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장은 어떻게 AI 스타트업의 테스트베드가 됐나
신기술을 개발하는 딥테크 스타트업은 시장이 필요하다. 때문에 정부가 신기술의 고객이 돼달라는 요구가 스타트업 업계에서 꾸준히 나오고 있다. 정부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공공부문의 AI 전환(AX)을 추진하려면 스타트업의 기술과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이에 따라 공공기관과 딥테크 스타트업의 협력 사례를 통해 공공 AX가 현장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스타트업에는 어떤 새로운 시장을 열어주고 있는지 짚어본다. [편집자주]
[공공기관 AX 기획 ①한국마사회] 지금 ‘말’ 산업에 스타트업이 모인 이유
말을 키우고 관리하는 한국마사회와 신기술과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스타트업, 언뜻 낯선 조합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국마사회는 2024년부터 국내 딥테크 스타트업과 활발하게 협력해왔다. 본격적으로 나선 지는 3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 관계를 맺은 스타트업은 20여곳을 넘어섰다. 건수만이 아니라 성과도 눈에 띈다.
한국마사회와 스타트업의 협업은 국제 무대에서도 성과를 인정받았다.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이 유엔 산하기관들과 함께 운영하는 AI 프로그램 ‘AI for Good’은 매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정상회의를 열고, 사회·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AI 우수사례를 선정해 국제표준 논의로 연결한다. 국내에서 등록된 38건의 우수사례 가운데 한국마사회 관련 사례만 3건이다.
한국마사회의 협력 방식을 흔히 ‘오픈이노베이션’이라고 부른다. 기술과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기업·기관과 비즈니스 기회를 필요로 하는 스타트업이 협력하는 개방형 혁신 방식을 뜻한다.
한국마사회가 오픈이노베이션에 적극적인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창업 지원이 사회적 가치 실천을 넘어 기관의 성과관리 전략과 직결된다는 점이다. 공공기관은 매년 경영평가를 받는데, 창업 지원은 책임경영 부문의 ‘창업 및 경제 활성화’와 ‘상생·협력 및 지역발전’ 평가 요소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속도다. 공공기관이 자체적으로 AI 사업을 추진하려면 여러 규제와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스타트업과 협력하면 상대적으로 신속하게 기술의 효과를 검증할 수 있다.
여기에 말 산업 특유의 사정도 더해진다. 장 과장은 “국내 말 산업은 다른 산업보다 시장 규모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내부 기술 개발보다는 외부 협력이 방향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다”며 “마침 딥테크 스타트업들도 현장 데이터와 실증 기회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마사회는 협업 규모를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2024년 2개 기업으로 시작한 스타트업 협력 사업은 올해 한국마사회가 자체적으로 10개 기업을 선발할 정도로 커졌다.
현재 한국마사회가 딥테크 스타트업과 협업하고 있는 분야는 말 개체 식별, 건강관리, 말 산업 콘텐츠 등 다양하다. 향후, AI 영상분석을 활용한 말 건강·동물복지 분야를 확대하고, 디지털 트윈 기반 경마·승마 콘텐츠와 말 매개 치유에 디지털 헬스케어 기술을 결합하는 분야도 발굴할 예정이다.
한국마사회는 과제 선정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말 산업 전문가와 현업 부서가 실제 현장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정의하고 기술이 필요한 과제를 구체화하며, 실증 대상과 평가 기준도 스타트업과 공동으로 설계한다. 단순히 실증 공간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겠다는 취지다. 스타트업에 말 관련 전문지식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실증 이후에는 사업화 가능성 검토와 공공조달, 특허, 국제표준화, 국내외 전시 참가와 판로 확대까지 연계해 지원한다.
장 과장은 “스타트업이 보유한 기술을 말 산업에 접목할 때는 방향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스타트업이 제안하는 주제만 검토하기보다 한국마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술을 적극적으로 찾으려고 한다”며 “업체 발굴이나 주제 선정 과정을 주도적으로 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 협업들이 실제 현장에서 어떤 성과로 이어졌는지, 대표적인 사례 다섯곳을 통해 살펴봤다.
