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석의 입장] 넷플릿스의 비전 프로 거부가 시사하는 것
최근 넷플릭스는 애플의 가상/증강현실(VR/AR) 헤드셋인 ‘비전 프로’를 위한 앱을 만들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기존의 아이패드 앱도 비전 프로에서 작동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비전 프로에서 넷플릭스 콘텐츠를 보려면 웹브라우저를 통해 Netflix.com에 접속해야 한다. 웹브라우저를 통해 콘텐츠는 볼 수는 있지만, 당연히 사용자 경험은 떨어질 것이다. 예를 들어 비행기에서 비전 프로로 넷플릭스를 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비전 프로를 거부한 콘텐츠 업체는 넷플릭스 만이 아니다. 유튜브나 스포티파이도 비전 프로 앱을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비전 프로를 스마트폰-태블릿PC 이후의 새로운 컴퓨팅 플랫폼으로 만들겠다는 애플의 야심이 초기부터 삐걱거리는 느낌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비전 프로가 거대한 스크린을 제공하는 개인용 영화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비전 프로를 이용하면 압도적인 몰입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특히 온가족이 거실에 모여 TV로 같은 콘텐츠를 즐기는 시대가 지났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으로 각자 좋아하는 콘텐츠를 시청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전 프로를 이용하면 훨씬 풍부한 경험으로 개인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애플 역시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 시청하는 이용자가 비전 프로의 최우선 고객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킬러 콘텐츠를 공급하는 넷플릭스를 비롯해 콘텐츠 업계가 비전 프로 앱을 만들지 않으면 애플의 계획은 좀 틀어진다. 넷플릭스에 이용자들이 좋아하는 콘텐츠가 가장 많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입장에서도 가입자들이 보다 몰입감 있는 디스플레이를 통해 자사 콘텐츠를 감상하면 만족도가 더욱 높아질 것이었다. 그러나 넷플릭스는 비전 프로를 거부했다.
넷플릭스는 비전 프로 앱을 개발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사용자 기반이 충분치 않아서”라고 밝혔다. 이용자가 많지 않으니 굳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전용 앱을 개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넷플릭스 입장에서 보면 비전 프로를 통해 얻을 당장의 혜택이 없다. 아직 이용자가 적은 상황에서 비전 프로 덕분에 신규 가입자가 갑자기 늘어날 것도 아니다.
반대로 비전 프로가 대성공을 거두면 넷플릭스는 골치 아파진다. 비전 프로가 확산되면 넷플릭스는 앱을 만들지 않을 수 없고, 앱스토어 수수료 문제로 또다시 애플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 현재 넷플릭스는 앱에서 가입할 수 없도록 해놨다. 앱스토어를 통해 가입하면 막대한 수수료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애플은 넷플릭스로부터 수수료를 받기 위해 다양한 압박을 하고 있지만 넷플릭스는 굴하지 않았다. 결국 넷플릭스는 애플의 생태계가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게 된다.
이는 애플이 지금까지 보여준 강경한 태도에 기인한다. 애플은 플랫폼 파워를 이용해 생태계 공급자에게 막대한 수수료를 받아왔다. 미국 대법원이 복수의 결제시스템을 제공하라고 판결한 이후 다른 결제 시스템을 이용하는 경우데도 12~27%의 수수료를 받는다. 심지어 유럽에서는 앱스토어로 배포되지 않은 앱에도 수수료를 받겠다고 선언했다. 생태계 참여자들이 애플에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셈이다.
이같은 태도를 취하는 플랫폼은 애플만이 아니다. 플랫폼 비즈니스는 참여자가 많을수록 가치가 거치는 네트워크 효과 덕분에 성공을 거두면 대부분 독점화된다. 한 번 들어간 플랫폼 생태계에서 빠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플랫폼 업체들은 성공을 거둔 이후 파트너를 향해 애플처럼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또 대부분의 플랫폼은 양면시장을 중개하는 역할을 넘어 스스로 공급자가 되기를 탐한다. 이커머스 플랫폼에서 PB상품을 만드는 것이 대표적이다. 거래의 장을 만들어 준다고 해서 들어갔더니 플랫폼이 경쟁자가 되는 것이다. 이미 플랫폼 내 공급자는 독점화된 플랫폼에서 빠질 수도 없기 때문에 경쟁자가 된 플랫폼과 울며 겨자먹기로 싸우게 된다.
이러니 이제 많은 이들은 플랫폼에 한 번 발을 잘못 들이면 큰일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되도록 플랫폼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그럼에도 플랫폼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제 공급자들은 어떻게든 플랫폼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과거에는 플랫폼에 가장 먼저 들어가서 선점효과를 누리는 것을 희망했었다. 그런 점에서 플랫폼 비즈니스는 이제 신뢰를 잃었다. 누구도 플랫폼이 양면시장을 중개하는 공정한 시장이 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넷플릭스가 비전 프로를 거부했듯, 신뢰를 잃은 플랫폼 비즈니스는 앞으로 점차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심재석 기자>shimsky@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