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판 IRA로 불리는 ‘CRMA’, 미국과는 다르다?

유럽연합(EU)이 내놓은 새로운 법안은 업계에 어떤 파도를 일으킬까. 원자재 공급망을 안정화하기 위한 EU의 ‘핵심원자재법(Critical Raw Materials Act, CRMA)’ 초안이 나온 가운데 과거 미국의 인플레감축법(IRA)의 재림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CRMA는 유럽판 IRA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IRA는 전기차 분야의 미국 무역장벽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미국 버전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에는 압박의 정도가 낮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공개된 CRMA 초안에는 EU에서 소비되는 핵심 원자재는 지역 내에서 10% 이상 채굴해야 하며, 40% 이상을 가공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15% 이상은 지역 내에서 재활용해야 하며, 모든 가공 단계에서 특정 국가에 대한 원재료 수입량이 EU 연간 소비량의 65%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얼핏 보기에는 CRMA도 IRA처럼 국내 기업에 압박이 될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애초에 CRMA와 IRA를 찬찬히 뜯어보면 분명 차이가 있다.

CRMA는 원재료 공급 안정화에 초점을 맞춘다. 전기차 시장이 성장하면서 이차전지 등 광물 핵심 원자재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데, 특정 국가가 공급망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현 시장 구조가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유럽은 원재료 공급망을 분산시켜 수급 불안정 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이번 법안을 제정했다.

반면 미국 IRA는 미국 경제 활성화에 방점을 찍는다. IRA는 조 바이든 행정부의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 슬로건을 기반으로 한다. 재정적자를 해소하고, 친환경 경제로의 전환이 주요 목적이다. 자국 내에 배터리부터 전기차 생산라인까지 모두 구축할 것을 요구하는 이유다.

두 법안의 차이는 전기차 시장 차이로부터 나온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 따르면, EU는 2009년부터 차량배출목표규정(EU Fleet wide target regulation)을 적용해 차량의 탄소 배출을 규제하고 있다. 오랜 기간 친환경 정책을 도입해 오면서 EU는 전기차 시장 생태계를 전반적으로 다질 수 있었다.

반면, 미국 전기차 시장은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에야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전기차 보조금을 축소시키는 등 친환경 정책에 소극적으로 반응해 왔다. 그 결과 유럽 등 다른 지역에 비해 전기차 산업이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전기차 등 친환경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고, 결국 친환경 정책이 담긴 IRA 법안을 제정했다.

전기차 산업을 새롭게 활성화하기 위해 미국은 자국 내에 생태계를 새롭게 구축해야 했다. 하지만 이를 단시간에 확보하기에는 쉽지 않은 실정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자국 내 원재료, 배터리, 전기차 공급망을 빠르게 확보하기 위해 다른 국가에 압박을 넣기 시작했다. 우리나라가 보기에 가혹해 보이는 건 이 때문이다. 미국은 IRA에 중국산 광물을 사용할 수 없으며, 자국 내에서 조립된 전기차에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내용 등을 세부조항에 집어넣었다.

이는 국내 기업에도 독소조항으로 작용할 수 있다. 우선 국내 배터리 3사는 중국 원재료 시장 의존도가 높다. 이 의존도를 빠른 시일 내에 줄여야 한다. 완성차 업체는 큰 돈을 들여 미국 안에 전기차 생산라인을 빠르게 건설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국내 완성차 업체는 대부분 국내에서 전기차를 생산하기 때문에, 이 같은 조항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물론 CRMA에도 국내 기업에 압박이 될 만한 사항이 없는 건 아니다. 일부 대기업에 대한 전략원자재 공급망에 대한 감사 및 기업 차원의 취약성 테스트(Stress Test)를 수행한다는 조항이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일종의 감시를 당하는 것이니 다소 부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특정 국가의 광물을 사용할 수 없게 되거나 대규모 공장을 갑작스럽게 타지에 건설해야 하는 건 아니다. IRA만큼 국내 기업에 부담이 되지는 않을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오히려 국내 소재 업계, 특히 폐배터리 업체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배터리에 사용되는 원재료 중 15% 이상은 유럽 내에서 재활용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도 이에 맞춰 유럽 내 폐배터리 광물 생산을 준비 중이다.

대표적으로 성일하이텍은 유럽 헝가리와 폴란드에 지사를 마련했고, 독일과 스페인 등지에 생산라인을 건설하고 있다. 폴란드는 현재 거의 완공 단계에 접어들었고, 미국·인도네시아·독일·스페인 공장은 빠르면 2024년 완공 예정이다. 회사는 이후에도 유럽 시장에 꾸준히 대응할 계획이다.

배터리 업계에는 IRA때와 마찬가지로 공급망 다변화라는 과제가 주어진 셈이지만, 이미 미국 IRA를 기점으로다변화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영향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법안 여부와 별개로 공급망을 다변화해야 추후 배터리 공급이 안정적으로 이뤄질 수 있기 때문에, 큰 문제로 작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국내 배터리 업계의 설명이다.

한국무역협회 관계자는 “세부조항이 나오기까지는 1~2년 가량 걸리기 때문에, 그간 국내 기업이 다변화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며 “최종 법안이 어떻게 나올 지 좀 더 지켜보고, 모니터링하면서 준비를 해 나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배유미 기자>youme@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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