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 소식을 기업 전략과 경쟁 구도, 시장 배경과 엮어서 설명합니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 소식이 매일같이 쏟아지지만 익숙하지 않다 보니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각 기업의 전략과 성장 배경을 알면 왜 그 제품을 출시했는지, 회사의 전략과 특성은 어떤지 엿볼 수 있습니다. 더 넓게는 시장 상황과 전망을 살펴볼 수도 있죠. 하나씩 함께 파고 들어가보면 언젠가 어려웠던 기술 회사 이야기가 친근하게 다가올 거예요.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 ASML이 중국의 경쟁 회사에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중국 내 반도체 장비업체가 자사 지식재산권을 침해한 제품을 판매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였죠. ASML은 미국과 중국, 두 국가에 고객사를 확보해 놓고 있는데요. 중국 반도체 기업과 미묘한 갈등이 이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ASML은 최근 2021 연간 실적 보고서를 통해 “중국 반도체 장비업체 둥팡징위안이 자국 내에서 ASML의 지식재산권을 침해했을 가능성이 있는 제품을 적극적으로 마케팅했다”며 “중국 당국에 해당 사안에 대한 우려 사항을 전달했으며, 필요 시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ASML이 어떤 부문에서 둥팡징위안이 지식재산권을 침범했다고 보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둥팡징위안은 ASML의 지적재산권 침해 의혹에 대해 “사실 무근”이라고 대응했습니다. 다만 ASML은 둥팡징위안이 자사 지식재산권을 침해한 것이 과거 XTAL 사건과 연관됐다고 보고 있으며, 추후 확실한 증거가 있으면 고소를 진행하겠다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XTAL 사건이 무엇인지는 조금 있다가 다루겠습니다.

양사의 분쟁 핵심은 EUV 노광장비 관련 기술 때문으로 보입니다. 중국 정부는 반도체 굴기를 이루기 위해 EUV 노광장비 확보를 원하지만, ASML은 이 장비를 중국에 제공하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중국 기업은 반도체 자립을 위해 나노 공정을 위한 장비 자체 개발을 시도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양사의 분쟁이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에는 두 기업은 왜 EUV 노광장비를 두고 싸우는지, EUV 노광장비를 확보하지 못한 중국 반도체 산업은 어떻게 흘러갈 지 살펴보려 합니다.

ASML과 둥팡징위안, 어떤 기업인데?

우선 ASML과 둥팡징위안, 그리고 함께 거론되고 있는 XTAL이 어떤 기업인지부터 알아봅시다. ASML은 네덜란드에 위치한 반도체 장비 업체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EUV 노광장비는 7나노 미만의 선단(Advanced) 공정을 위해서는 필수로 도입해야 하는데요, 이 말은 곧 ASML 없이 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TSMC, 삼성전자, 인텔 등 주요 반도체 기업은 ASML의 EUV 노광장비를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더 높은 성능의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공정이 미세해질수록 반도체 성능은 높아지고, 전력은 낮아집니다. CPU를 비롯한 첨단 반도체는 7나노 미만 공정으로 만들어지는데, 이 장비가 없으면 반도체 경쟁력이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반도체 기업은 EUV 노광장비 확보하기에 혈안이 됐고, ASML은 ‘슈퍼 을(乙)’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됐죠.

이번에 도마 위에 오른 둥팡징위안은 베이징에 본사를 두고 있는 중국 첨단 반도체 장비 생산업체입니다. 회사 정식 명칭은 둥팡징위안웨이뎬쯔커지(东方晶源微电子科技, DongFang JingYuan Electron)이고요. 둥팡징위안은 반도체 기업을 대상으로 칩 설계, 제조, 테스트를 위한 장비와 이를 뒷받침할 소프트웨어 솔루션을 제공합니다.

이 둥팡징위안은 과거 ASML이 법적 분쟁을 진행했던 중국 반도체 장비업체 XTAL의 모회사입니다. XTAL은 ASML에서 근무했던 중국 직원이 퇴사해 2014년 설립한 기업입니다. 일각에서는 EUV 장비를 중국에 납품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ASML은 2018년 XTAL이 자사 기밀 중 하나인 마스크 최적화(Mask Optimization) 소프트웨어 기술을 탈취하려 했다는 혐의로 미국 법원에 소송을 진행했습니다.

