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시간 근무제, IT업계 딜레마에 빠졌다

한때 ‘꺼지지 않는 구로의 등대’라 불렸던 넷마블이 최근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도입했다. 7월부터는 300인 이상 대기업에서부터 주 52시간 근무제가 실시된다. 노동자 1명이 일주일 동안 52시간 넘게 일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노동시간 단축은 사회 전반에서 환영할 일이다. 한국의 고도 성장은 조직 위주 논리에서 가능했다. 그동안 개인은 너무 많은 노동 시간에 여가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IT 업계는 52시간 근무제를 완전히 환영하지는 못한다. 노동 시간 단축이라는 기본 취지에는 공감하나, 일 하는 시간을 일률적으로 주당 52시간으로 끊어버리는  제도가 업무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예컨대 넷마블은 1분기에 신작을 내지 못했다.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도입한 이후 신작의 발표 속도가 늦어진 것이다. 무조건 더 많이 일해서 빠르게 신작을 뽑아내는 것이 옳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게임 시장에서 신작은 상당히 중요하다. 게임을 더 많이 더 빨리 내고 성과를 거둬 더 큰 보상을 해주느냐와, 개발자의 인간적 삶을 보장하느냐는 두 가지 중에 무엇이 나은 방법인지 쉽게 답하긴 어렵다. 개발자 개인에게 물어도 서로 다른 답이 나올 수 있다. 아니, 애초에 두 가지 프레임만 놓고 선택을 하라고 하는 것도 ‘성장이냐 분배냐’ 만큼 이분법적 질문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 성장하기 시작한 IT는 다른 업종에 비해 업력이 짧다. 단기간 빠르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노동자 개인의 삶이 많은 부분 희생됐다. 성공한 조직에서는 구성원의 희생만큼 과실을 나누었으나 그 성공은 극히 드물고 점점 어려워진다.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같은 신생 IT 기업이 세계 경제 전반을 이끌어 나간다. 우리가 이들과 어깨를 견줄만한 기업을 만들려면? 이 업체들도 처음엔 스타트업이었다. 이들 역시 구성원이 밤낮없이 일해 회사를 키웠다. 이들에게 특정 시간만 노동하라고 했을때 경쟁력이 있었을까? 일과 삶의 조화를 강조하는 것이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면 어떻게 할까? IT 기업의 문제 지적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출처=바이라인네트워크] * 기사와 사진의 내용은 연관이 없습니다.
■IT식 노동유연화? 나인 투 식스(9 to 6)의 문제

주52시간제를 IT에 일괄 적용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입장은 크게 두 가지 범주다. 첫째는 창의성이 높은 개발, 디자인 직군에 공산품을 만들 때처럼 일정한 시간 동안만 일하도록 하는게 맞느냐는 것이다. 두 번째는 SI(시스템통합) 업군이다. SI는 프로젝트 단위로 일을 하며, 고객의 요구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먼저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힌 곳은 SI 쪽이다. 삼성SDS, LG CNS 같은 대기업들이 회원사로 가입한 한국IT서비스산업협회(ITSA)는 지난달 24일 성명서를 내고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단위기간 1년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정산기간 최소 6개월에서 최대 1년으로 확대 ▲개정 근로기준이 반영된 계약수정 및 사업수행과년 법제도 현실화를 요구했다.