온텔리에이아이, 말에게 ‘디지털 여권’을 만들어주다
온텔리에이아이는 동물 개체를 식별하고 체형과 행동 정보를 분석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AI 스타트업이다. 비전 AI를 기반으로 사람의 지문처럼 동물마다 고유하고 영구적인 신체 특징을 포착해 데이터화하고 있다.
한국마사회와의 협업은 경주마의 희소성과 말 신원 확인의 비효율성에서 출발했다. 말의 신원을 확인해주는 마필개체식별서(말 여권)는 말의 특징을 그림이나 사진으로 남겨두면, 담당자가 이를 육안으로 대조해 확인하는 수작업 방식에 의존해왔다. 이 때문에 몸값이 높은 경주마일수록 외형이 비슷한 다른 말로 바뀌치기당할 위험에도 노출돼 있었다.
변창현 온텔리에이아이 대표는 “말은 개체별 가치가 높고 체형, 건강 상태, 운동 능력을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만큼 동물 비전 AI 기술을 실제 산업 환경에서 검증하기에 적합한 대상이라고 판단했다”고 협업 배경을 설명했다.
말 개체 식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측은 약 3년에 걸쳐 협업을 진행했다. 온텔리에이아이에 주어진 과제는 얼굴 무늬, 몸통 패턴, 다리의 흰 점 표시 등 말의 외형적 특징과 체형 정보를 분석하고, 이를 생체인식과 디지털 신원확인 체계에 활용할 수 있는지 검증하는 것이었다.
온텔리에이아이는 말의 전신 이미지와 주요 신체 부위가 담긴 영상을 바탕으로 신체 영역과 주요 특징점을 AI로 검출했다. 말은 자세와 움직임에 따라 같은 개체라도 체형 정보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이에 따라 자세, 촬영 각도, 배경, 조명, 이동 여부 등 다양한 변수를 AI 모델 개발과 성능 검증에 반영해야 했다.
협업의 가장 큰 성과는 말 생체인식 기술의 국제표준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온텔리에이아이는 동물 비전 AI를 활용해 말의 외형적 특징을 비접촉 방식으로 식별하는 생체인식 기술을 고도화했다. 이를 바탕으로 ITU 전기통신표준화부문에서 논의되는 동물 생체인식 기반 디지털 신원확인 표준과 연계하는 성과를 냈다.
변 대표는 “궁극적으로는 기존 아날로그 기반 개체 식별 방식을 디지털로 전환하고, 국제표준에 기반한 동물 생체인식 체계로 확장하는 것이 목표”라며 “개체 식별 기술을 활용하면 말의 등록, 이력 관리, 이동 추적 등 다양한 관리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림피드, 24시간 말의 통증을 읽다
림피드는 수의사들이 창업한 AI 펫 헬스케어 기업이다. 영상만으로 동물의 행동 데이터를 확보하고, 이를 수의학적 건강 지표로 해석하는 비전 기반 헬스케어 기술을 고도화해왔다.
협업의 배경에는 말의 높은 개체 가치가 있었다. 권륜한 림피드 CTO는 “말은 개체 가치가 매우 높아 24시간 건강 모니터링에 대한 수요가 어느 동물보다 명확한 영역”이라며 “반려견과 반려묘에 이은 첫 확장 대상으로 말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말의 이상 증상 관리였다. 말은 통증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외부 자극에 예민하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증상을 감지하기 위한 웨어러블 기기를 부착하기도 어렵다. 이에 림피드는 관리·감독 인력이 없는 시간대에 나타나는 말의 통증, 스트레스, 질병 징후를 포착하는 과제를 맡았다.
림피드는 마방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 영상을 24시간 분석하는 AI 파이프라인을 구축하고, 말의 특이 행동을 인식하는 전용 AI 모델을 개발했다. AI 모델이 이상 징후를 감지하면 관리자에게 즉시 원격 알림을 보내는 체계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말의 증상과 행동을 분석할 수 있는 새로운 데이터세트도 구축했다.
