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법안 마련하는 세계 각국, 우리나라는?

세계 여러 국가에서 반도체 관련 법을 제정했다는 뉴스가 계속해 등장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관련 법을 제정하고, 국가 차원에서 반도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죠.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도 반도체 산업 강화 방안에 대해 수 차례 언급했고요.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라면, 각 국가의 반도체 관련법에는 해당 국가의 특색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라 추후 외교 관계나 협업 체제 구축 여부도 달라질 것으로 보입니다. 세계 각국은 어떤 형태로 협업 체제를 구축하게 될까요? 그리고 우리나라는 여러 국가 가운데 어떤 포지션을 취하게 될까요?

생산라인 대거 증설 나서는 미국·유럽

미국과 유럽은 반도체 설계 부문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산 역량 측면에서는 아시아권에 비해 뒤처진다는 지적을 받고 있었죠. TSMC, 삼성전자 등 높은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파운드리 기업이 아시아권에 몰려 있는 데다가, 이들만이 7나노 이하 공정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이 같은 구조가 문제로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디바이스 구매자가 증가하고, 더불어 반도체 수요가 증가하면서 반도체 수급난이 시작됐죠. 반도체 공급망이 불안정해지자 세계 각국은 반도체 생산라인을 자국 내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미국과 유럽은 자체 반도체 공급망 강화에 나섰습니다.

우선 미국은 자국 내 반도체 생산라인을 증설하기 위해 반도체 지원 법안(CHIPS for America Act) 도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해당 법안은 반도체 생산 역량 증대를 위해 520억달러(약 62조원)를 투입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합니다. 법안이 통과되면 미국 정부는 반도체 제조 설비에 대한 투자 세액공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공장이나 연구시설을 건설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1건 당 최대 30억달러(약 3조6800억원)의 보조금을 지원합니다. TSMC, 삼성전자 등 주요 반도체 기업이 미국 내 생산라인을 증설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죠.

유럽도 비슷한 법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난 2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430억유로(약 59조원)의 자금을 투입해 반도체 생산량을 높이는 ‘유럽 반도체법(European CHIPS Act)’을 제안했습니다. 이를 통해 EU는 2030년까지 EU 내에서 전 세계의 20%에 해당하는 반도체를 생산할 계획입니다. 해당 법안은 유럽 의회와 회원국의 논의를 거친 후 도입 여부가 결정될 예정입니다.

미국과 유럽 반도체 법안의 중심에는 한 기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인텔입니다. 인텔은 2021년 3월 반도체 생산 역량을 강화하겠다는 IDM 2.0 전략을 발표했죠. 팻 겔싱어(Pat Gelsinger) 인텔 CEO는 아시아에 집중돼 있는 반도체 생산역량을 미국과 유럽 등지에도 분산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해당 전략을 발표했는데요, 이는 미국과 유럽 정부의 기조와 일맥상통합니다.

현재 미국과 유럽에 반도체 관련 투자를 가장 적극적으로 단행하고 있는 기업은 인텔입니다. 인텔은 200억달러(약 23조원)을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 소재 오코틸로 캠퍼스 내에 생산라인 2곳을 증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유럽에도 800억유로(약 107조원)를 투입해 EU를 일종의 반도체 허브로 만들 것이라는 계획도 공개했죠. 인텔은 독일에는 반도체 공장을, 이탈리아에는 패키징 시설을, 프랑스에는 R&D 연구센터를, 스페인에는 슈퍼컴퓨팅 센터를 건립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인텔이 미국과 유럽 투자를 활발히 할 때, 우리나라 기업, 특히 삼성전자는 신중한 태도를 보여 왔습니다. 이에 따라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입지가 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한 반도체 시장 전문가는 “그간 한국은 정치적, 외교적 이유로 미국에 투자를 활발하게 하지 못했지만, 인텔은 가장 공격적으로 투자한 기업 중 하나이기에 각국 정부로부터 많은 이익을 얻어갈 것”이라며 “반면 우리나라 기업은 투자 측면에서 미국과 유럽 내에 비교적 입지를 다지지 못했고, 따라서 정부 지원을 비교적 적게 받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가능성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전문가는 “윤석열 당선인의 기조를 보았을 때, 미국과 유럽과 연합하고 해당 국가에 투자를 좀 더 활발히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며 “또한 인텔이 아직 생산 역량을 완전히 갖추지 않은 데다가 실제 성과를 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우리나라 기업에게도 가능성이 있다”고도 설명했습니다. 아직 국내 기업이 미국, 유럽의 지원의 이점을 가져갈 기회는 열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서로 필요 채우는 일본·대만

