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체 칩 만드는 빅테크, 레거시 반도체 기업은 돌파구 ‘골몰’

빅테크 기업이 자체 칩 개발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더 높은 성능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자사 시스템에 특화된 칩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애플, 구글, 아마존에 이어 테슬라까지 칩을 직접 설계하겠다고 나서면서, 범용 반도체 기업은 모델 다각화 등을 통해 돌파구 마련에 나섰다.

자체 칩 개발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는 애플을 꼽을 수 있다. 애플은 2020년 11월 자체 개발한 프로세서 M1을 탑재한 노트북을 공개했다. 인텔 칩을 탑재했던 전작 대비 제품 성능이 큰 폭으로 증가하면서, 당시 대중은 “괴물 칩이 나타났다”는 반응을 보였다.

애플이 자체 칩 개발에 나선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범용 칩으로 성능 강화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그간 범용 칩을 생산해 온 레거시 반도체 기업은 미세 공정 한계에 직면하면서 성능 개선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결국 빅테크 기업은 미세 공정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레거시 반도체 기업의 차세대 칩이 아닌 ‘자사 시스템에 특화된’ 반도체를 사용해 성능을 개선하는 것이 더 긍정적으로 작용하겠다 판단했다. 반도체 사업을 영위하지 않는 기업이라 하더라도 칩 설계는 한다는 것이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 10 가운데 반도체를 판매하는 기업은 세 곳에 불과했다. 하지만 자체 칩 개발은 10개 기업 모두가 진행하고 있었다.

(출처=보스턴컨설팅그룹)

자체 칩을 개발하는 곳이 늘어난다는 건 곧 반도체의 종류가 매우 다양해짐을 의미한다. 이는 그간 범용 칩을 만들던 레거시 반도체 기업의 위상이 낮아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빅테크 기업이 레거시 반도체 기업의 칩을 사용하지 않고 자체 개발한 칩을 사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중앙처리장치(CPU) 시장 양대 산맥을 이루던 인텔과 AMD의 ‘그저 성능이 좋은 칩 만들기’라는 전략은 더 이상 시장에서 절대적인 메리트로 작용하지 않게 됐다.

그렇다면 레거시 반도체 기업은 다품종 소량생산화되는 프로세서 시장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먼저 파운드리 사업 강화를 꼽을 수 있다. 삼성과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 강화에 힘쓰겠다고 밝힌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마냥 파운드리 사업에 의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기존 영위하던 사업에 비해 매출 차이가 크게 나기 때문이다. 파운드리 사업에 정통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인텔이 CPU를 생산하면 웨이퍼 한 장당 40만달러(약 5억원)를 벌 수 있지만, 파운드리 사업으로 전환하면 같은 웨이퍼 한 장당 2만달러(약 2600만원) 정도밖에 벌 수 없다”며 “결국 종합반도체기업(IDM) 입장에서는 온전히 파운드리 사업에 의존해 이 같은 수요를 맞출 수 없어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결국 인텔, AMD 등 레거시 반도체 기업도 다양한 고객사의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반도체 개발에 나서기 시작했다. 빅테크 기업처럼 자체 칩을 개발할 여력이 되지는 않지만, 높은 기술력이 필요한 사업을 하는 업체를 공략하기 위함이다.

앞서 언급한 관계자는 “반도체를 설계하고 생산하는 데에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자체 칩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자금력과 충분한 수요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며 “따라서 범용 반도체를 주로 생산하던 기업은 여력이 되지 않으면서도 자체 칩 개발이 필요한 기업을 주요 타깃으로 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텔은 다방면으로 프로세서가 사용될 것을 고려해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지난 1월 출시한 서버용 4세대 제온 스케일러블 프로세서(코드명 사파이어 래피즈)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인텔은 사파이어 래피즈가 현존하는 CPU 중 가장 많은 AI 가속기를 탑재하고 있어 다양한 워크로드를 최적화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나승주 인텔코리아 상무는 사파이어 래피즈 출시 간담회에서 “코어 수를 높여 성능을 높이는 것 못지않게 다양한 고객의 수요를 충족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번 프로세서는 AI, 보안, 데이터 스트리밍, 네트워크, 스토리지, HPC 등 다방면에서 최적화가 가능하고, 각 목적에 맞춰 사용자 경험을 강화했다”고 말한 바 있다.

AMD는 프로그래밍 가능한 반도체 FPGA(Field Programmable Gate Array)를 주로 하는 업체인 자일링스(Xilinx)를 인수했다. FPGA는 기능에 맞게 구조를 비교적 수월하게 바꿀 수 있는 반도체의 일종으로, 맞춤형 모델을 만드는 데 주로 사용된다.

AMD 관계자는 “반도체의 다품종 소량 생산화가 범용 반도체 기업에 전혀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도 커스텀 모델을 위해 다양한 품종의 반도체를 생산해 그 트렌드를 맞추고자 한다”며 “FPGA는 고객 수요에 맞춰 커스터마이즈가 가능한 반도체로, 현 시장 필요를 맞출 수 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인텔과 AMD는 칩렛(Chiplet) 생태계를 강화해 다품종 소량생산화되는 반도체 업계 필요를 충족하고자 한다. 칩렛이란 CPU나 그래픽처리장치(GPU), 메모리 등 특정 기능을 가진 최소 단위의 칩을 말한다. 이 칩렛을 필요에 따라 레고처럼 조립하면 고객사는 원하는 성능의 반도체를 쉽게 만들 수 있다.

UCIe 컨소시엄도 돌파구 중 하나다. 2022년 3월 인텔, 삼성전자, AMD, 암(Arm) 등 주요 기업이 만든 칩렛 규격 컨소시엄이다. 각기 다른 업체의 칩렛이 함께 작동할 수 있도록 개방형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목표다.

AMD 관계자는 “칩렛 생태계가 확대되면 고객사는 커스텀 반도체를 손쉽게 만들 수 있다”며 “레거시 반도체 기업이 칩렛 규격 제정을 위한 UCIe 컨소시엄을 제정한 이유도 그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배유미 기자>youme@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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