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5년 만에 가본 롤드컵, ‘추억 보정’ 그 이상
‘2023 리그오브레전드 월드 챔피언십(롤드컵)’이 지난 19일 서울시 구로구 고척 스카이돔에서 성대한 막을 올렸습니다. 리그오브레전드(League of Legends, LoL·롤)를 개발 서비스하고 있는 라이엇게임즈는 매년 세계 각지에서 롤드컵을 개최하는데요. 올해 개최지는 서울로 낙점됐네요. 5년 만에 한국에서 열렸습니다.
5년 전 인천시 미추홀구 문학주경기장에서 열린 롤드컵도 갔었는데요. 그때도 현장 분위기가 대단했습니다. 가상 캐릭터를 화면에 띄워 실제 가수들과 합동 공연을 하는 첫 시도에 나서 엄청난 화제가 됐고요. 결승전 관람 열기도 후끈했네요.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데요.

그러나 2023 롤드컵을 보고 나선 생각이 달라졌네요. 인터넷에서 흔히 쓰는 용어로 ‘추억 보정’이라고 하죠. 과거에 벌어진 어떠한 일이나 상황 등 경험이 추억 속에서 좋게 보정(포장)되거나 과대평가하는 현상을 일컫는데요. 이러한 2018년 롤드컵의 추억 보정을 감안해도 2023 롤드컵이 압도적입니다.

다국전 팬 집결…가상과 현실 오가는 공연 더욱 환상적
19일 오후 고척 스카이돔 근처 지하철 1호선 구일역과 경기장 주변엔 다국적 팬들이 집결했습니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역 근처에 위치한 라이엇스토어에서 구매 대기열이 길게 늘어서기도 했고요. 경기장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남기는 팬들이 심심찮게 보였습니다. 경기장을 빙 둘러가며 입장을 앞둔 관람객들의 얼굴엔 기대감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롤드컵 오프라인의 열기는 예상된 바 있습니다. 고척 스카이돔의 1만8000여석은 지난 8월 예매 시작 10분 만에 매진됐습니다. 롤드컵 개최일이 다가오자 암표 매매도 횡행했고요. 연석 2좌석 기준 500만원에 거래 글이 올라오기도 했네요. 최고가 티켓 가격이 24만원대인데, 무려 10배가 뛰어올랐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1좌석 기준 470만원 글도 보이네요. 실제 거래가 이뤄졌는지는 확인 못했습니다만, 이 정도로 관람 열기가 뜨거웠다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고척 스카이돔 외 광화문 광장에서도, 전국 43개 CGV 지점에서 2만여명이 집결해 롤드컵 응원이 이뤄지는 등 전국적 응원이 이뤄졌습니다.

가상과 실제 캐릭터 간 합동 공연은 더욱 발전했습니다. 고척 스카이돔 결승전 공연엔 엑소(EXO) 백현이 참여한 가상 아이돌 ‘하트스틸’과 뉴진스가 등장해 무대를 꾸몄네요. 초대형 화면에 띄운 광활한 가상 배경에 캐릭터를 띄우는 등 가상과 현실을 오가는 공연으로 눈이 즐거웠네요.
결승전서 일방적 경기 ‘T1 압승’
한국 T1과 중국 웨이보 게이밍(WBG) 간 결승 경기는 T1의 압승이었습니다. 내심 공방을 주고받는 모습을 기대했으나, WBG가 이렇다 할 승기를 잡았던 순간이 없네요. 1세트 초반은 팽팽한 흐름이 이어졌으나, 교전 때마다 T1이 점수를 가져오면서 흐름을 바꿨습니다. ‘제우스’ 최우제 선수의 활약이 컸네요. 30분 만에 승리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2세트 3세트도 큰 위기 없이 승리를 챙겼네요.

결승전에서도 상대를 압도하는 T1의 신들린 협동 플레이를 보며 해설진은 연신 “미친 플레이”라며 추켜세웠네요. 마지막 3세트에선 페이커 이상혁 등이 후반 교전에게 계속해서 킬을 올리며 승기를 굳혔고 WBG 적진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 넥서스를 무너뜨렸습니다.
이날 ‘페이커’ 이상혁 선수는 프로 선수 중 유일무이한 ‘4회 롤드컵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달성했습니다. 같은 팀인 ‘제우스’ 최우제, ‘오너’ 문현준, ‘구마유시’ 이민형, ‘케리아’ 류민석은 첫 우승컵을 들어올렸네요.

