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스타트업, 글로벌에서 통해도 한국 규제엔 막힌다”
국회에 ‘유니콘팜’이란 단체가 있다. 스타트업의 목소리를 듣고, 가능하다면 이들이 원하는 바를 법으로 만들거나, 혹은 규제를 없애는데 힘을 보태겠단 취지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국회 토론회’ 형식으로 스타트업 대표를 초청, 목소리를 듣는 행사를 종종 여는데, 16일 열린 토론은 그 현장을 아예 경기도 정자동에 있는 스타트업으로 정했다. 국회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난상토론의 좋은 점은, 이렇게 행사를 하니까 그 바쁜 국회의원들이 ‘다른 일정’을 핑계 삼아 도망가지 못하고 집중해 의견을 나눈다.
스타트업 이익단체 코리아스타트업포럼과 유니콘팜이 공동 주최한 현장 간담회에 네 명의 스타트업 대표와 여섯 명의 국회의원이 자리했다. 스타트업에선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 이한빈 서울로보틱스 대표, 정민찬 큐빅 대표, 최재화 번개장터 대표가, 국회 유니콘팜에선 김한규, 장철민, 김성회, 박민규(더불어민주당), 이해민(조국혁신당), 고동진(국민의힘) 의원이 참여했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 한상우 의장과 최지영 상임이사도 배석했다.
스타트업이 겪고 있는 고충 중 입법으로 풀 수 있는 것을 토로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인 만큼, 참여 대표들이 무엇을 의원들에게 건의했는지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외국인 투자자가 한국 증권계좌 만들려면 6개월, 누가 투자하겠나”
“해외 투자자가 한국 증권 계좌를 만드는 데 6개월이 걸렸습니다. 50장 이상의 서류를 제출 해야 했고, 서류를 제출하면 ‘업데이트 되었다’며 서류를 재작성 해야 할 일도 잦았습니다. 심지어 홍콩에 있던 투자자가 직접 서울까지 와서 서류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증권 계좌 하나를 만드는 데 6개월이나 걸리고, 한국으로 오라가라 하고. 외국인이 ‘굳이 한국에 투자할 이유가 없다’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저라도 실리콘밸리에 투자하겠어요” 이한빈 서울로보틱스 대표
다른 스타트업 대표들도, 유니콘팜 의원들도 이한빈 서울로보틱스 대표의 말에 적극 공감했다. 서울로보틱스는 현재 국내 코스닥 상장을 준비 중이다. 그런데, 이 회사는 이미 글로벌 투자자로부터 상당액의 투자를 받은 곳이다. 매출도 대부분을 해외에서 내고 있다. 상장을 앞두고, 이들 투자자의 지분을 보통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해외 투자자의 한국 증권 계좌를 만들 필요가 생겼다. 문제는, 그 과정이 굉장히 지난하고 어렵다는 것이다. 심지어 외국인은 온라인으로 증권 계좌를 만들 수 없어 한국에 직접 찾아와야 한다.
“같은 금액을 투자받아도 원화로 처리하다 보니 환율에 따라 투자자 지분율이 달라집니다. 외국인으로부터 투자를 받겠다고 신고하고 나면 정해진 시간 내 투자 계약 도장을 찍어야 하는데, 불편함이 있습니다”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
투자를 받을 때 달러를 원화로 바꿔야 하는 부분도 지적됐다. 이 문제는 현재 개정에 돌입했으나. 스타트업이 체감할 만큼 빠르게 고쳐지고 있진 않다.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는 “투자자도, 기업도 모두 불편한데, 이 단순한 문제조차 수년째 고쳐지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합성데이터, 글로벌 VC는 인정했는데 한국은 막혀”
“해외 VC들은 ‘드디어 찾았다’며 투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선 합성데이터를 개인정보인지 아닌지조차 명확히 규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글로벌에서는 기술로 인정받는데, 국내에서는 법에 막혀 활용조차 못 하는 상황입니다.” 정민찬 큐빅 대표
합성데이터 기업 큐빅의 정민찬 대표는 데이터 규제에 막혀 성장이 더딘 현실을 지적했다. 합성데이터는 개인정보를 포함하지 않고도 실제와 유사한 데이터셋을 만드는 기술이다. 의료·금융 등 민감 데이터 활용을 대체할 수 있는 해법이지만, 한국에서는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기준에 가로막혀 있다.
정 대표는 “합성데이터 특례법이 필요하다”며, AI 혁신이 데이터 규제에 갇히지 않도록 정치권이 나서달라고 주문했다.
