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생산라인의 위치가 미래를 좌우한다”

인텔을 이끄는 최고경영자(CEO) 팻 겔싱어가 미국과 유럽에 생산라인 증설을 재차 강조했다. 23일(현지시각) CNBC와의 인터뷰에서 나온 발언인데, “석유 매장량이 지난 50년 간의 경쟁력을 좌우해온 것”과도 비교했다. 반도체가 지난 시대의 석유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팻 겔싱어 인텔 CEO

반도체 수급난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고질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문제 중 하나다. 재택근무, 원격교육 등 비대면 활동이 증가하면서 스마트폰, PC 등 디바이스와 이를 관리하는 서버 수요도 상승했다. 가전과 자동차를 구매하는 소비자도 늘어났다. 각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반도체가 필요해 그 수요도 덩달아 증가했다.

여기에 지진, 한파 등 자연재해와 화재 등 여러 사건으로 주요 기업이 공장 가동을 중단한 적도 있었다. 차량용 반도체 시장의 경우에는 애초에 기업 차원에서 수요 예측을 실패했다. 이 모든 요소가 중첩돼 지금도 반도체 수급난은 이어지고 있으며, 각 반도체 기업은 공급망 안정화에 주력해야 하는 실정이다.

팻 겔싱어 CEO에 따르면, 반도체 생산라인은 대부분 대만과 한국 등 아시아 지역에 밀집해 있다. 세계 파운드리 중 유일하게 7나노 미만 공정을 할 수 있는 TSMC와 삼성전자만 해도 아시아에 위치해 있다. 미국과 유럽 입장에서는 선단 공정을 적용한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아시아권을 거쳐야만 한다.

인텔은 지난 3월 아시아에 집중된 반도체 생산 역량을 미국과 유럽 등지에도 분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IDM 2.0 전략을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 일환으로 인텔은 미국과 유럽 등지에 반도체 생산라인을 증설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인텔은 미국 애리조나에 200억달러(약 22조6000원) 규모의 반도체 생산라인을 건설하고 있다. 해당 생산라인은 2024년부터 가동될 예정이다. 또한, 지난 3월 15일(현지시각)에는 인텔이 유럽 각지에 800억유로(약 109조원)를 투자해 반도체 생산라인과 후공정 처리시설 등을 만들 것이라고도 발표했다.

팻 겔싱어 CEO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국가가 인도주의적 결과를 내렸는데, 경제적 관점에서는 지정학적 불안정성이 커졌다”며 “따라서 아시아와 서구권 간 공급망 균형을 잡는 것은 긴급하고 중요한 일이고, 반도체 수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텔의 IDM 2.0은 미국 정부가 자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을 형성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백악관은 수차례에 걸쳐 주요 반도체 기업과 함께 반도체 공급망에 대한 논의를 진행한 바 있는데, 회의 때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미국 중심 반도체 산업’을 강조했다.


한 반도체 시장 전문가에 따르면, 현재 시점에서 미국은 다른 나라들과 반도체 협업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장기적으로는 자국 중심으로 산업을 이끌 것으로 보인다. 복수의 미국 내 전문가는 756페이지 분량의 보고서 ‘인공지능에 관한 미국 국가안보위원회(National Security Commission on Artificial Intelligence, 이하 NSCAI)‘를 미국 의회에 제출한 바 있다.

해당 보고서에는 “미국은 대만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미국 기업과 군사력을 뒷받침할 전자부품·설계 등 부문(microelectronics)에서 지배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756페이지 분량의 NSCAI 보고서 표지

보고서에서는 중국이 대만을 흡수하는 경우도 고려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반도체 시장 전문가는 해당 보고서 내용과 관련해 “대만과 TSMC는 중국과 선을 긋기 위해 반도체 부문에서 미국과 협업 관계를 적극적으로 맺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고 있으나, 장기적 관점에서 미국은 대만을 견제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해당 전문가는 인텔이 미국 정부 친화적인 기업 중 하나라는 점도 강조했다. 당장은 파운드리 시장 1, 2위를 TSMC와 삼성전자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 팹리스 기업은 두 파운드리를 거쳐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텔이 본격적으로 파운드리 경쟁력을 업계에 보여주기 시작한다면, 미국 정부가 팹리스 기업을 대상으로 인텔 파운드리를 이용하게 만들 가능성도 있다.

다만 팹리스 기업이 하나의 파운드리만 이용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주요 팹리스 기업 관계자에 따르면, 팹리스 업계에는 갑작스럽게 발생한 리스크에 대응하고 반도체 공급망을 안정화하기 위해 TSMC와 삼성전자를 모두 사용하는 ‘듀얼라인(Dual-Line)’ 전략을 취하고 있다. 수율, 가격 등의 문제를 고려해 비중은 달리할 수 있으나,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도록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 앞서 언급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배유미 기자>youme@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