후회는 없다지만…양 감독의 한 마디
결승전 이후 기자회견은 WSB부터 먼저 진행됐네요. 중국 LPL에서 꾸준히 활동하는 ‘더샤이’ 강승록 선수에게 질문이 쏠렸네요. 더샤이는 “오늘 결과를 받아들인다. 후회는 없다”고 답했으나, 현장에서 봤을 땐 사실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WBG 기자회견 전체 분위기가 가라앉았다고 해야 할까요. T1의 무지막지한 경기력을 접한 뒤라서 그런지 전반적인 분위기가 무기력한 느낌까지도 들었습니다.
더샤이 선수는 올해 본인의 평가에 대해선 “마지막 경기에서 패배는 아쉽다. 3세트 심리전에서 생각 없이 해볼까 이런 생각에 해봤으면 이겼을 텐데 그 부분이 좀 아쉽지 않나”라며 복기했습니다. MVP를 수상한 제우스 선수에 대해선 “더 잘할 수 있는 선수”라고 응원을 보냈네요.
이날 WBG 양대인 감독의 발언이 이목을 끌었네요. 페이커와 통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힌 것을 두고 ‘무슨 얘기가 오갔나’라는 질문에 상당히 긴 답변을 내놨습니다. 양 감독은 뜬금없이 T1 감독 재직 시절 나온 이유를 언급했습니다. 그는 “나오는 과정이 원활하지 못했고, 일을 하는 동안에서 원활하지 못했다”면서 “그래서 WBG에 감사하죠. 진짜 전권을 준 팀”이라며 앙금이 남은 모습을 보였네요. 결과적으로 T1에 대해 “얼마 전 경기부터 보면서 정말 엄청나다는 걸 느꼈고, 잘 하고 있어서 어쨌든 너무 멋지다”라고 마무리했습니다. 다만 중간 멘트가 ‘자신의 전략을 T1에 소개했으나, 당시엔 선수들 적응이 어려웠고 지금은 대단히 잘해주고 있다’ 정도로 갈음하면서 아쉬운 마음을 전달했네요.

‘여유만만’ T1, 페이커에 질문세례
T1 선수들이 들어오자, 회견장 분위기도 확 달라지더군요. 만면에 우승팀 다운 여유로운 표정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 중 페이커 이상혁 선수는 표정에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표정에 가까웠네요. ‘케리어’ 류민석 선수 표정에선 벅찬 감정과 울음기도 엿보였네요.
페이커 선수는 시종일관 팀과 팬들에 우승 이유를 돌리고 감사함을 표했네요. ‘배울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발언도 자주했네요. 그가 아시안게임 금메달도 획득했고, 롤드컵 챔피언에 네 차례나 올라 이제 ‘은퇴를 생각하냐’는 질문에 “(T1에) 계약된 신분이라 일을 할 것 같고요. 스스로 성장도 많이 하면서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저는 흔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은 기간 동안 열심히 하면서 은퇴 계획은 후에 세울 것 같습니다”라며 경기에서 더 배우겠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또 ‘롤드컵 네 번 우승이 가능했던 이유가 남다른 신념이 아닌가’라는 질문엔 “많은 것들을 배우고자 했고 그런 자세가 있다면 저는 충분히 우승은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다”며 “이번에 운 좋게 우승이 따라와서 굉장히 좋은 경험을 할 수 있게 됐고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페이커다운 답변이네요.
페이커는 “개인적 목표는 3대0으로 패배했을 때도 웃을 수 있는 마인드셋으로 경기를 했고, 실제 우승을 했음에도 그렇게 기쁘거나 감정의 동요가 없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였다”면서 “그런 과정이 저는 즐겁고 좋은 결과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고 범인을 뛰어넘은 최고수다운 면모를 보였네요.
‘오너’ 문현준 선수는 서머 시즌 부진을 털고 결승전에서 활약을 보였던 이유에 대해 “스포츠가 못할 때도 잘할 때도 있기 때문에, 못할 때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했고 포기하지 않았던 게 제일 크지 않았나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이대호 기자>ldhdd@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