“중고거래도 수출이다, 그런데 세제는 제자리”
“자동차와 스마트폰만 부가세 환급을 받을 수 있는 게 현실입니다. 다른 중고품은 아무리 해외로 팔려나가도 세제 혜택이 없습니다. 글로벌 이커머스 기업과 경쟁하려면 제도적 뒷받침이 절실합니다.” 최재화 번개장터 대표
최재화 번개장터 대표는 중고거래 플랫폼이 더 이상 국내 소비자끼리의 거래에 머물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번개장터는 역직구를 통해 해외 소비자에게 물건을 판매하고 있다. K팝과 콘텐츠의 인기로 국내 상품을 찾는 외국인도 많이 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제도는 여전히 ‘중고품은 수출이 아니다’라는 관점에 묶여 있다.
그는 “글로벌에서는 ‘다음 아마존’이 중고거래에서 나올 수 있다고 말한다”며, 한국 스타트업이 그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역직구 세제 개편이 필요하다고 거듭 호소했다.
기술특례상장, 현실적 어려움 반영해달라
“현재 자율주행 솔루션으로 수출을 하고 있고, 우리가 세계에서 처음 (기술 상업화에) 성공했기 때문에 (상장 평가를 위한 비교항목 분석에) 경쟁사를 넣기 어려운 상황이 있습니다.” 이한빈 서울로보틱스 대표
서울로보틱스가 현재 상장을 준비 중인 만큼, 이한빈 대표는 스타트업이 기술특례상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털어놨다. 스타트업은 새로운 영역, 처음 만들어내는 시장에 진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경쟁사의 데이터를 제출하라고 요구하는 것 등에 현실적 한계가 있다고 이 대표는 지적했다.
“스타트업을 생태계 플레이어로 인정하지 않는 것 아닌가”
“저희는 (기업가치) 6000조원 짜리 엔비디아와 경쟁하고 있어서, 대한민국 현대차가 (정부 지원으로) 커왔듯, (정부에) 도와달라고 하는게 부끄럽지 않습니다. 리턴백(나라에 기여) 할 거니까요. 그런데, (정부 지원의) 채널이 없습니다. 산업부는 몇백조 짜리 회사가 돼야 케어해주고, 1조원 미만은 중기부가 케어합니다. 그 가운데, 1조~5조원 정도 되는 규모의 회사는 해외자본이 케어하는 이상한 (구조가) 되어버렸습니다.”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
정부 정책도 스타트업의 글로벌 진출을 장려한다. 어느 정도 규모가 생기면, 스타트업들은 해외 투자를 유치하고, 제품과 서비스 판로 개척을 위해 해외 문을 두드린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빅테크와 맞붙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에선 ‘외국인 투자자 증권 계좌 개설의 어려움’ ‘투자금의 환전 문제’처럼, 다소 사소해보이는 것조차 수년째 고쳐지지 않고 있다.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는 이런 문제의 원인이 정부 정책을 만들고 시행하는 정치권에서 “스타트업을 (경제 성장의) 파트너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봤다. 또, 각 정부부처도 스케일업 하는 스타트업의 현실적 고충을 적극 케어하러 나서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빅테크와 경쟁을 장려하면서도, 정부 정책이나 지원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박 대표는 “(스타트업은) 이미 (경제 성장의) 플레이어로 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책하는 분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서 “스타트업을 정말 AI 시대 혁신을 가져갈 주체 중 하나로 과연 봐주는 걸까란 생각이 들었다”고 그간 경영 일선에서 가졌던 아쉬움을 말했다. 그는 또 “스타트업을 삼성·SK 같은 항공모함에 비할 순 없지만, 혁신의 최전선에 있다는 건 분명하다”며 “정치권이 스타트업을 생태계의 ‘핵심 플레이어’로 인정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와 관련해 유니콘팜 공동대표인 김한규 의원은 “스타트업이 한국 경제 성장에 지대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각인시키고, 해외 투자 유치 과정에서도 균형 있는 제도 설계를 통해 글로벌 스케일업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철민 의원은 “유니콘팜과 코스포가 협력해 스타트업의 정책 과제와 해결 과정을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자”고도 제안했으며, 박민규 의원은 “국부펀드 등을 활용해 국내 스타트업에 투자할 수 있게 하는 등 지원책도 고려해 봐야한다”고 말했다. 이해민 의원은 “스타트업을 국가 성장 동력으로 인정하고 성장 단계별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상우 코스포 의장은 토론을 마무리하며 “스타트업은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 환경에서 스스로 성장해 나가야 하며, 정부 차원에서 기술·제품 도입과 투자 지원을 현실적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