2025년 시작된 협업은 솔루션 기획과 개발, 현장 실증을 거쳐 2026년 2월 상용화로 이어졌다. 현재는 말 전문 동물병원의 입원 마방으로 모니터링 범위를 확대하고 있으며, 출산 징후 감지 등 기능 고도화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협업 과정에서 림피드와 한국마사회는 관련 기술 특허 2건을 공동 출원하고, 말 전용 솔루션 브랜드 ‘에퀸포라(Equinfora)’를 만들었다. 에퀸포라는 농식품 테크 스타트업 창업박람회(AFPRO 2026) 한국마사회 공동 부스에서 처음 공개됐다.
림피드는 앞으로 모니터링 서비스의 적용 범위를 확대할 예정이다. 권 CTO는 “경주마와 입원 마방 중심의 모니터링을 말 전문병원과 목장·육성 시설, 나아가 승마 시설까지 넓혀 말 복지 전반을 지원하는 인프라로 발전시키고 싶다”고 밝혔다.

아티젠스페이스, 말 산업에 콘텐츠를 입히다
아티젠스페이스는 증강현실(AR) 기술 기반 콘텐츠 스타트업이다. AR 솔루션 ‘아티’를 통해 종이책의 텍스트를 실시간으로 인식하고, 문맥에 맞는 시청각 효과를 AR 콘텐츠로 구현한다.
한국마사회의 말 관련 콘텐츠 제작 수요는 아티젠스페이스에 새로운 사업 기회가 됐다. 김범수 아티젠스페이스 부대표는 “아티젠스페이스는 AI와 AR 기술을 교육, 관광, 공공서비스 등 실제 현장의 문제 해결에 활용하고자 한다”며 “양측의 전문성과 기술을 결합해 말 복지, 승마, 안전 등 어려운 정보를 시민 눈높이에 맞는 체험형 콘텐츠로 전달하기 위해 협업을 추진했다”고 밝혔다.
인기 경주마 ‘닉스고’는 한국마사회의 주요 지식재산권(IP) 콘텐츠다. 경주 상금으로만 100억원 넘게 벌어들이고 세계 1위에 오른 경력이 있어 관련 굿즈가 제작될 정도로 높은 인지도를 보유하고 있다. 이에 닉스고 관련 콘텐츠 제작이 아티젠스페이스의 주요 과제로 선정됐다.
아티젠스페이스는 콘텐츠 기획과 AI·AR 서비스 설계, 디자인, 웹 기반 증강현실(WebAR) 구현, 전시·체험 운영 준비를 담당했다. AFPRO에서는 닉스고 AI·AR 독서 콘텐츠와 참여형 WebAR 콘텐츠를 선보였다.
닉스고 IP와 별도로 선보인 보호동물 입양 촉진 서비스는 AI for Good 우수사례로 등록됐다. 일반적으로 보호시설에 수용된 동물은 미용이나 건강관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모습으로 입양 공고에 등록되는 경우가 많다. 아티젠스페이스는 AI를 활용해 입양 이후 건강하게 관리된 동물의 모습을 시범적으로 보여주는 서비스를 개발했다. 해당 서비스는 보호동물의 긍정적인 미래 모습을 제시해 입양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퇴역경주마와 구조마, 유기견을 시작으로 향후 다양한 보호동물과 해외 기관까지 적용 범위를 확대할 계획이다.
양측의 협업은 올해 6월 시작돼 11월까지 6개월간 진행된다. 아티젠스페이스는 AFPRO를 통해 과제로 수행한 닉스고 AI·AR 독서 콘텐츠와 참여형 WebAR 콘텐츠, 보호동물 입양 촉진 서비스의 최소기능제품(MVP)을 공개했다. 현재는 AI 지식 데이터베이스와 도슨트 시나리오, 모바일 콘텐츠 등을 고도화하고 있다.
김 부대표는 “향후 한국마사회가 승인한 자료를 기반으로 답변하는 검색증강생성(RAG), 지식그래프, 음성합성(TTS) 기술 등을 적용한 AI 도슨트를 선보일 예정”이라며 “키오스크형 스테이션과 모바일 체험, 운영 데이터 관리 기능도 연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브로즈, 경마장을 디지털 공간으로 옮기다
브로즈는 AR·가상현실(VR)·AI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공간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이다. 디지털 트윈 솔루션을 바탕으로 관광·문화·상업시설 등 다양한 산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왔다.
