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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작가를 만나다]페이스북에 그리는 제주일기, 너굴양

필명 너굴양으로 활동하는 정희정 작가는, 30대 초반까지 마케터로 일했다. 처음부터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건 아니었고, 이직을 준비하며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던 게 아예 직업으로 바뀐 경우다. 일간지에 ‘너굴양 그림일기’를 연재하며 이름을 알렸다. 두 달 전에는 제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제주 초심자의 하루하루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너굴양 제주일기’로 그려진다.

너굴양이란 필명은 학창시절 친구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조금은 아래로 처진 듯한 눈매가 귀엽고, 말이나 행동이 느긋하니 차분하다. 그랬는데, 서울에서 살 때는 말도 빠르고 일도 공격적으로 했다고 한다. “제주와서 느긋하게 살다보니, 말도 행동도 느려졌다”는 너굴양을  지난 3일 제주 원도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첫인상은 앳됐는데, 대화를 나눌수록 생각이 깊다는 인상을 받았다.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도, 아직 제주에 산 지 오래 되지 않아 제주의 창작자로 나서긴 어렵지 않을까 저어했다.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이 지역에 자신이 어떻게 동화되고 기여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모습에서 제주가 참 좋은 친구를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 두 달 차, 이제 막 제주 한달살이 이틀차에 접어든 기자에겐 딱 한 기수 위 인생 선배같은 느낌이었다.

너굴양 제주일기의 정희정 작가.

Q. ‘너굴양 제주일기’를 연재 중이다. 너굴양은 어떤 만화인가?

심오한건 없다. 내 일부가 담긴 캐릭터로 내가 하고픈 말을 하는 거다. 성격상 어둡거나 우울한 내용을 깊게 다루진 못한다. 그런 것을 견디기 힘들어하기도 하고, 굳이 그러고 싶지 않기도 하다. 독자들이 읽고, 따뜻한 마음이 든다든지 웃는다든지 그런 게 만족스럽다. 일상이나, 혹은 생각한 것을 담담하고 소소하게 풀어가는 만화다. 기록의 의미이기도 하다. 하루하루가 매일 다른데, 그 기억을 되새길 수 있게 하는 수단으로 일기를 쓴다. 내가 쓰면서 치유도 받고, 다른 사람에게 내 만화가 위로가 되기도 하고.

Q. 언제 작가가 되었나

5년차다. 회사 이직을 준비하다가 평소에 그렸던 그림을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주변에서 이걸 좀 살렸으면 좋겠다고 추천했다. 이직 준비하면서 놀지 말고, 그림을 잘 그리니 이걸 갖고 뭐든 해보라고 해서 캐릭터 명함을 만들어봤다. 그걸로 두세달 정도 생계가 유지됐다. 작가를 하고팠는데 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전공이 아니라 처음엔 콤플렉스도 있었고, 만화를 그리고파도 어떻게 할지 몰랐는데 그 일이 기폭제가 되어서 지금까지 왔다.

Q. 직업 뿐만 아니라 사는 곳도 바뀌었다

뭘 하든 하얗게 불타야 그만두는 스타일이다. 일도 사람도 그렇다. 그러고 나면 너무 힘들다. 작가는 하고픈데 서울에 계속 있으면 원하지 않는 데 에너지를 소비하는거 같아서 물리적 거리를 둘 수 있는 지역을 알아봤다. 한때는 치앙마이나 발리를 생각했는데, 준비도중 건강이 나빠져서 못 갔다. 그때 제주에서 체류지원 프로그램을 하는걸 발견했다. 두 달간 제주에서 머물렀고, 지원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도 일이 있어서 계속 머물렀다. 오래 집 떠나 있던 적이 없는데 살만하더라. 서울의 리듬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처음엔 평생 살거는 아니고 몇 달 내려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제주에 와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그래서 올해 아예 제주에 살러 내려 왔다.

제주 전농로 벚꽃축제에서 정희정 작가가 자신과 다른 작가들이 만든 엽서를 판매하고 있다.

Q. 두 달이면, 아직 제주에 대해 좋은 것만 보일 때 아닌가

그렇진 않다. 작년에 6개월 있었으니까. 그리고 주변의 이주민이나 현주민이 제주의 안 좋은 점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해줬다(웃음).

Q. 제주의 좋은점과 나쁜점을 말해달라

좋은점은, 일단 사람이 많이 안 산다는 거다. 원도심은 번화가지만 동네에만 들어가도 저녁때 사람이 없다. 차도 없고. 한적하다. 사람이 적당히 많고 없고를 내가 선택할 수 있는게 좋다. 자연을 빨리 접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집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에 바다가 있고, 같은 거리에 숲도 있다. 여기 와서 오름과 숲을 좋아하게 됐다. 확실히 치유가 된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도 좋다. 작가 활동에 도움이 된다. 작업을 할 때는 내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자꾸 사람을 만나다보면 일할 체력이 안 남는다. 서울에서는 사람을 만나면 묘한 경계심도 생긴다. 그런데 여기서 만난 사람은 조건 없이 빨리 친해질 수 있는게 있다. 사람도 귀해서 여기서는 일단 누구를 만나든지 반갑다. 사람이 많이 없으면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소중하다.

