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베개로 대박쳤던 블랭크가 사업모델 바꾸는 까닭은
한때 ‘마약베개’로 대박을 쳤던 블랭크가 사업전략을 바꾼다. 브랜드를 인수해 매출과 기업가치를 키우는 애그리게이터 사업 모델로 선회한다. 될 것 같은 잠재력 있는 브랜드만 인수해 규모를 키우기 때문에 성장 속도가 빨라 최근 투자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모델이다. 이는 자체 브랜드를 기획, 유통해 성과를 거둬왔던 블랭크의 과거 방식과는 다른 선택이다. 블랭크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직접 운영하던 브랜드들도 모두 독립 자회사의 형태로 분리해 운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블랭크 본사는 자회사와 인수 브랜드의 스케일업을 지원하는 콘트롤 타워로 자리매김한다.
블랭크는 왜 이런 결심을 했나?
2016년 등장한 블랭크는 이커머스 시장의 문법을 다시 쓰는 듯 보였다. 자체 개발한 브랜드를 콘텐츠 마케팅을 통해 팔아치우면서 창업 3년 만에 매출 1000억원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남성 뷰티 브랜드인 블랙몬스터를 비롯해서, 바디럽의 마약베개나 퓨어섬 샤워기 같은 것이 대표적 히트 상품이다. 창업 이듬해에는 소프트뱅크벤처스로부터 10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브랜드 확장과 마케팅에 필요한 자금을 적절한 시기에 공급받았고, 단기간 안에 유능한 기획자와 마케터를 확보하면서 콘텐츠 마케팅 성공 사례를 쌓아왔다.
그러나 예상보다 블랭크의 봄은 짧았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간 가파른 성장을 하던 블랭크는 2019년 들어 벽에 부딪힌다. 성장률이 둔화될 뿐더러, 시장에 경쟁자가 여럿 생겨났다. 앞서 블랭크의 성공에는 누구보다 빠르게 D2C 마케팅에 들어섰던 시기적 이점이 있었는데, 블랭크가 잘 되고 나서 블랭크의 문법을 차용한 기업들이 시장에 등장했다. 소비자도 콘텐츠 마케팅에 대한 피로가 생겨났고, 떨어지는 매출에 영업이익 적자전환이라는 사건에 부딪힌다. 13일, 블랭크 측이 발표한 지난해 실적은 매출 1211억원, 영업손실 116억원이다. 직전해와 비교해서 매출은 줄고 영업손실의 폭은 커졌다.
안팎에서 본 블랭크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번째, 핵심사업과는 크게 관련 없는 무리한 신사업 확장이다. 블랭크의 매출에 적신호가 켜지던 2019년은, 이 회사가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 MCN, 여행사업 등 기업이 애초에 집중해왔던 것과는 거리가 있는 새로운 사업에 집중 투자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신규사업은 기대와는 달리 실적을 내지 못했다. 2019년에서 2021년까지, 신규사업 분야에서 나온 적자 규모만 누적 190억원 수준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튜브 등에서 호화 캐스팅으로 크게 인기를 얻었던 ‘고등학생 간지대회(고간지)’다. 가수 김희철 씨가 사회를 봤고, 유명 스타일리스트 한혜연 씨가 출연하는 등 호화 캐스팅으로도 화제가 됐었다. 해당 포맷을 중국 텐센트에 수출하는 등 국내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게 돈이 되진 못했다. 블랭크K(여행), 블랭크C(엔터테인먼트), 썸머(개발) 등의 다른 영역 진출도 수익적 측면에서는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두번째. 신규 투자에 집중하다 보니 그사이 본진이 털렸다. 알아서 잘 굴러갈 것 같던 브랜드도 사실은 관리가 필요했다. 브랜드 관리를 위한 내부 시스템 구축에 투자를 선제적으로 하지 못했고, 그사이 서른개로 늘어난 자체 브랜드의 운영이 비효율적으로 굴러갔다.
블랭크가 큰 데는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물건을 팔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바탕이 됐었는데, 그 기대와 달리 재고와 비용 관리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여기에는 유사한 방식으로 시장에 진입한 경쟁자들의 등장도 영향을 끼쳤다. 기민하게 본업에 집중한 경쟁사들이 콘텐츠 마케팅에 효율성을 강조할 때 블랭크는 그러지 못했다. 블랭크가 미디어 커머스로서의 역량이 큰 것은 맞았지만, 초기에는 경쟁자가 없었다는 이점이 작용했었다는 것도 이때 확인할 수 있었다.
블랭크의 조직개편
블랭크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다. 남대광 대표를 중심으로 지난해 조직개편에 들어간 것도 냉정하게 내부 조직을 분석한 결과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기준, 블랭크가 자체 기획해 개발한 브랜드는 서른개가 넘었다. 브랜드별 성적은 들쭉날쭉했다. 블랭크와 유사하게 D2C 방식의 자사몰을 꾸려 움직이는 브랜드도 엄청나게 많아지면서, 이들과 경쟁하는 일도 점점 힘들어졌다. 남 대표는 경쟁력 있는 브랜드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없애기로 결정했다. 조직확장으로 인한 고정비를 줄이고, 축적된 장기 재고를 해결하는 것을 시급한 문제로 봤기 때문이다.
