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재밌니?] 당신이 한화팬이 아닐지라도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1999년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물론 굳이 야구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1999년은 다른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한 번쯤 기억될 만한 해임이 분명합니다. 그해로 말할 것 같으면 –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노스트라다무스죠. 그해 고3이었던 학생들은, 어차피 멸망할 걸 공부는 해서 뭐하는가와 혹시라도 세상이 망하지 않으면 내 인생이 망한다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습니다. 세상에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보였죠. 세기말답게 나라 구석구석이 들썩였습니다. 신동아그룹 회장 부인이 당시 검찰총장 부인의 옷값을 대납한 일명 ‘옷로비 사건’으로 대한민국에 특검이 처음 도입됐고, 신창원이 잡혔으며, 세상에 양력 설이 1월 1일 당일로 지정되면서 신정 연휴가 사라졌습니다. 털썩. 사람들은 또 이 시기를 한국 인터넷 시대의 원년이라고 부릅니다. 벤처붐이 일어났고, IT에 돈이 쏟아져 들어오기도 했죠. 지금 잘 나가는 IT 회사들이 이때 사업들을 시작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사나난한 한 해였습니다.

그리고, 한화이글스가 한국시리즈에서 창단 이래 첫 우승이자 마지막 우승을 거뒀던 해인 것입니다.

저는 한화 이야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대략 2012년이었을까요. 동료들의 꼬임에, LG트윈스와 한화이글스의 경기를 보러 구장을 찾았죠. 인생 첫 야구 경기 직관이었습니다. 저는 LG 응원석 쪽에 앉아서 맥주와 치킨을 먹었습니다. 그때는 코로나고 뭐고 그런거 없었고, 그냥 다들 먹고 마시기 바빴죠. 그러다 가끔씩 경기를 쳐다봤는데, 어느 순간 제가 들고 있던 닭다리를 떨어트릴 뻔 했습니다. 그곳에서는, 한 편의 예술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치 채신 분이 있으시겠지만, 이 리뷰의 도입 부분은 소설가 박민규 씨의 인생작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패러디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삼미는, 프로의 세계에서 홀로 아마추어 야구를 하는 팀이죠. 아마추어의 미학을 그대로 가져와서, 잡기 싫은 공은 안 잡고 치기 싫은 공은 안 치는, 그런 아름다운 구단이 나옵니다. 저는 난생 처음 온 야구 경기장에서, 삼미의 현신을 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LG의 응원석에서 홀로 한화이글스에 환호했죠. 맥주를 치켜 들고, 치얼스.

이후로 3년. 낄낄 대며 한화에 입문했던 저는 나날이 어두워져 갔습니다. 류현진과 김태균과 박찬호가 함께 뛰는 이 팀은, 항상 순위의 끝에 머물렀습니다. 어차피 인생 공수래 공수거, 우승 따위에 집착하는 것은 모두 부질 없다고 여기면서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지는 것을 삼년씩 견디는 것이 힘에 부쳤습니다. 그리고는, 짧은 야구 팬 생활을 접었습니다. 사실 야구 경기 규칙도 잘 모르기 때문에, 게다가 제가 나고 자란 고장이 대전도 아니기 때문에 빠르게 그 늪에서 빠져 나온 것이죠.

그런데, 그 기억을 왓챠가 소환했습니다. 왓챠의 오리지널 시리즈 ‘한화이글스: 클럽하우스’가 말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한화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던 선수 김태균의 은퇴식으로 시작합니다. 김태균은 최고의 타자였으나, 변화가 절실한 한화에게는 약이자 독이었던 선수입니다. 한화에는 스타 플레이어는 있었으나 조직력은 약했습니다. 야구는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닌데 한화에는 홀로 빛나는 별만 있었던 셈이죠. 김태균 선수는 팀의 사정을 이해, 조금 이른 은퇴를 합니다. 자기가 자리를 물려줘야 팀에도 변화라는 새로운 바람이 불 수 있을 것이라는 용단이었습니다.

김태균의 은퇴와 함께 새로 부임한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은 선수들에게 “실패할 자유”를 강조합니다. 기존의 소극적인 플레이에서 벗어나야 잠재력을 극대화 할 수 있다고 말이죠. 새 감독과 코치진이 선수들이 계속 도전하도록 밀어붙이겠다고도 말합니다.

이날 특별코치로 자리한 김태균도 그의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답을 합니다. “새로온 감독님들은 대체로 초반에는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막상 시간이 지나고 (선수들이) 실수했을 때 (실패할 자유가) 안 지켜지는 부분이 있다 보니까, 선수들이 ‘진짜 그런가?’ 이런 불신이 생길 수 있다”고요. 그리고는,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더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습니다. “성적이 안 좋을 때 감독만 바꾸고 선수들만 자꾸 나가고. 사실 프런트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구단에 매뉴얼이 없다”라는요.

그러니까 이 다큐는, 리빌딩하는 한화이글스의 눈물나는 분투기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한화이글스’라는 그룹을 통해 살펴본 조직론, 리더론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리더가 왜 일관성을 가져야 하는지, 리더에 따라 좌지우지 되지 않도록, 그래서 구성원이 불안 없이 일할 수 있는 매뉴얼이 왜 조직에 필요한지 등을 역설하는요.

기억에 남는 장면이 또 있습니다. 한화의 대표적인 투수, 김범수 선수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입니다. 경기가 끝난 후, 수베로 감독이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범수가 정말 뛰어난 투수고 팀에서 의지하고 있다는 걸 알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칭찬인데, 김범수 선수의 표정이 좋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솔직히 지금 자신감이 없다”고 눈물을 보입니다.

김범수 투수는 한화에서 150km에 가까운 빠른 볼을 던지는 좌완 파이어볼러 입니다. 류현진 선수처럼 빠른 공을 던지는 데다, 그렇게 빠른 공을 던지는 왼손 투수는 드무니까 한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의 재능에 기대를 많이 합니다. 아마 김 선수는 누구보다도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을 겁니다. 그런데 성적이 잘 나오지 않다보니,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과 자신감 결여가 눈물로 이어진 것이죠. 꽤 많은 팬들이 이 장면에서 뭉클했을 걸로 보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사석에서 흘리는 눈물이라니요. 사실 그런 상황은 매우 보기 힘든 장면이죠.

야구 잘 모른다고 못보는 그런 다큐는 아니고요. 저도 룰은 잘 모릅니다만, 야구판 인간극장 같은 느낌으로 시청 중입니다. 총 6부작에, 한 편 길이가 대략 40분 안팎으로 그리 길지도 않습니다. 시청 구독자의 80%가 4점 이상의 평점을 줬다고 하는군요. “그냥 왜 계속 눈물이 나냐” “모든 스포츠가 인생의 축소판이라지만 야구는 특히 그렇다” “나머지 팀들도 돌아가면서 다큐해줬으면 좋겠다” 등의 감상평들이 달려 있습니다. 한화팬이 아닌 분들도, 이 다큐를 보고 한화에 관심이 생겼다고도 하고요.

한화이글스는 지난주, 5승 1패의 성적을 거뒀습니다. 한화 팬들에게는 축제와 같은 한 주였네요. 바이라인네트워크를 찾아주시는 고마운 독자님들에게도 축제와 같은 한 주가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함께 해주셔서 늘 고맙습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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