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점을 넘어가면 말로 끼를 부리기 시작해. 말로 사람 시선 모으는 데 재미 붙이기 시작하면 막차 탄 거야. 내가 하는 말 중에 쓸데 있는 말이 하나라도 있는 줄 알아? 없어, 하나도. 그러니까 넌 절대 그 지점을 안 넘었으면 좋겠다. 정도를 걸을 자신이 없어서 샛길로 빠졌다는 느낌이야. 너무 멀리 샛길로 빠져서 이제 돌아갈 엄두도 안 나. 나는 네가 말로 사람을 홀리겠다는 의지가 안 보여서 좋아. 그래서 네가 하는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귀해.”

시작하자마자 명대사로 입소문을 타고 있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손석구 씨가 나온대서 시작했는데, 방심할 때면 치고 나오는 대사들에 명치를 얻어맞고는 정신을 못차리다 4화까지 내달렸습니다. 총 16부작 중 4화까지 방영된 JTBC 드라마이고요, OTT에서는 넷플릭스와 티빙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 제목을 말 안했네요. <나의 아저씨>의 박해영 작가가 쓴 <나의 해방일지> 입니다.

저는 드라마를 볼 때 주로 재미를 선호합니다. 위로나 공감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키워드인데요. 그런데 이 키워드들은 한 번 잘못 치이면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드라마가 포착하는 어떤 순간이 내게 낯설지 않아서, 그래서 그 대사가 나를 향해 건네는 인사처럼 느껴질 때 그렇습니다. 제게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수없이 많은 말에 갇혀서 지쳤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아마도 저 대사가 꽂혔던 것 같습니다. 사람을 옭아매는 것은 어쩌면 말의 감옥이 아닐까요.

등장인물들이 특별히 나쁜 상황에 처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서울이라는 계란 노른자를 둘러싼, 그래서 서울로 출퇴근 하려면 하루 도합 세시간을 길에서 흘려보내야 하는 계란 흰자 경기도민들입니다. 이들은 하필 청춘이라 사랑도 하고 싶은데, 막차를 걱정하다보면 친구나 애인과 보낼 시간이 늘 부족하죠. 어차피 경기도니까 너네들 편한데서 약속을 잡으라고 하면, 경기도 남부와 북부에 대한 배려도 없이, 집에서 제일 먼 지역으로 약속이 정해지는 일에 짜증이 날 뿐입니다. 사는 곳이 산포시(극중 가상도시)라고 하면, 한번에 알아먹는 사람도 없습니다.

주변에는 내 마음을 채워주지 못하는 ‘개새끼’들 뿐이네요. 어떤 순간의 나는 초등학교 때 부모님께 차마 보여주지 못한 20점짜리 시험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뭐가 들키지 말아야 하는 20점짜리 시험인지 모르겠어요. 남자한테 돈 꾸어준 바보 같은 나인지, 여자한테 돈 꾸고 갚지 못한 그놈인지, 그놈이 전 여친한테 갔다는 사실인지. 도대체 뭐가 숨겨야 되는 20점짜리 시험인지 모르겠어요. 그냥 내가 20점짜리인 건지.”

출처=JTBC.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날마다 투쟁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멈춰 있는 듯 보이는 나를 사람들은 답답해 하고 자꾸만 사람들과 어울리라, 무엇이든 생산적인 여가를 가져라 부추깁니다. 쉴새없는 평가에 진절머리도 나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조언하는 그 말들에 마음을 다쳐본 적이 당신은 있나요?  “지쳤어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 그냥 지쳤어요.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에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고.” 아무라도 지금 이대로의 나를 알아봐주길, 아무라도 나를 채워주길 바라는 미정(김지원 분)은 결국 “여기에서 저기로” 뚫고 나가기 위한 돌파구를 찾으려 해방을 결심합니다.

이 해방이 어떻게 이뤄질지는 아직 시청자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적어도 사람들을 모두 피해 홀로 어디론가 떠나는 일은 아닐 거라는 것만은 짐작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독립이라는 말 대신 해방이라는 말을 쓴 것 같습니다. 사람이 가장 자유로운 상태란, 홀로 서나가는 게 아니라 구속되지 않은 상태라는 뜻을 담은 것 같기도 하고요.

배우들도 매력적입니다. 손석구 씨는 ‘멜로가 체질’이라는 드라마에서 보고는 인상에 깊게 남았는데, 이번에도 역시 눈길이 갑니다. 뭔가 로봇같은 실장님 이미지(그렇지만 중독성 있는)로 기억되던 이민기 씨도 한층 연기가 성숙해졌다는 생각이 들고요. 정말로 말수가 적고 속이 깊을 것처럼 느껴지는 김지원 씨나, 솔직하다 못해 “아 님아… 제발 그말만은 하지 마요”라는 생각이 들게하는 이엘 님의 캐릭터도 주변에서 봤을 만한 그런 인물들입니다.

그렇지만, 등장 인물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천호진 배우입니다. 천호진 배우가 짓는 어떤 표정이나 행동들이 어딘가 아버지를 생각나게 해서입니다. 말 수 적게 밥을 먹고, 다 먹으면 일어나서 그릇을 싱크대에 내려 놓고는 방으로 들어가 TV를 보는 아버지. 때때로 화난 듯 공허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 아버지. 그 표정 연기는 아마 천호진 배우가 제일 잘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요.


앞서 이 드라마를 <나의 아저씨>의 박해영 작가가 썼다고 이야기 했는데요. 저는 아직 ‘나의 아저씨’를 안 본 얼마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주변의 아재들이 하도 나의 아저씨가 재미있다고 하니까 왜인지 손이 안 갔는데, 나의 해방일지가 끝날 때 쯤에는 저도 나의 아저씨에 입문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드라마가 무조건 장점만 있다고 말하지는 않을게요. 시끄러운 사건이 별로 없어서 다소 심심할 수도 있을 거고, 또 어떤 대사들은 조금 오버스럽다거나 간지럽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인물들의 마음과 행동 변화가 궁금합니다. 말에 지치고 갇혔다는 생각이 드는 날에는 화면 속 미정과 기정, 창희와 구씨가 마치 동지처럼 느껴지거든요.  현실에는 없지만 나를 위로하는 이 동지들이 다음에는 또 어떤 말로 제 심장을 쿵, 하고 떨어트릴 것인지 기대하는 재미가 커져서 결국은 이 드라마를 완주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듭니다. 16화까지 잘 부탁해, 나의 해방일지.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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