블랭크 측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펼쳐 둔 많은 사업과 브랜드를 평가해 중단, 또는 매각할 사업과 지속할 사업을 결정했다”며 “조직을 축소, 통폐합하기도 하는 등 장기적 성장과 재무 건전성을 위한 개편작업을 지난해 계속 지속해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결과 블랭크가 직접 운영하는 브랜드의 수는 서른개에서 열개로 확 줄어버렸다. 당장의 매출도 따라 줄겠지만 그걸 감수하더라도 수익성이 나쁜 브랜드는 과감하게 접어 버리는 게 낫다고 봤다. 운영을 중단한 브랜드의 장기 재고는 매각해버렸다. 재고를 끌어안고 있어 봤자 시간이 지날수록 감가상각이 될 수밖에 없고, 또 판매가도 낮아지므로 재무상 손실이 될 터였다. 이 회사 관계자는 “지난해 영업손실이 커진 데는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지출해야 하는 일회성 비용이 모두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블랭크 내부에서는 올해부터 실적에 고정비 감축 효과가 나타날 거라고 보고 있다.
이렇게 해서 살아남은 내부 브랜드는 두 가지 기준으로 정해졌다. 하나는 글로벌로 성과를 낼 수 있느냐이고, 다른 하나는 IP가 경쟁력이 있느냐 여부다. 근거가 된 ‘글로벌’에는 이유가 있다. 2019년 이후 블랭크의 국내 성과는 좋지 않았지만, 2018년에 현지팀을 꾸려 직접 진출한 대만, 홍콩, 싱가포르에서는 실적이 올라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나라들은 국내와 소셜미디어 환경이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한국에서 성과를 거뒀던 미디어 커머스 방식을 도입해 진출 2년 만에 연매출 345억원을 내는 등 가능성을 보여줬다. 현지에 열개의 오프라인 매장을 열고, 옴니채널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IP 커머스를 위한 전문가 그룹으로 알려진 영차컴퍼니를 인수하고, 디즈니와 IP 사용 라이선스를 맺었다.
국내 사업의 경우 살아남은 열개의 브랜드는 괜찮은 IP를 가지고 실적을 내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지난 2020년에 수돗물 유충 사태가 벌어지면서 위생용품이나 필터샤워기 등의 수요가 늘었는데 따라서 블랭크의 브랜드 중 하나인 퓨어썸의 필터 샤워기가 매진되기도 했다.
스라시오 모델로 피봇팅, 어떤 브랜드를 겨냥하나
장기적으로 내부 브랜드를 키우지 않고, 외부의 잘되고 있는 브랜드를 사와서 블랭크가 갖고 있는 운영 노하우를 심도록 전략을 바꿨다. 브랜드 애그리게이터로 사업의 방향을 정리한 것인데 일명 ‘스라시오(Thrasio) 모델’로도 불린다. 아마존의 셀러를 인수, 매출과 기업가치를 키워가며 성장한 스라시오라는 회사의 이름에서 따온 모델이다.
스라시오는 D2C 시장이 커지면서 함께 부각되고 있는 모델이다. 브랜드가 많아졌기 때문에, 이를 인수해 규모와 기업 가치를 키우려는 조직은 늘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실제로 어떤 브랜드가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채는 안목과, 또 사업을 인수해서 본사와 시너지를 내 성장시킬 수 있는지 여부다.
블랭크는 내부적으로 스라시오 모델을 도입하면서, 회사가 이 일을 잘 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다. 앞서 서른개 브랜드를 만들어 운영하면서 성공은 물론이고, 뼈 아프지만 실패의 경험도 쌓았다. 시행착오로 쌓아온 인사이트를 중심으로 본인들의 노하우를 녹일 수 있다고 판단하는 브랜드팀을 인수, 기업 가치를 높인다는 전략을 세웠다. 제품 품질이 우수하지만 마케팅 역량은 부족하거나 오프라인 채널 점유율은 높지만 온라인 성과가 저조한 브랜드 등이 우선 인수 대상이다.
남대광이라는 IP
블랭크 본사는 인수한 브랜드의 가치 제고를 지원하고, 실행을 돕는 전문 조직으로 사업을 이끌어나가기로 정했다. 매출 향상이나 비용 절감 관련 프로젝트 외에 글로벌 진출, 자금 조달과 매각 등 전반적 사업 과정을 포함하는 포괄적 사업 지원을 고려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창업자인 남대광 대표의 역할은 무엇이 될까. 애초 블랭크는 시작부터 남대광이라는 창업자의 존재감이 컸다. 기존의 유통시장에서 남대광은 하나의 새로운 아이콘이었다. 페이스북에서 크게 인기를 끈 ‘세상에서 가장 웃긴 동영상(세웃동)’을 만들어서 딩고에 매각하고, 이후 블랭크코퍼레이션을 창업했다.
사실상 미디어 커머스의 문을 열어젖힌 인물로 평가 받았는데, 세웃동의 콘텐츠 제작 경험과 20대 초반부터 의류 쇼핑몰, 교육 콘텐츠 등 사업을 시도해왔던 경험을 회사 경영에 녹여냈다. 블랭크가 젊은 기업답게 복지와 자유로운 기업 문화를 앞세운 것도 남 대표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대표적으로 남 대표가 사비로 무이자 대출이나 매월 200만원 적금 지급 같은 현금성 복지를 만들어 낸 것은 유례가 별로 없던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의 실적 악화로 남대광 대표 역시 사업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게 됐다. 지난해 남 대표는 블랭크 사업 피봇팅에 초점을 두고 움직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이 가진 장점과 블랭크의 경쟁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모델로 나아가겠다는 전략이다.
이와 관련해 블랭크 관계자는 “남 대표는 브랜드와 상품 기획, 콘텐츠 마케팅 전문가로서 인수 대상 브랜드에 대한 사업성 판단에 기여하고 해당 브랜드 사업의 창업자와 협의하며 스케일업 과정에 참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