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희의 서울음반이 아이유의 카카오M이 되기까지

솔직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1984년 어느 늦은 밤, 청평 강변가요제에서 이선희가 ‘J에게’로 대상을 탔을 때 나는 거기 있었고, 네 살이었다. 아마 내 인생 첫 야외 취침이자 가족 캠핑이었을 거다. 한 장의 사진이 남아 있는데 그 날의 얘기가 나올 때면 아버지는 말씀하시곤 했다. “그때 이선희가 대상을 탔지, 자그마한 체구에 노래를 정말 잘했어.”

 

그 한 장의 사진. 청평유원지에서 열린 1984년 강변가요제에서 이선희(4막5장) 씨가 대상을 탔다. 부모님의 요청으로 초상권 보호를 위한 하트가 생겼습니다.

이선희는 ‘J에게’가 담긴 1집부터 3집까지 지구레코드에서 음반을 냈다. 그래도 내 돈으로 산 이선희의 첫 앨범은 서울음반 거다. ‘이선희 베스트’. 서울음반은 1978년에 시사영어사 자회사로 문을 열었기 때문에 어학 테이프를 주로 만들던 곳인데 1982년에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음반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김광석 전설의 시작이 된 정규 1집 ‘너에게’(1989년)도, 소방차의 해체 소식을 알린 베스트 앨범(1990년)도, 90년대 최고 인기스타 손지창, 김민종(더블루)의 히트곡 ‘너만을 느끼며’(1992년)도, 모두 서울음반에서 나왔다. 내가 아이와(aiwa)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와 파나소닉 CD플레이어를 쓰던 시절까지는, 서울음반이 내 음악 정서 함양의 팔할을 맡았다. 물론, HOT가 나오면서 그 역할은 SM이 가져갔지만.

서울음반은 시사영어사(현 YBM)의 자회사로 시작했다.

정든 CD 플레이어와 헤어진 건 엄지 손가락 크기 MP3플레이어를 갖게 되면서부터다.

2004년이었는데, 모델명이 삼성 옙 ‘YP-T5’였던 걸로 기억한다. 용량은 512MB로, 노래가 100곡 가까이 들어갔다. 신세계였다. CD 10장 분량의 노래가 저 자그마한 기계에 들어간다니. 갖고 있던 CD에서 음원을 추출해 MP3플레이어로 옮기는 것이 하교 후 주요 일과가 됐다.

그런데 곧, 내 노력이 하등 쓸모 없는 일이란 걸 깨닫게 된 일이 생겼다. 같은 해 이동통신사인 SK텔레콤이 ‘멜론’이라는 음악 포털 사이트를 열었는데, 여기서 음원을 돈 내고 다운로드 할 수 있게 했다. 조PD가 ‘친구여’로 음원 시장을 평정하던 해였다.

이듬해 나는 취업을 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휴대폰을 바꾼 거였다. LG전자의 초콜릿 폰과 팬택의 스카이 폰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스카이를 골랐던 생각이 난다. 무려 200만 화소였고, MP3플레이어 기능이 들어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멜론에서 음원 다운로드보다는 벨소리 내려받기가 더 유행이었다.

그런데 이 멜론의 운명이 바뀌는 일이 곧 일어났다. 2005년, SK텔레콤이 멜론이 쓸 음원을 확보하려 YBM서울음반을 인수한 것이다. 그로부터 3년 후, 서울음반은 이름을 로엔엔터테인먼트로 바꾸고 SK텔레콤으로부터 멜론 사업을 양도받았다. 서울음반에서 시작한 로엔이, 향후 10년간 국내 음악 시장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음원 포털을 도맡게 된 것이다.

그리고, 대망의 2009년.

2009년이 어떤 해인지는 두 말하면 입이 아프다. 나는 하던 일을 집어치우고 IT 매체에 기자로 취업했다. 그해 11월, 한국에 아이폰이 처음 상륙했다. 코원이며 아이리버 같은, MP3플레이어와 포터플 미디어 플레이어(PMP)를 만들던 회사들에 한풍이 몰아치는 것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코원이 소지섭에 이어 강동원을 모델로 쓰며 심폐소생술을 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음악을 듣고 영상을 보는 모든 모바일 기기를 아이폰이 먹어치웠다.

