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반도체 시장에서 슈퍼 을(乙)이라고 불리는 기업이 있죠. 바로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입니다. ASML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납품하는 업체입니다. 7나노 미만의 미세 공정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EUV 노광장비를 필수로 사용해야 하죠. 지금은 없어서 못 파는 상황이다 보니, 슈퍼 을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ASML이라는 기업 뒤에는 EUV 노광장비를 뒷받침해주는 업체가 있습니다. 여러 업체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오늘은 자이스(Zeiss)라는 기업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자이스는 독일 광학⋅광전자 기술업체로, EUV 노광장비에 들어가는 거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자이스의 거울 없이는 EUV 노광장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이스가 어떤 기업인지, ASML에게 자이스가 왜 중요한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자이스가 걸어온 길

자이스는 1846년 독일 예나라는 도시에 설립됐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오버코헨으로 이전했고요. 광학 관련 사업만 176년을 이어 온 셈입니다. 독일에서 광학을 연구하던 카를 차이스(Carl Zeiss)는 식물의 조직을 관찰하기 위한 현미경을 개발했고, 그 과정에서 광학⋅정밀역학 연구를 위한 공방을 차립니다. 이렇게 자이스의 역사가 시작되죠.

이후 독일의 물리학자이자 광학기술자인 에른스트 아베(Ernst Abbe) 교수가 카를 차이스와 손을 잡았습니다. 에른스트 아베 교수는 카를 차이스가 설계한 렌즈에 물리학⋅수학적 모델을 접목시키면서 광학 기술을 더 확보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자이스는 대물렌즈를 개발했고, 광학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1871년에는 세계 최초로 광학현미경을 선보이기도 했고요. 현미경 개발 후에도 자이스는 군용으로 필요한 잠망경 등을 개발해 나갔습니다.

한동안 군용과 현미경 제품을 중심으로 납품하던 자이스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반도체, 의료 부문에서도 사업을 확장합니다. 각 부문에 탑재되는 렌즈나 거울과 같은 제품을 개발하게 된 것이지요. 2001년 10월 1일 자이스는 반도체 사업부 SMT(Semiconductor Manufacturing Technologies)를 출범했는데요, 이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광학 시스템을 제조합니다. 같은 해 말에는 의료 사업에 주력하기 위한 칼 자이스 메디텍(Carl Zeiss Meditec AG) 사업부를 새로 창립했죠.

여기서 한 가지 봐야 할 점은, 자이스가 반도체 부문 사업을 활성화한 시점은 20년 전이지만, 기술 개발은 그 전부터 이어 왔다는 것입니다. 자이스가 반도체 장비 관련 부품을 제공한 지는 50년 가까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EUV 관련 기술도 30년 넘게 개발해 오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자이스는 EUV 관련 특허만 2000개 이상 보유하게 됐죠.

ASML EUV노광장비(자료: ASML)

ASML에게 자이스가 필요한 이유

그렇다면, 자이스의 기술이 왜 ASML의 EUV 노광장비에 필요할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노광 공정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노광 공정이란 웨이퍼라는 기판 위에 빛을 쏴 회로를 새기는 방식의 공정을 말합니다.

웨이퍼 위에 빛을 보면 화학 변화가 일어나게 유도하는 감광액(Photoresist, PR)을 도포합니다. 이후 회로 밑그림이 새겨진 노광용 마스크를 위에 올린 후, 마스크 위에 빛을 쏩니다. 이 때 마스크를 통과한 빛은 웨이퍼 상의 네모난 칩 모양 안에 들어가도록 한 곳으로 모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마스크에 그려진 모양대로 회로가 그려진 칩이 생산됩니다.

회로를 더 촘촘하게 그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빛이 더 정확하게 한 곳에 모일 수 있게끔 해야겠지요. 빛은 구부러지거나(회절) 퍼지는(산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현상이 일어나면 한 곳에 빛을 모으기가 더 어려워지겠죠. 회절⋅산란 현상을 줄이기 위해서는 빛의 에너지가 커야 합니다. 에너지가 큰 빛은 파장이 짧다는 특징을 가지는데요, 자외선 쪽으로 갈수록 빛의 파장은 짧아집니다. 다시 말해, EUV는 자외선보다도 빛의 파장이 극도로 더 짧은 빛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 미세 회로를 그리는 데 사용될 수 있겠죠.

그런데 EUV의 빛은 얻어내는 방법도 어렵지만, 주위 물질에 쉽게 흡수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EUV를 쏴도 렌즈 몇 번만 거치면 렌즈에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빛의 흡수를 줄이고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ASML은 EUV 노광장비에 렌즈 대신 여러 개의 거울을 적용했죠. EUV 노광장비 내부 모습을 보면 거울로 여러 차례 빛이 반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ASML EUV노광장비 내부모습 (자료: ASML)

이 때 사용되는 거울을 자이스가 공급하고 있습니다. 자이스는 2010년, 반사, 흡수 등 변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원자 단위로 유리를 가공한 EUV용 특수 거울을 개발했습니다. 여러 차례 EUV를 반사해도 최종적으로 빛을 분사할 때 문제가 없을 정도로 손실이 덜하게끔 만든 것입니다. 그 덕분에 ASML은EUV 노광장비를 사용할 수 있게 됐죠.

물론 애초에 EUV 노광장비 기술은 ASML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산화탄소(CO2) 레이저를 액체 형태의 주석(Sn)에 분사한 후, 다시 한 번 레이저를 분사해 플라즈마로 만드는 기술은 ASML이 개발했거든요. 여기서 사용되는 레이저는 독일 산업용 레이저 제공업체 트럼프(Trumpf)의 것을 사용하고 있지만, 기술 자체는 ASML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빛이 웨이퍼에까지 닿기 위해서는 자이스의 거울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ASML도 자이스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협업 관계를 다져 가고 있습니다. 지난 2016년에는 자이스가 ASML로부터 10억유로(약 1조원)를 투자받았습니다. 미세 공정으로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EUV 장비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 예측한 ASML은 더 많은 렌즈와 거울을 공급받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따라서 ASML은 자이스에 전략적 투자를 했습니다.

피터 베닝크(Peter Wennink) ASML CEO는 “ASML EUV 노광장비에는 자이스 제품이 탑재되는데, EUV 수요가 늘어나면서 더 많은 자이스 제품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장을 지어 클린룸을 확보해야 하고, 사람도 고용해야 하는데 단시간에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자이스가 ASML에 미치는 영향력이 꽤 큽니다.

지금도 자이스는 EUV용 제품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독일 오버코헨에서 건물 신축 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EUV에 탑재하기 위한 제품 생산량을 늘리기 위함이죠. 세계적으로 EUV 노광장비를 찾는 반도체 기업이 늘어나면서 자이스 제품 수요도 증가하고 있는데요, 자이스가 ASML 수요를 맞출 정도로 생산량을 확대한다면 추후 반사이익을 볼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후에도 자이스가 ASML에 힘입어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 지, 기대됩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배유미 기자>youme@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