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가 작다고 했나

“한국은 좁다” “한국 스타트업의 생태계 규모는 작다”

습관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다. 그러나 20일 여수엑스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스타트업 생태계 컨퍼런스’에서 임정욱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센터장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의 규모는 그렇게 작지 않다. 예컨대 지난 2014년에 벤처캐피털(VC)로부터 흘러나온 투자액이 1조6000억원 규모였던데 비해 2018년의 투자금은 3조4000억원으로 4년 만에 두 배가 넘게 뛰었다. 올해 4월까지 투자액은 1조1382억원인데, 지난해 같은 분기랑 비교해서도 14.3%가 늘었다. 연말까지 투자는 4조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돈만 많이 뿌려지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그 돈을 받아 성장하는 회사가 늘었다. 지난해 중반까지만 해도 유니콘은 쿠팡과 옐로모바일 단 두 군데였다면, 올해는 야놀자와 우아한형제들을 비롯해 여덟 곳이 유니콘에 이름을 올렸고, 넥스트 유니콘으로 쏘카와 하이퍼커넥트, 직방, ST유니타스 등 아홉 곳이 꼽힌다.

투자를 받거나, 혹은 돈을 벌기 시작한 규모 있는 스타트업들은 대중을 상대로 TV 광고를 집행해 브랜드 인지도를 더 쌓기도 했고, 또 스타트업이 다른 스타트업을 인수하면서 사업 영역을 확장하기도 했다. 예컨대 마켓컬리는 배우 전지현을 쓴 TV 광고를 집행했고, 직방은 호갱노노와 셰어하우스 ‘우주’를 인수했다.

 

강연자의 개별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왼쪽은 사회를 맡은 박원익 조선비즈 ICT 팀장이고, 그 옆에서부터 박준성 레전드 캐피탈 전무,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 강석흔 본엔젤스 대표가 앉아 질문에 답했다. 스타트업에 필요한 것은 돈이고, 피하고 싶은 것은 규제일 것이다. 창업자의 의지나 실력만으로는 회사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데, 자본이나 규제 같은 외적인 요소가 스타트업의 성패에 큰 영향을 미쳐서다. 그래서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매년 여는 ‘스타트업 생태계 컨퍼런스’는 창업자보다는 창업 생태계를 이루는 여러 구성원들, 즉 투자자와 협단체, 정부 관계자 등을 대상으로 강연한다. 지금 이 시점에,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는 어느 정도 수준에 와 있고, 또 생태계 활성화를 위해서 어떠한 것이 잘 되고 어떠한 것이 걸림돌이 되는지 돌아보고 점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스타트업 생태계가 어느 정도 숨을 돌릴 정도로 커지니까, 다른 나라를 돌아볼 여유도 생겼다. 지금까지 한국 스타트업들이나 VC들은 주로 실리콘밸리 등을 벤치마킹했고, 그만큼 잘하지 못한다며 혼이 나왔는데 이제는 어느정도 역량이 쌓여 되려 해외 시장 진출이나 투자까지 눈을 돌리고 있다.

해외 시장과 관련해서는 강석흔 본엔젤스 대표가 발표했는데,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남아 주요 3국의 스타트업 생태계 현황과 투자 시사점을 다뤘다.

우선 베트남.

강 대표에 따르면, 아시아에서 인도가 IT 인재들이 모여 있는 아웃소싱의 허브였다면, 동남아시아에서는 베트남이 그 역할을 한다. 하노이 공대, 호치민 공대, FPT 유니버시티 등 테크 기반의 대학이 많은데, 매년 4만3000명 이상이 졸업한다. 베트남계 미국인이나 해외 유학파 출신의 창업자가 많고, 성공한 창업 경험을 갖고 더 큰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하기 위한 연쇄 창업자들도 나타나고 있다.

베트남은 특히 커머스와 핀테크, 물류, 여행(관광) 등 리테일기반 사업이나 O2O 서비스들이 계속해 큰 투자를 받고 있는데, 오는 2022년부터는 본격적으로 1조원(10억 달러)이 넘는 투자금을 받고 성장한 IT 기업들이 인수합병(M&A)에 활발히 나설 것으로 강 대표는 예상했다.

이 때문에 강 대표는 국내 스타트업이나 투자자들에게 “(현지) 스타트업 생태계는 활성화 첫 단계에 이제 막 진입했고, 스테이지 별 기회가 여전히 모두 존재하므로 본격 투자가 늦지 않았다”며 “베트남은 21세기 기회의 ‘신라방’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에는 베트남과 조금 다르다. 인도네시아는 인구 면에서 대국인 데다, 이미 투자가 규모 면에서 라스트 스테이지에 몰리고 있다는 점을 먼저 거론했다. 즉, 2017년부터 인도네시아 투자자들은 후기 단계 스타트업에 투자를 집중해왔고, 대부분의 투자가 유니콘 4개사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짚은 것이다.

강 대표는 “인도네시아는 초기 투자자가 시리즈B 이상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며 “대국에서의 기회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태국은 전국적으로 750여 개의 스타트업이 활동 중이지만 대학생 창업이나 얼리 스테이지 등을 모두 고려한다면, 그 수가 2000개로 훌쩍 뛴다. 국내 스타트업의 수를 2만 개 정도로 추산하는데, 그 수를 비교하면 태국의 현재 상태를 가늠할 수 있다고 강 대표는 설명했다.