Q. 좋은 점만 얘기한다. 누군가 제주에선 문화생활을 못해서 답답하다고 하던데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서울 산다고 해서 문화 활동을 특별히 더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나같은 경우는 오히려 여기 와서 문화 생활을 더 잘 하는 것 같다. 주변에 음악하는 사람도 많고, 무료 문화 예술행사도 많다. 근처에 제주목 관아가 있는데 여기서 무료 개방 콘서트를 많이 한다. 지난달에는 자이언티도 왔고, 김창완 밴드도 공연했다. 서울에선 그런 공연은 비싼데다 사람도 많다. 여긴 1000명 단위라 가까이서 볼 수있다. 제주는 일년 내내 축제가 있어 제주 만의 문화를 충분히 접할 수 있다.

제주 옹기체험수업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너굴양.

Q. 제주에선 어떤 작업을 하고 있나

지난해 제주 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발행하는 웹진에 ‘너굴양 노마드툰’을 그리면서 디지털 노마드 이야기를 다뤘다. 제주를 탐색하는 기간에 도움이 많이 됐다. 제주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를 함께 제주에 내려온 친구와 작업하고 있다. 책으로 출판할 예정이라 지금 작업하느라 정신이 없다. 앞으로 제주 생활을 담은 만화도 그리고 싶다. 제주가 좋아서 왔지만, 좋아서 사는 만큼 책임지는 것도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내가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제주 사는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을지, 어떻게 포지셔닝 할 수 있을지를 고민 하고 있다.

Q. 포지셔닝이라는 말이 인상 깊다

도유진 작가의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살아갈 자유, 디지털 노마드’란 책을 보면, 지역에 도움이 되는 일에 대해 고민하는 부분이 나오다. 임팩트가 있는 사람일수록 떠났을 때 난 자리가 크다고 한다. 디지털 노마드는 지역을 옮겨다니며 사는데, 거기서 개인에 좋은 것만 소비하고 떠났을 때 원래 지역 주민들이 어떤 생각을 할 것인지에 고민은 안 한다. 어느 한 장소에 오래 머물거라면, 그 생각을 해야 한다. 내가 사는 곳은 어디고 어떤 문화가 있는지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알다보면 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찾을 수 있을 거라 본다.

Q. 작가님이 이 지역에 할 수 있는 기여는 무엇인가

고민하고 있다. 일단은 제주에 여행와서 느낀 것에 대해 에세이를 쓴다. 제주 관련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게 일차적이다. 제주에 예쁘고 좋은 것 뿐만 아니라 제주에 살면서 몸으로 부딪혀 느끼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생각보다 모르기도 하고, 와서도 새로 알아야 할게 많다. 가능하다면 개인적으로는 제주의 문화 역사를 더 많이 공부하고 싶다.

Q. 제주 역사를 만화로 그릴 생각이 있나

제주 역사는, 아픔이 많고 아직도 진행형이라서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주제는 아니다. 제주 문화 관련해서 다양한 아이콘이 있다. 지금은 외형적으로만 소비하는 경향이 있는데, 깊게 스토리텔링해서 사람들이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접근을 하고 싶다.

Q. 외형적 소비라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나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해녀를 하나의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수많은 제주 관련영상에서 해녀 옷을 입은 분들이 등장하는데 대체로 해녀 옷을 입고 제주 사투리를 쓰며 물질하는 장면만 나온다. 진짜 해녀의 이야기를 담은 콘텐츠는 별로 없다. 겉으로 보이는 제주만 소비하는 것이다.

Q. 제주에서 계속 살 생각인가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다. 그래도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면, 서울로 가야겠지. 서울은 살기 힘들고 퍽퍽하지만 기회도 그만큼 많다. 부딪히는 사람만큼 기회가 생기는 거니까. 제주는 상대적으로 그럴 기회는 적다. 모든걸 제주에서 해결하겠다는 것은 어렵고, 서울과 제주를 오가면서 일을 하고 싶다.

Q. 앞으로 계획을 말해달라

책을 빨리 잘 써서 여러분들한테 보여드리고 싶다. 크게 원하는 건 없고, 내 밥벌이 잘 하면서 잘 먹고 살고 그걸로 가끔씩 사람들과 재미있는 일을 작당하고, 그렇게 살고 싶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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