미국 법원은 “ASML은 기술 유지를 위해 노력했고, XTAL은 악의적으로 기술을 유출하려 했다”며 ASML의 손을 들어 줬습니다. 법원은 XTAL로 하여금 ASML 측에 8억4500만달러(약 1조123억원)를 배상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XTAL이 이미 파산 절차를 거치고 있었기 때문에, ASML은 배상금 대신 XTAL의 지적재산권 대부분을 소유하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이번에 논란이 된 둥팡징위안도 XTAL이 목표했던 EUV 노광장비 생산을 목표로 기술 탈취를 단행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특히 둥팡징위안은 반도체 자립을 꿈꾸는, 일명 ‘반도체 굴기’의 핵심 기업입니다. 현재 중국은 미국의 제재로 EUV 노광장비를 들일 수 없는데요, 따라서 둥팡징위안이 직접 EUV 장비 기술을 확보하고 나선 것으로 보는 거죠. 이 과정에서 ASML의 지식재산권을 침해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ASML EUV 노광장비를 따라할 수 없는 이유

ASML의 최신 EUV 노광장비 NXE3600D (출처: ASML)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ASML은 둥팡징위안이 자사 지식재산권을 침해했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부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추후 확실한 증거가 있으면 고소하겠다고 했죠. 확실한 증거 없이도 ASML이 둥팡징위안의 지적재산권 침해를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는 ASML이 EUV 노광장비와 관련된 기술 특허를 거의 대부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ASML은 EUV 노광장비를 최초로 개발한 기업입니다. 이 장비 하나를 개발하기 위해 무려 20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고, R&D는 10년을 진행했죠. R&D에 집중하던 10년 동안 ASML은 EUV 노광장비 부문에서 실적을 내지 못했습니다. 또한, ASML이 장비를 처음 개발할 때에는 어느 누구도 EUV 노광장비가 반도체 산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판도를 뒤집을 수 있었던 이유는, ASML이 EUV 노광장비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기술을 수차례에 걸쳐 특허 등록했기 때문입니다. 반도체 기업이 7나노 이하 미세 공정을 도입하고 나노 경쟁을 시작하면서, EUV 노광장비에 대한 관심도가 급격하게 높아졌습니다. 더불어 EUV 노광장비 수요도 늘어났죠.

타 반도체 장비업체도 해당 장비를 생산할 수 있으면 참 좋았겠지만, 이미 ASML은 관련 기술 특허 대부분을 등록해 놓았습니다. 한 주요 반도체 장비업체 관계자는 “ASML 외 반도체 장비업체도 미세 공정이 가능한 장비 개발을 시도하고 있으나, 이는 EUV 노광장비와는 아예 다른 종류”라며 “EUV 노광장비를 개발하기에는 이미 ASML이 특허를 다수 등록해 놔서, 지식재산권을 침해할 수밖에 없다”고 한계를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ASML 외 다른 기업이 EUV 노광장비를 개발한다면 ASML의 기술 특허를 침해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둥팡징위안이 EUV 노광장비 개발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곧 둥팡징위안이 ASML의 기술 특허를 침해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의미하죠. 게다가 과거 자회사가 기술을 탈취한 혐의로 법정 공방을 거친 전적이 있으니, ASML 입장에서는 더욱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EUV 노광장비가 아닌 다른 종류의 반도체를 개발했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ASML 관계자는 “ASML이 EUV 노광장비 하나를 개발하는 데 걸린 시간을 생각하면, 타사도 미세 공정을 위한 장비를 개발하는 데 적어도 10년 이상은 걸릴 것으로 보인다”며 “당분간 미세 공정을 의한 반도체 장비 시장에서는 ASML이 독주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둥팡징위안을 비롯한 타 기업이 ASML EUV 노광장비를 대체할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분석입니다.

중국 반도체 굴기에 대한 전망

ASML은 현재 중국에 EUV 노광장비를 납품하고 있지 않습니다. 미국 정부의 규제 때문입니다. 월스트리트저널 등 외신에 따르면, 네덜란드 정부는 미국의 압력으로 대중국 ASML EUV 노광장비 수출 허가를 보류하고 있습니다.

ASML은 EUV 노광장비를 생산할 때 주로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부품을 수급받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EUV 노광장비 대중국 수출과 관련해 ASML은 “법과 규제를 거스르면서까지 사업을 영위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EUV 노광장비를 제외한 타 장비에 대해서는 미국 정부가 중국을 크게 제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ASML에 따르면, 전체 제품 판매량의 30%가 중국 고객사입니다. ASML은 중국에 좀 더 크기가 큰 레거시 반도체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DUV(심자외선) 노광장비 중심으로 납품하고 있습니다. 이 장비로 현재 중국 기업은 7나노 이상의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고요.


ASML의 DUV 클린룸 (출처: ASML)

중국 반도체 산업은 단기적으로 성장할 전망입니다. 세계적으로 레거시 반도체 수급난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당 부문 반도체 수급난은 2023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앞으로 1~2년 동안은 중국 반도체 산업이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됩니다.

하지만 AI 반도체, 서버용 반도체 등 고성능 칩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선단 공정 기술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선단 공정을 미국 제재로 도입할 수 없는 상황이죠. 게다가 IT 기술이 발전하면서 고성능 칩 수요도 증가하고 있는데요, 중국 기업이 선단 공정을 도입하지 못한다면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산업은 기술력을 확보해야 발전하지, 무조건 돈을 투자한다고 결과가 나오는 산업이 아니다”라며 “중국은 당장 미세 공정 경쟁력에서부터 다른 국가에게 밀리고 있기 때문에, 단시간 안에 반도체 굴기를 성공적으로 이루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배유미 기자> youme@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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