다시 말해, 태국의 경우 스타트업 생태계 형성 초기이고 개척자로서 기회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태국의 경우 시리즈A 스타트업 투자가 늘어나고 있지만, 시리즈B의 경우 자국 투자를 받기 어려워 해외 투자 유치를 원하고, 이를 위해 본사를 아예 해외에 설립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강 대표는 “조금만 활동해도 바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아시아에서 진짜 큰 시장은 중국이다. 중국 시장과 관련해서는 현지에서 손 꼽히는 규모의 벤처캐피털인 레전드 캐피탈의 박준성 전무가 발표했다. 레전드 캐피탈 자체 집계에 따르면, 기업가치를 1조원 넘게 평가받는 중국의 유니콘 스타트업이, 올 1분기 기준 무려 222개에 달한다.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아니, 중국에서는 어떻게 이렇게 많은 유니콘 기업이 나올 수 있을까?

우선, 전통 산업의 인프라 낙후다. 금융 면에서도 신용카드 보급량이 적고 신용 소비 비중이 낮으니 모바일을 중심으로 한 핀테크가 발달할 수 있었다. 또, 다양한 소비자층이 공존하는 시장이 있다. 알리바바나 JD 같은 압도적 크기의 전자상거래 외에도, 3선 도시 이상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저가 단체 구매 모델을 제시한 핀두오두오도 빠르게 시장을 침투했다.

정부가 주도적으로 산업 정책을 수립했고, 민간기업의 참여를 유도했다. 대표적 분야가 인공지능인데, 2017년 국무원이 ‘차세대 인공지능 발전 계획에 대한 개요’를 발표하고, 이어 2018년에는 산업정보부가 ‘AI-실물경제 융합 창신 프로젝트’를 지정하는 등 정부에서 나서서 산업 육성을 장려했다. 아울러, 바이두의 CEO인 리엔홍이 직접 정책 기획에 참여하면서 AI 산업의 성장 환경을 조성키도 했다.

알리바바와 텐센트 같은 인터넷 대기업들이 다른 스타트업에 큰 투자를 하면서, 유니콘을 만들어내는데 기여를 했고, 이뿐 아니라 중국 기업들은 상해와 심천, 홍콩 거래소 외에도 미국의 뉴욕증시나 나스닥 등에 상장하면서 세계 자본을 적절히 이용했다. 즉, 투자자들이 더 쉽게 돈을 회수할 수 있게 함으로써 투자 심리가 위축되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2017년부터 2019년 5월까지 상해와 심천, 홍콩 증시에 상장한 유니콘 기업 20곳 중 시가총액이 상장 전보다 늘어난 기업이 10개가 되면서 투자 심리를 더욱 부추기기도 했다.

해외와 비교하면서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해 아쉬운 부분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물론 있었다. 이 역할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벤처 투자를 해 온 용윤중 한국벤처투자 본부장이 맡았다. 강연을 들은 청중들 상당수가 용 본부장의 발표가 재미있었다는 피드백을 했는데, 솔직한 지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용 본부장은 “국내 VC가 200개 정도 활동하고 있고, 해외 VC가 20개 정도인데 유니콘 투자에 참여한 곳은 대부분 해외 VC”라며 “이 차이가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대한 아픈 곳을 찔렀다.

용 본부장에 따르면 그 차이는 돈의 출처와 시장을 이끌어가는 주체에서 나온다. 한국은 수직적 구조가 강한 나라인데, 가장 위에서 정부가 좋은 정책을 만들면 LP는 정책 목적에 적합한 펀드를 만들고, VC는 그 기준에 맞는 펀드를 조성하고 신청하는 격이다. 스타트업은, 당연히 돈이 몰리는 아이템을 찾아 창업한다.

그런데 반대로, 미국의 경우에는 그 중심에 기업이 있다. 기업을 중심으로 돈을 벌기 위해 VC가 투자를 하고, VC가 투자를 하려는 곳에 LP가 참여하는 식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 예산이 펀드의 중심이다 보니 정책과 감사가 심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리스크(위험)를 줄이려는 방식의 투자를 불러오기 때문에 안전제일의 분위기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300억원 규모의 투자는 지금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서도 두세 곳의 VC만 참여해도 충분한데도, 열네 군데의 VC가 함께 투자에 들어간 사례가 있었다. 용 본부장은 이를 대표적으로 씁쓸한 사례로 봤다.  VC들이 어떤 부문에서 독점적 지위를 가져가려는 미국 상황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큰 수익을 내는 것보다 위험 관리에 더 신경 쓰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물론, 규제 문제도 아직까지 스타트업 활성화의 걸림돌이다. 이날 발표에는 규제 샌드박스를 담당하고 있는 이진수 과기정통부 인터넷제도혁신과장도 참여했다. 이 과장은 공무 현장에서 스타트업에 대한 이해나 규제 혁신의 중요성이 널리 퍼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아울러, 모빌리티나 헬스케어 등 민감한 분야에서 규제 샌드박스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기득권을 돌파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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