협업의 출발점은 2025년 열린 오픈이노베이션 밋업이었다. 노지윤 브로즈 CPO는 “공공기관과 말 산업이라는 새로운 시장에 진입하고, 기술 적용 범위와 판로를 확대하는 데 한국마사회가 가장 적합한 협력기관이자 중요한 성장 발판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밝혔다.
기존 경마장에는 오프라인 길 안내 인프라가 잘 마련돼 있지만, 이를 온라인에서 통합적으로 체험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수단은 제한적이었다.
이에 브로즈에는 두 가지 과제가 주어졌다. 하나는 공간지능 기술을 말 산업 현장에 적용하는 것, 다른 하나는 한국마사회의 오프라인 시설과 콘텐츠를 공간 제약 없이 홍보·운영할 수 있는 통합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지난 3월 본격화된 협업은 12월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브로즈는 이미지·영상 기반 3차원(3D) 공간 구현과 방문객용 공간·시설 안내, 비전언어모델(VLM) 기반 공간 이해 및 질의응답형 AI 에이전트, 확장현실(XR) 기반 길 찾기·체험 콘텐츠를 개발한다.
경주마와 말 산업을 소개하는 온라인 전시 콘텐츠, 시설과 콘텐츠를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관리자 시스템, 방문객 질문과 콘텐츠 이용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는 운영·분석 체계도 구축할 계획이다.
현재는 렛츠런파크 영천을 대상으로 공간과 콘텐츠 구성, 방문객 이용 흐름, 적용 기능 등을 구체화하는 기획 단계에 있다.
노 CPO는 “브로즈가 보유한 3D 재구성, VLM, AI 에이전트, XR 기술을 말 산업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증 기회를 확보한 것이 가장 큰 성과”라며 “렛츠런파크 영천 실증을 통해 기술성과 이용자 경험, 운영 효율성, 사업성을 검증한 뒤 이를 표준화된 말 산업 공간지능 패키지로 발전시키고자 한다”고 말했다.

실비아헬스, 말 위에서 뇌가 젊어진다
실비아헬스는 AI를 기반으로 시니어의 인지 건강을 측정하고 관리하는 헬스케어 스타트업이다. 간편한 인지 기능 측정부터 지속적인 관리까지 지원하는 AI 기반 통합 솔루션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마사회와 실비아헬스의 협업 접점은 시니어 승마였다. 김민주 실비아헬스 매니저는 “승마는 신체활동뿐 아니라 말과의 교감, 참여자 간 교류 경험이 함께 이뤄진다”며 “시니어의 인지 기능 유지와 향상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실버승마’는 60대 이상 고령층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치유 프로그램이다. 운동 이후 참여자의 만족도는 높았지만, 주관적인 만족도 조사에 그쳐 객관적인 효과를 측정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실비아헬스는 자사 솔루션 ‘실비아 인사이츠(SILVIA Insight)’를 활용해 프로그램 참여 전후의 인지 기능을 측정하고, 정서 지표와 함께 비교·분석하는 방식으로 실버승마의 효과를 검증했다. 만족도 조사에 그쳤던 기존 평가 방식을 정량 데이터로 뒷받침한 셈이다.
5주 동안 진행한 실증 결과, 참가자들의 단어 기억 점수는 8.3~9.7점 상승했고 부정적 정서 지표는 33.3% 감소했다.
과제에 활용된 실비아 인사이츠는 모바일로 간편하게 인지 기능을 측정할 수 있는 솔루션이다. 디지털 인지 과제의 수행 결과를 AI가 자동으로 채점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용자가 이해하기 쉬운 결과 보고서를 제공한다.
김 매니저는 향후 협업 확대 가능성에 대해 “일상 관리 서비스인 ‘실비아 웰니스’까지 연계하는 협력 모델을 함께 검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오민선 기자> omsoms94@byline.networ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