리되는 AI 기반 디지털 규제 대응 체계가 가능해진다.

유럽이 주도하는 데이터 스페이스 개념은 이러한 흐름의 핵심에 있다. 기업이 데이터를 스스로 보유한 채, 필요한 순간에만 계약 기반으로 특정 데이터를 교환함으로써 데이터 주권과 보안을 지키면서도 협업이 가능한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다. 결국 AI와 데이터 기반 인프라가 LCA·DPP 체계의 실질적 실행력으로 작용하며, 이는 산업 전반의 디지털 전환 가속화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규제 환경 속에서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SK AX, 다쏘시스템, IBCT, Cofinity-X 네 개 기업이 최근 4자 협의체를 구성했다. 이 협의체는 한국 기업이 데이터 주권을 지키면서도 글로벌 공급망 규제에 대응할 수 있는 지원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출범했다.

다쏘시스템은 3D익스리언스 플랫폼을 통해 LCA·DPP 데이터를 실제 설계·생산 공정에 통합해 탄소 감축 실행 체계를 지원하며, SK AX는 유럽 표준 기반의 Catena-X 온보딩 및 데이터 컨설팅을 추진한다. IBCT는 Catena-X 공인 인증 플랫폼 인피리움(Infirium)을 제공해 DPP·Traceability·PCF 등 데이터 기반 통합 솔루션을 지원하고, Cofinity-X는 글로벌 자동차 기업을 위한 Catena-X 플랫폼 운영사로서 국제 연계와 교환 체계를 담당하는 식이다.

Catena-X와 데이터 스페이스

SK AX 윤항노 ESG 파트장은 “LCA와 DPP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데이터 스페이스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유럽은 미국·중국 중심의 중앙집중형 클라우드 생태계에 대응하기 위해 각 기업이 데이터를 직접 보유하고 필요한 부분만 조건부로 교환하는 ‘데이터 주권’ 기반의 구조를 구축해왔다. 이 전략은 독일의 IDS 표준에서 시작돼 Gaia-X, Catena-X로 이어졌다. Catena-X는 자동차 산업을 위한 데이터 스페이스로, BASF·Bosch·Siemens·SAP 등이 참여한 Cofinity-X가 운영한다. 2025년부터 제품 탄소발자국(PCF) 제출이, 2027년부터 DPP 의무화가 시행된다.

윤 파트장은 “이제는 보고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부 데이터를 자동화하고 협업 체계를 갖추는 것이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다쏘시스템의 곽준범 파트너는 평균값 기반의 LCA를 넘어 설계·조달·생산 데이터를 통합한 BOM(자재명세서) 기반 LCA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BOM은 제품 구조를 뼈대로 삼아 각 부품의 탄소 데이터를 실시간 추적하고, 상위 구조로 롤업해 전체 탄소량을 계산할 수 있게 한다.

이 과정에서 트레스웍스의 데이터 표준화 컨설팅과 IBCT의 Catena-X 인증 SaaS 플랫폼 Infirium이 연동된다. IBCT 이정륜 대표는 “탄소 데이터는 보고서가 아니라 공급망을 통과하는 입장권이자 영업 자산”이라며 “국내 기업이 데이터 주권을 지키며 글로벌 OEM과 협업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온프레미스(내부 서버) 기반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많은 관계자들이 시작은 모빌리티 산업으로 보고 있다. Catena-X는 자동차 산업에서 출발한 최초의 데이터 스페이스(Anchor Project)로, 독일 정부와 유럽 완성차·부품사가 주도해 공급망 데이터를 하나의 표준 체계로 연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플랫폼을 운영하는 Cofinity-X는 BASF, 보쉬, 지멘스, SAP 등이 참여한 민간 주도형 조직으로, 유럽이 규제를 통해 산업 경쟁력을 확장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2025년부터 Catena-X는 제품 탄소발자국(PCF) 데이터 제출을 요구하며, 2027년부터는 DPP 의무 적용이 본격화된다. 모든 데이터는 권한이 설정된 범위 내에서 Catena-X 데이터 스페이스를 통해 전송된다.

인피리움 플랫폼은 블록체인 기반 PQI 인증체계를 활용해 데이터 위·변조를 방지하고, 기업 내부 온프레미스 환경에서 커넥터 기능을 직접 제어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이를 통해 한국 기업은 민감한 기술정보를 해외 클라우드에 노출하지 않고도 EU 규제에 대응할 수 있는 안전한 체계를 갖출 수 있다.

이처럼 모빌리티 산업에서 시작된 Catena-X 모델은 향후 일본 우라노스 에코시스템, 중국 데이터 스페이스, K-데이터 스페이스 설립 등에 연동될 전망이다. 한국의 4자 협의체는 이러한 국제 생태계 속에서 중소·중견 제조기업이 주도권을 잃지 않고 글로벌 표준에 맞춰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다쏘시스템과 마이셀의 LCA-DPP-Cofinity-X 연계 프로젝트에서 마이셀은 월 단위로 LCA·DPP 데이터를 발행하고 Cofinity-X 데이터 스페이스와 직접 연계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이는 한국 기업이 유럽 공식 LCA·DPP 네트워크에 연결된 첫 사례로 기록된다.

다쏘시스템은 데이터 수집과 분석, 국제표준 인증을 담당하는 트레스웍스(Tresworks), 시스템 통합 및 글로벌 네트워크 연계를 맡은 IBCT와 함께 엔드투엔드 서비스 체계를 구현했다.

정운성 다쏘시스템코리아 대표이사는 “이번 계약은 한국 기업들이 LCA와 DPP를 단순한 규제 대응이 아닌 전략적 경쟁력의 도구로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다쏘시스템은 데이터 기반 협업과 플랫폼을 통해 국내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한 단계 도약시킬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데이터 주권, 한국 제조업의 새 기준

다쏘시스템코리아 김현 파트너는 “이제 중요한 것은 데이터를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 생태계의 주도권을 누가 갖는가”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은 높은 제조 역량에도 불구하고 산업 전반의 디지털화는 아직 부족하다”며 “LCA와 DPP를 단순한 보고 체계가 아닌 실행 가능한 데이터 기반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컨퍼런스가 서울이 아닌 부산 현장에서 열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기업 중심의 공급망 구조 속에서 데이터 접근이 어려운 중소기업을 직접 지원하기 위해서다. 다쏘시스템코리아 김현 파트너는 “한국 기업이 스스로 데이터를 만들고, 관리하고, 교환하는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며 “탄소 감축의 실행력과 데이터 주권 확보가 곧 산업 경쟁력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쏘시스템코리아 김현 파트너

이제 LCA와 DPP는 규제가 아니라 산업 경쟁력의 언어가 되고 있다. 제품의 생애주기를 디지털로 관리하고, 데이터 기반으로 지속가능성을 증명할 수 있는 기업만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신뢰를 확보할 수 있다. AI와 데이터 인프라, 그리고 국제 표준의 결합은 한국 제조 산업이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새로운 경쟁 구도를 선점할 수 있는 기회다. 기후 위기가 선택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듯, 탄소 데이터 혁신은 한국 산업의 생존을 좌우하는 과제로 다가오고 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김우용 기자>yong2@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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