일본과 대만도 반도체 관련 법을 제정하고, 전략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지난 4월 7일 경제안보강화 법안이 중의원(하원)을 통과했습니다. 이 법안은 2021년 6월 4일 일본 정부가 제시한 ‘성장전략 2021’의 일환으로 나왔습니다. 미국과 유럽, 중국 등 주요 국가가 반도체를 포함한 첨단 기술 부문에서 경제 안보를 강화하고 있는데, 일본 측도 이와 대등한 법안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경제안보강화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법안은 첨단 반도체 양산체제를 구축하고 제조 기반을 재생하는 등 반도체 생산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 안보 관점에서 국제전략을 수립하고, 첨단 반도체 설계·개발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도 담겨 있고요.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그간 강점을 가지고 있던 반도체 장비·소재 부문 경쟁력은 유지하고, 다소 약세를 보인 반도체 생산 부문은 해외 기업 유치를 통해 역량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합니다.

일본에는 파운드리 기업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요 파운드리 기업을 살펴보면 모두 대만, 한국, 미국, 중국 등지에 위치해 있죠. 반도체 수급난이 심각해지면서 일본 또한 반도체 생산라인을 자국 내 유치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데요, 그 일환으로 TSMC를 비롯한 해외 파운드리 기업과 손을 잡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대만도 마찬가지로 반도체 관련 법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미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반도체 제조 부문은 기반을 더욱 강화하고, 해외 수입에 의존해 오던 반도체 장비·소재 부문 자립화와 고급 인재 확보 등이 주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주요 장비업체는 대부분 ASML,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 램리서치 등 유럽과 미국에 위치한 기업에서 생산하고 있는데요, 이를 자립화해야 진정한 반도체 강국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대만 정부의 생각입니다.

일본에게는 파운드리가, 대만에게는 장비 제조 역량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일본은 장비·소재 부문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고, 대만은 파운드리 시장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는 TSMC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죠. 두 국가는 협업 시 각자에게 필요한 부분을 서로 보완하고, 긍정적인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일본은 TSMC 유치를 통해 생산 역량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TSMC는 파운드리 1위를 달리고 있는 기업이거든요. 물론 소니와 설립하는 생산라인은 22나노 이상의 레거시 반도체 생산라인인데요, 이를 기점으로 지속해서 협업을 해 나갈 것으로 보입니다.

대만은 일본과 협업을 통해 반도체 장비 제조 역량을 키울 수 있을 전망입니다. 일본은 반도체 장비에 탑재되는 부품을 생산하고 있는데요, 대표적으로7나노 미만 공정에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에 탑재되는 부품은 일본의 도쿄일렉(TEL)이나 도쿄오카공업(TOK) 등에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장비 생산과 공급에도 유리하겠죠.

또 하나, 대만은 일본에 진출해 그간 반도체 산업에서 직면하고 있던 부지 확보와 자원 확보 등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대만은 반도체 생산라인 건설을 위한 부지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요, 여기에 지난 해 이상기후로 가뭄과 정전 등의 문제를 겪었죠.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부지 확보와 자원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대만 반도체 업체는 해외에 생산라인을 증설하는 것을 대안으로 삼았다”며 “TSMC가 일본에 반도체 생산라인을 증설하는 것도 그 일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두 국가가 손을 잡는 것은 추후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다른 국가가 대만이나 일본을 규제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말이죠.

중국 반도체 굴기, 7나노 이하 안해도 된다?

