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칩스법, 오히려 한국에 이득될 수도”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반도체 지원법, 일명 ‘칩스법(CHIPS Act)’을 제정한 가운데,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국에 오히려 득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그간 업계에서는 칩스법이 중국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이를 뒤집는 추측이 나온 것이다.

비즈니스 소프트웨어 제공업체 SAP와 투자자문기업 마벡(MAVEK)은 27일 ‘글로벌 반도체 전쟁과 미래: C레벨 서밋 2023’을 개최했다. 행사에서 각 연사는 미국 칩스법이 글로벌 경제와 주변국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연사들은 칩스법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다른 국가에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반도체 화상회의에서 반도체 웨이퍼를 손에 들고 이야기하고 있다.

미국은 꾸준히 반도체 자국중심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다. 자국 내 반도체 공급망을 확보하고, 현재 갈등 중인 중국 산업을 제재하기 위함이다. 그 일환으로 미국은 반도체 장비, 설계 소프트웨어, 메모리 등이 중국에 유입되지 못하도록 제재를 가하는 상황. 또 우리나라와 대만, 일본과 반도체 연합 ‘칩4 동맹’을 맺고, 네덜란드 정부에는 장비 제조업체 ASML이 중국에 제품을 납품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특히 우리나라는 대중국 반도체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가 중 하나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00년 이후 20년 간 우리나라의 중국 반도체 수출 비중은 12.4배 늘었다. 전체 산업군 중 가장 큰 증가세다.

여기에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반도체 기업은 중국에서 생산라인을 돌린다. 장비를 유입하지 못하면 공장 가동이 어려운 현실에서 현재 미국은 중국에 자국의 반도체 장비 반입을 금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그만큼 미국 정부의 대중국 제재는 국내 기업에 악영향을 미칠 거라는 전망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 컨설팅업체 베인앤컴퍼니(Bain&Company) 소속 주왕(Jue Wang) 연구원은 이 행사에서 “국가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 회사가 중국 시장을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며 “많은 반도체 기업이 미국의 규제를 따르면서 전체 시장의 20~40% 가량을 차지하는 중국 시장에 접근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미국 정부가 암암리에 자국 반도체 기업의 규제를 풀어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코로나19 발발 당시 미국은 중국 기업 대부분을 수출 제한 기업, 일명 ‘블랙리스트’에 등재했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정부는 양면적 입장을 취했다. 자국 기업을 대상으로 대중국 수출 규제를 암암리에 풀어줬다. 업계에서는 미국 정부가 자국 기업이 화웨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중국 기업에 기술과 제품을 제공하는 것을 허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미국이 중국에 납품하던 물량이 있었기 때문에, 자국 이익을 꾀한다는 현실적 선택을 한 셈이다.  

오히려 칩스법은 다른 국가에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미국 정부는 520억달러(약 68조9000억원) 규모의 천문학적인 자금을 반도체 신공장 건설 및 R&D 센터 건립 보조금으로 지급할 계획이다. 이로써 주요 반도체 기업은 미국 생산량(캐파, CAPA) 확보에 투입하는 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주왕 연구원은 “최근 주요 반도체 기업은 정부 보조금 수령 여부에 초점을 맞춰 공장을 늘리고 연구·개발을 진행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크리스티 사이먼스(Christie Simons) 딜로이트 글로벌 반도체 리더는 “현 시점에서 반도체 기업이 글로벌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중국이나 대만에서 생산하던 만큼 미국에서도 제품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며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이지만 그럼에도 이 조건을 만족하면 해당 기업은 칩스법 최대 수혜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중에서는 삼성전자가 칩스법 수혜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우선 국내 기업은 반도체 생산 측면에서 강점이 있다. 반도체 제조 역량이 부족한 미국이 대만의 TSMC뿐만 아니라 삼성전자에도 꾸준히 러브콜을 보내는 이유다. 게다가 삼성전자는 현재 145조원의 실탄을 장전해 놓았다. 그만큼 투자 확대 기반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반도체 불황에 맞춰 자연적 감산을 진행하지만, 그럼에도 장기적으로 생산량 확대 기조에는 변함이 없음을 밝혔다. 경기가 정상화되면 반도체 호황도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이 때 발생할 수요를 대비하겠다는 이유에서다.

일각에서는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역량이 늘어나면 우리나라와 대만 기업의 시장점유율이 줄어드는 것 아니냐고 우려한다. 하지만 미국이 아시아 지역의 반도체 생산량을 넘어설 가능성은 희박하다.

크리스티 사이먼스(Christie Simons) 딜로이트 글로벌 반도체 리더는 “이 세상에 필요한 모든 반도체를 미국에서 100% 만들 수는 없다”며 “대규모 반도체 공급망 재편이 일어나겠지만, 그 역량이 모두 미국에 몰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업계의 의견과도 일맥상통한다. 한 반도체 시장 전문가는 “미국이 자국 내 반도체 생산라인을 증설하고 있기는 하지만, 세계적으로 20% 정도만 가져갈 수 있을 것”이라며 “TSMC와 삼성전자가 기존 공장을 모두 허물고 미국에 모든 생산라인을 새로 건설한다면 미국 내에서 반도체를 100% 생산할 수 있겠지만, 이는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결국 미국의 본래 목적을 이해하면 칩스법 및 칩4 동맹 등의 악영향을 줄이고, 시장 확대 기회를 찾을 수 있다. 미국은 중국보다 2~3세대 정도 기술 우위를 유지하길 원하고, 중국은 반도체 자급률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양국 간 갈등 관계는 지속되겠지만, 그 사이에서 국내 기업은 양국의 입장을 모두 반영할 경우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가능성도 크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배유미 기자>youme@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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