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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은 아닙니다만] 과학은 무엇을 묻고 무엇을 묻지 않나

사람의 자리 – 과학의 마음에 닿다, 전치형 지음, 이음 펴냄, 2019

 

중요한 것은 질문이다.

인류와 과학의 발전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질문이 생기는 곳에 답을 마련하기 위한 자원을 투입해 왔다. 수많은 것 중 어떤 것이 알고 싶은 것인지 정해지면 그 시대 최고의 두뇌들이 과학과 기술이라는 수단을 동원해 답을 마련했다. 막대한 시간과 돈을 쏟아부어 과학과 사회는 짝을 지어 발전해왔다.

다시 말하면 질문은 선택되는 것이다. 알고 싶지 않은 것, 혹은 가리고 싶은 것은 구태여 묻지 않는다. 질문하지 않는 것에는 답이 있을리 없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한 사회가 던지는 질문에는 그 사회의 민낯이 담겨 있고, 그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가 묻어 있다.

카이스트 교수이자 과학철학자인 저자 전치형은 그의 저서 ‘사람의 자리 과학의 마음에 닿다’에서 “한국 사회가 무엇을 새로 밝히어 알자고 했고, 무엇은 굳이 밝히어 알려고 하지 않았는지”를 묻는다.

“무엇을 알아내기로 결정하고, 거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과 돈과 시간을 배치할 준비가 되었는가”는 “한국의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한국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을 “한 사회가 갖고 있는 앎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지금까지 한국 사회가 무엇을 묻지 않았는지를 되묻는 내용을 담았다.

 

 

이 책은 컬럼 묶음집이다. 대략 2015년에서 2018년 사이, 저자가 이곳저곳에 기고했던 글을 모으고 필요한 경우 후기를 덧붙여 출판했다. 꼭지마다 그간 있었던 중요한 이슈를 다루며 과학은 그 논쟁에서 과연 자유로운지, 각 사건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할지 길안내를 해준다. 인공지능이나 자율주행차 문제 같은 것에 대해서도, 놓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를 돌아본다.

개인적으로는 ‘로봇시대에 필요한 질문들’이라는 꼭지의 한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고, 이를 대비하기 위해 로봇이 할 수 없는 일을 찾고 자기계발을 해야 한다는 담론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강조되는 변화의 급박함이 로봇에 대해 차분하게 토론하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는 점은 우선 지적할 필요가 있다. 로봇이 빼앗지 못할 일, 여전히 인간이 잘할 수 있을 일을 빨리 찾아내고 거기에 몸과 마음을 맞추도록 강요당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변화를 누가 왜 만들어내는지 질문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는다.

매일마다 기술이 어떻게 사회를 바꾸어 나갈지,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변해갈지, 그 와중에 어떤 이익집단들이 부딪히는지에 대한 뉴스가 쏟아지지만, 가만히 앉아 지금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에 대해 고찰해볼 시간은 드물다. 관련 영역을 취재하는 사람 중 하나로서, 이 대목이 인상 깊었다.

‘동수 아빠의 과학’이라는 꼭지도 독자 여러분이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세월호 희생자인 단원고 2학년 7반 정동수 군의 아버지 정성욱 씨를 2018년 초 네덜란드 마린 연구소에서 세월호 모형 시험을 참관하러 갔을 때 만났던 경험담이다. 몇번의 침수 시험을 보고 또 본 후, 모형 시험이 없는 토요일 저녁, 연구소 근처 펍에서 맥주를 한 잔 마셨을 때 이야기다.

인양된 세월호를 1년 가까이 지켜온 그는 지쳐 있었다. 배는 뭍에 올라왔지만 진실은 아직 올라오지 않은 상황을 그는 그저 버티고 있었다. 자식을 앗아간 배를 1년 동안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에 어떤 일이 생기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어떤 과학자도 연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수 아빠 말고는 그런 데이터가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에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가 2018년 8월 6일 활동을 종료하며 발간한 종합보고서의 서론도 실었다. 보고서 작성을 위해 데이터와 씨름하면서, 세월호 참사의 핵심이 “데이터가 아니라 차마 데이터가 되지 못한 것들에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보고서의 한 구절처럼 “슬프게도 이 보고서를 들고 4년 전 그날로 돌아가 세월호의 침몰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 보고서가 다시는 세월호와 같은 배가 출항하지 못하도로 하는 근거가 되기를 바”라는 희망과 과제를 더 많은 이가 공유하자는 당부를 한다.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에 대한 꼭지도 있다. 사피엔스를 꽤 흥미롭게 봤기 때문에 관심이 갔다. 유발 하라리는 인류의 역사가 통합과 평화를 이룩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는 긍정적 역사 인식을 보인다. 아울러 “사피엔스가 이룩한 통합과 평화가 종 전체의 확산만이 아니라 개체의 행복을 증가시키는데도 기여했는지 질문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 행복인가? 하라리를 따라 과연 사피엔스는 행복한가를 묻는 대신, 우리는 하라리를 포함하여 점점 더 많은 역사학자, 심리학자, 경제학자들이 ‘행복’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 자체를 하나의 흥미로운 현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개인의 행복을 강조하고 영원히 죽지 않는 새로운 종의 탄생을 말하는 것이 “집단 전체의 공동 대응이 필요한 정치적, 역사적 의제를 상실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만일 최악의 기후변화 시나리오가 실현된다면 ‘사피엔스’에 등장하는 가상 첩보위성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큰 사건일 것이다. 지금 사피엔스는 천천히 다가오는 파국을 보지 못한 채 혼자서 내면의 행복을 찾으려 애쓰거나 자기 몸을 버리고 컴퓨터 메모리 속으로 거처를 옮겨 영생을 도모하고 있을 뿐인가?

라고 묻는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람과 공동체를 다시 살리는 문제다. 기술과 과학은 이 지점을 연구하는 학문이어야 한다는 문제제기다. 과학기술자 역시 한 명의 시민이다.

과학자들은 때로 ‘사실’만 다루는 ‘중립’의 영역에서 움직이는 사람들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어떤 문제제기를 갖고 특정한 사실을 짚어서 누구의 돈으로 무슨 연구를 해 결과를 만들어내느냐는 매우 주관적인 부분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문제제기는 그동안 많이 있어왔지만 대다수가 잊고 살고 싶어하는 문제 아니었나. ‘사람의 자리 – 과학의 마음에 닿다’는 그렇게 잠깐 멈춰서 지금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고찰해보라고 지르는, 사람의 목소리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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