사실상 SI 업군에 특례 제도를 도입해달라는 이야기다. 이수영 ITSA 정책연구팀장은 “프로젝트가 3개월 단위 이상으로 이뤄지고 있는데 주당 근무 시간을 제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다”며 “정해진 오픈 기간 때문에 일정이 바쁜데 근무시간이 정해져 있을 경우 오히려 근로 시간 자체의 유연성이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SI가 아닌 개발직군이 모인 기업이나 협회에서는 주 52시간제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인터넷기업협회나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의 경우 “아직 회원사의 입장이 모두 모이지 않았다”고 발언을 조심하고 있다. 여론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를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표현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업계 관계자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업무라고 딱 자르기 어려운 상황이 많다”며 “개발이나 기획의 경우에는 그때그때 발생하는 이슈에 맞춰 일을 할 때가 많은데 이를 어떻게 제도에 맞게 운영해야 할지 고민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대체로 사용자의 입장이다. 노동계는 조금 다르다. IT 업계가 집중 근무 시간을 늘려달라는 주장이 실제로는 노동자 개인의 건강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경비업이나 소방직의 경우 24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일하면 나머지 이틀은 아예 일과 떨어져 지낼 수 있다. 그런데 개발직은 그렇지 못하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쉬는 동안에도 일과 연관될 수밖에 없다. 구조적으로 이들의 건강권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은미 정의당 비상구 부대표는 “가령 타이어 공장이나 제철소, 석유화학 같은 곳은 24시간 일해야 하지만 3주 4교대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다”며 “제도에 맞춰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지 노동자의 희생을 전제로 회사를 지키겠다는 것은 맞지 않는 발상”이라고 말했다.

국내 IT업계가 글로벌 경쟁에서 이기려면 노동 시간을 늘릴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강 부대표는 “기업의 욕심”이라고 말한다. 하루 24시간, 열흘 안에 해야하는 일이라면, 하루 8시간 25일에 나눠서 할 수 있다. 개발 프로젝트의 출점 시간을 늦추며 되는데, 당장 급박하게 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으로 우리의 사고방식이 고정되어 있지 않느냐는 반문이다.

강 부대표는 “노동자에게 자신의 생명이나 건강권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며 “IT 업계 일부의 주장과 반대로 업무 시간을 짧게 집중적으로 가져가는  노동이 훨씬 더 효율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과로로 뻗어버린 개발자 고양이 [출처=바이라인 네트워크]
■ 개발자의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

이런 딜레마는 어떻게 보면 개발자가 ‘홀로’ 존재하는 현상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사회적 타협은 플레이어들이 공론장에 올라와야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조직화되지 않은 개인은 무력하다. 노동 시간에 대한 대가 요구나, 혹은 기업도 개인도 같이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모두가 협상 테이블에 나서야 한다. 그러나 개발자의 목소리가 사회 공론화된 적은 없거나 드물다. 이직이 잦고, 개별적으로 일하는 데 익숙한 개발자들은 조직화에 익숙하지 않다. 언제 어디로든 이직할 수 있는 개발자는 능력이 있는 것이지만, 그만큼 언제든 고용 불안정에 처해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네이버의 노동조합 설립은 유의미하다. 현재 네이버를 제외하고 IT 기업에 노조가 만들어져 있는 곳은 없다. 네이버를 제외하고도 이미 카카오, 넥슨, 엔씨소프트, 넷마블 등 대기업에 준하는 기업이 꽤 많이 나왔다. 그럼에도 이 곳들에는 노조 대신 ‘노사협의체’만 존재한다. 노조와 노사협의체는 엄연히 다르다. 기본적으로 노조는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라는 노동 3권을 보장 받는다. 노사협의체는 조직원이 사측에 의견을 전달할 수 있지만 강제력은 없다. 사측의 선의에 기대야 하는 측면이 크다.

강은미 부대표는 “노조는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것이라 노동조건과 임금을 합의하고 결정하는 것인데 노사협의회는 구성원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아도 노동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우리나라에서는 노조를 구성해도 탄압이 커서 제구실을 하기 어려운데 노사협의체는 정말 형식적인 것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주 52시간 노동에 대해 IT업계의 의견이 엇갈린다면, 실질적으로 노동자 스스로의 이권을 확보할 수 있는 목소리를 노동자 단에서 내야 한다는 뜻이다.

강 부대표는 “내가 있는 곳에서 부당하고 잘못된 것을 고쳐 나가서 이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제대로 대우 받고 내 창의력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곳을 만들겠다고 생각하느 곳이 많아져야 전체적으로 IT 업계가 좋아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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