‘음반’ 시장도 ‘음원’ 시장으로 카테고리 이름이 바뀔 만큼 대변혁이 일어났다. 멜론이 국내 처음으로 스마트폰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했다. 나 역시 아이폰 3GS를 영접했고,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는 새로운 방법을 알았으며 내 음악 취향 역시 멜론 톱100이 만들었다. 스트리밍 시대가 열리고 무취향의 취향이 생긴 셈이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카카오M은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비전을 두고 있다.

그 사이 음원 시장에서 가장 놀랄만한 소식은, 아마도 카카오의 ‘멜론’ 인수였을 것이다. 2016년이었는데, 나는 이때 잠시 기자를 그만두고, IT 회사에 입사했었다. 소식을 듣고는 깜짝 놀랐지만, 인생 첫 내근직을 경험하는 터라 사무실 밖의 이야기를 취재할 방법이 없었다. SK텔레콤이 지주회사법 문제로 로엔엔터테인먼트를 매각했는데, 카카오가 글쎄 1조8700억원에 덜컥 사들였다는 소식에 혀만 내둘렀을 뿐.

이때 당시만 해도 주변 사람들은 ‘카카오가 미쳤다’고 말했다. 카카오가 왜? 도대체 카카오랑 멜론이 어떤 시너지를 낸다고? 게임 외에는 제대로 된 매출원도 없지 않나? 뭘 믿고 저렇게 모험하지? 이 돈을 이렇게 써도 돼? 라는 세상 넓은 오지랖까지 곁들여서.

걱정도 팔자라고, 로엔을 껴안은 카카오는 이후 매출과 영업익 양측에서 모두 성장했다. 멜론은 꾸준히 현금 수익을 내는 효자 상품이었고, 카카오 송년회에는 무려 아이유가 오는 덤까지 안았다. 그리고 나는 이 시기, 다시 기자 일을 시작하면서 인공지능 스피커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가 모든 아이템을 마구 먹어치우는 때였고, 인공지능 스피커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 멜론이 카카오의 주요 경쟁력으로 언급되던 시기였다.

2018년 9월, 카카오는 멜론과 카카오M(로엔엔터테인먼트가 카카오M으로 이름을 바꿨다)의 운명을 다시 한 번 바꾼다. 카카오M에서 멜론을 떼어내 본사에 두고, 다른 사업부- 예를 들어 B2B 음원 유통이나 연예인 매니지먼트,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제작 등- 를 카카오M으로 분사시킨 것이다. 이제 자회사 카카오M은 6개의 기획사를 인수한 거대 엔터테인먼트사가 됐다.

새해 첫 업무 시작 날, 카카오M으로부터 이메일이 하나 날아왔다. CJ ENM 대표 출신의 김성수 신임대표가 취임한다는 소식이다. 김 신임대표는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 사업 강화를 임무로 맡았다. CJ ENM 시절 ‘응답하라’ 시리즈 같은, 인기 콘텐츠가 그의 지휘 아래 나왔다. 서울음반에서 시작한 카카오M이 앞으로는 영상의 시대를 준비한다. 카카오M은 글로벌을 겨냥한 콘텐츠 제작에 힘을 쓰겠다고 한다. 음악이 중심이겠지만, 영상도 중요한 축으로 보고 있다. 콘텐츠 사업은 망하지 않는다, 담는 형태와 만들어 내는 회사가 부침을 겪을 뿐.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

관련 글

10 댓글

  1. 글 잘 읽었습니다. 해외 음원 스트리밍 사업쪽도 글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목에 아이유가 있는데, 정작 글에는 아이유 사진이 없군요. ^^ 농입니다.

    1. 아, 제가 제일 중요한 아이유 사진을 빼먹었네요! 기회 닿는대로 해외 음원 스트리밍 시장도 조사해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 정말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md 플레이어를 잠시 즐겨 사용했던 세대로 너무 유익하고 도움되는 기사네요.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