중국 정부는 2014년 ‘반도체산업 발전추진요강’을 발표하면서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육성할 것을 예고했죠. 최첨단 반도체 제조사를 만들어 반도체 내수시장을 활성화하는, 이른바 ‘반도체 굴기’를 이루겠다고 선언한 겁니다. 220억달러(약 27조원) 규모의 반도체 기금을 형성하고 관련 기업에 소득세 면제, 지원금 제공 등의 혜택을 제공할 계획이었죠.

하지만 이후 미국의 대중국 제재 등 글로벌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처음 계획했던 반도체 굴기를 이루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국은 미국의 제재로 EUV 노광장비를 들여올 수 없습니다. 7나노 미만의 반도체는 중국에서 생산할 수 없다는 의미와 동일하죠. 상황에 맞춰 중국은 7나노 이상의 레거시 반도체를 중심으로 칩 생산을 했습니다.

2021년 3월에는 중국 정부가 ‘14차 5개년 규획 및 2035년 비전 목표’를 발표했습니다. 해당 발표에는 주요 장비와 핵심 소재 연구개발을 강화하고, 첨단 메모리 기술 개발과 함께 탄화규소(SiC), 질화갈륨(GaN)과 같은 3세대 반도체를 개발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첨단 공정으로 승부를 볼 수 없으니, 다른 부문에서 경쟁력을 찾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죠.

중국이 SiC, GaN 기반의 반도체 개발에 나선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SiC, GaN으로 만든 반도체는 현재 업계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는 실리콘 기반 반도체에 비해 전력 효율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웨어러블 등 소형화된 기기가 등장하고, IoT나 클라우드 등 첨단 산업이 발전하면서 전력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데, SiC나 GaN 반도체를 사용하면 전력 소모를 줄일 수 있어 차세대 전력반도체로 불리고 있는 것이죠. 중국이 3세대 반도체 개발 분야에서 치고 올라간다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중국 경제전문가들은 우리나라와 교역을 원활하게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윤석열 당선인은 반도체 산업과 관련해 중국을 견제하는 듯한 발언을 한 바 있죠. 따라서 한국과 중국은 적극적으로 협업 체제를 구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중국도 완전히 놓을 수는 없는 시장으로, 레거시 반도체나 전력 반도체 측면에서는 협력해 나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국, 미국과는 동맹, 중국과는 거리 두나

윤석열 당선인도 반도체 산업 관련해서 다수 언급을 한 바 있습니다. 윤 당선인은 국내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50조원 이상의 반도체 기금(코마테크펀드)을 조성해 국내 팹리스와 파운드리 기업을 지원하고, 용인·이천·평택을 비롯한 지역에 반도체 관련 거점 도시로 키우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기술자 10만명을 양성하고자 지방 대학에 반도체 학과를 설립하고, 전력, 공업용수 기반 등 반도체 공장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원도 지원하겠다고도 했고요.

또한, 당선인은 청와대에서 소재·부품·장비 공급망을 직접 관리하고, 청와대 안보실이 반도체를 비롯한 경제 안보까지 책임지게 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는데요, 여기에서 추후 반도체 외교 방향성을 알 수 있습니다.

윤 당선인이 경계하는 국가는 중국입니다. 해당 공약과 관련해 “지금은 국제 경쟁이 너무 치열하고, 중국이 우리 반도체를 따라오려고 연구자를 우리나라의 수십 배 확보하고 있다”고도 발언한 바 있습니다. 당선인은 반도체 특별법을 제정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됐던 ‘중국 사모펀드의 매그나칩반도체 인수 시도 사건’을 기반으로 이 같은 발언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을 대하는 태도와 달리, 윤석열 당선인은 미국과 유럽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반도체·배터리·6G 등 첨단 기술 부문에서 한미 기술동맹을 맺을 것이라고 말했고, 지난 3월 30일에는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와의 통화에서 “반도체 산업에서 양국 간 협력을 더욱 확대해 나가자”고 제안했습니다. 네덜란드에는 EUV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ASML이 있죠. 결국 우리나라는 미국과 유럽 중심으로 반도체 산업을 이끌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 반도체 외교는 추후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될 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배유미 기자> youme@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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