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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회사 ‘플리토’가 AI 시대에 살아 남는 법

영어로 ‘파이프라인(pipeline)’은 한국말로는 “석유나 천연가스 따위를 수송하기 위하여 매설한 로”라는 뜻이죠. 그런데 이 뜻이 어디에서나 꼭 맞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제약회사에서는 파이프라인을 “제품화 과정은 아직 거치지 않은, R&D결과만 있는 원료의약품”이란 뜻으로 쓴다고 하는데요. 제약 회사 업무 문서를 번역하면서 파이프라인을 “석유를 나르기 위한 관로”라고 옮겨버리면, 큰 혼선이 있겠죠?

제약만 전문용어가 많은 동네는 아니죠. 금융이나 부동산, 의학, 법 같은 곳은 “그들만의 언어”가 있습니다. 의학 드라마를 보다보면 의사들끼리 주고 받는 말을 시청자가 못 알아들을까봐 화면 하단에 작게 용어 설명이 달리잖아요. 구글이나 네이버가 자동 번역 서비스를 선보였고, 그 정확도가 상당수준 올라왔음에도 번역을 100% 인공지능에 맡기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이들 전문용어의 번역쌍 데이터가 충분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플리토는 이런 기업들에 말뭉치(코퍼스)를 팔면서 수익을 올리는 곳입니다. 원래는 집단지성을 활용해 번역 서비스를 제공했고, 이 기술로 2019년 기술특례 상장까지 했는데요. 집단지성으로 감수한 양질의 번역쌍이 인공지능 기술을 개발하는 곳에게는 탐나는 재료겠죠. 이정수 플리토 대표를 최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이 회사 회의실에서 만났습니다.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AI 기술의 비약적 발전이 번역 서비스에도 도약의 기회가 될 터인데, 이에 관심 있는 이들이 생각보다 적어 답답하다는 것이 이 대표의 첫마디였습니다.

이정수 플리토 대표

솔직히 말해서, 문송이라 죄송한 저는 생성AI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면 번역은 사람에서 인공지능으로 넘어갈 우선적인 분야가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이 대표의 말이 처음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대표는 곧 2021년까지만 세상을 배워서 2022년 이후의 정보에는 어두운 챗 GPT에게 “중꺾마가 무슨 뜻이냐”고 묻더군요. 챗GPT는 당연히 모르죠. 최근 생긴 신조어니까요. 그래서 중꺾마는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라는 걸 가르쳤습니다. 가르쳤더니, 중꺾마가 들어간 그럴싸한 문장을 곧 만들어내더라고요.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 대표는 챗GPT에게 중꺾마가 들어간 문장을 100개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챗GPT가 제일 잘하는 일이 무언지 아십니까? 유려한(이라 쓰고 그럴싸한 이라고 읽는) 문장을 계속해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이 대표가 방금 한 일은,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잘 쓰이지 않았던 신조어가 들어간 문장을 100개 만들어낸 일입니다. 이 문장을 플리토 서비스에서 번역한다면? 네. 없었던 신조어 번역쌍 100개가 방금 생겨났네요.

이 일은 전문 분야에서 곧바로 적용 가능한 일입니다.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아서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완벽한 번역을 못해내야 번역 서비스 회사에 좋은 일인 줄 알았는데, 방금 보니까 아니네요. 번역 회사가 인공지능 학습을 위한 데이터를 충분히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회사의 최근 주요 고객은 ‘양질의 전문 말뭉치’를 원하는 기업입니다. 전문분야에서 원할 때는 그런 말뭉치를 제공해야 하죠. 데이터가 없으면 데이터를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그 과정에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나타났습니까? 챗GPT입니다. 챗GPT는 조건을 넣으면 문장을 생성해주죠. 챗GPT에게 신조어를 설명해주고, 관련 예문을 만들어내라고 명령하면(혹은 부탁하면), 수십개 수백개의 문장이 생겨납니다. 이 문장을 번역기에 돌리고, 다시 다듬는 과정을 거치면서, 제약회사 같은 곳이 원하는 말뭉치를 만들어내는 거죠. 그간은 데이터도, 자본도 없어서 전문분야를 위한 번역기 개발이 어려웠다면 이제는 생성AI가 빈 부분을 채워줄 수 있다는 것이 이정수 대표의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챗GPT는 번역을 위한 문장을 만들어주는 부분에서 플리토와 같은 기업에 최고의 파트너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죠.

인공지능이 시와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심지어는 대신해 시말서까지 써주는 와중에, 번역 서비스가 좌절하지 않고 생성AI라는 신기술 위에 올라타 미래를 보는 이유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볼까요? 사람이 만드는 인공지능의 최종목적은 대체로 ‘초개인화’입니다. 아이언맨에게 자비스가 있고, 테오도르(영화 ‘허(her)’의 주인공)에게 사만다가 있듯 모든 이에게 각자 맞춤화한 인공지능을 만들어내는 것. 그게 지금 인공지능 기술을 개발하는 회사들이 갖고 있는 우선적인 목표이죠.

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에게 맞춤한 번역기를 제공하는 것, 그게 번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가 가진 꿈입니다. 외국 출장을 갈 때면 통역사가 동행할 때가 있는데요. 가장 좋은 품질의 통역을 해주시는 분들은 양쪽 언어를 모두 잘하는 것은 물론이고, 해당 분야에 전문지식을 갖고 있는 분입니다. 번역 인공지능도 마찬가지겠죠. 금융이나 의학, 법 등등과 같이 전문 영역에서 쓰는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훌륭한 번역문을 내놓을 겁니다. 그냥 말만 잘해서는 찰떡을 말했는데도 콩떡, 팥떡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바로 여기에서, 집단지성 번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리토가 기회를 봅니다. 인공지능과 번역 서비스의 협업이 계속되는 한 사람의 역할도 남아 있을 겁니다. 이정수 대표는 그 역할을 “감수”에서 찾았는데요. 사람이 원하는 번역에는 기계적으로 완벽한 것이 아니라 어딘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감정을 어루만질 수 있는 문장도 포함됩니다. 어떤 문장이 사람이 원하는 것인지 감수하는 그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은 계속 이어질 거라고 말합니다. 영어 공부 안 해도 될까 해서 살짝 좋아했는데요, 인공지능이 만들어 번역해준 문장을 완벽하게 써먹으려면 여전히 외국어 능력은 필요하겠네요.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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