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반도체] 재고 소진 과제로…다음은 ‘하이엔드 라인업’ 재편

반도체 불황이다, 불황이다 하더니 진짜로 주요 기업이 직격탄을 맞아버렸습니다. 국내외 주요 반도체 기업의 2022년 4분기 실적이 속속 공개되고 있는데요. 대부분 기업이 매출과 영업이익 하락세를 보였습니다. 어느 기업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실적 우상향’에 혈안이 돼 있는 삼성전자가 역성장을 하고, SK하이닉스가 10년 만에 적자전환을 했다는 사실은 업계에 적잖은 충격을 줬죠. 올해 1분기는 더 저조한 실적 성적표를 받아들 것으로 예상됩니다.

해외 기업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인텔은 2022년 4분기 최악의 실적을 기록하면서 전 직원 급여를 삭감했다고 밝혔습니다. 인텔 수장인 팻 겔싱어(Pat Gelsinger) CEO도 기본급을 25% 줄였다고 하죠. 그나마 AMD가 컨센서스(시장 전망치)를 상회하면서 비교적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긴 합니다만, 1분기에는 매출이 10% 감소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전망이 지배적입니다.

그래도 주요 기업은 하반기부터는 시장 상황이 회복하고 실적도 반등할 수 있다고 희망을 가지는 분위기입니다. 조금씩 세부 전략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파악한 시장 흐름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번 인사이드 반도체에서는 현재 반도체 업계에 주어진 가장 큰 과제가 무엇이며 다음 스텝은 어떻게 밟아갈 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생존의 핵심은 재고소진

일단 모든 기업이 현재 안고 있는 가장 큰 과제는 ‘재고 털어내기’입니다. 지난 해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반도체 수요는 하락했고, 결국 같은 3분기 각 반도체 기업의 재고 수치는 10년 만에 최대치를 찍었죠. 재고가 많으면 제품 가격은 하락하게 되는데요, 특히 반도체 업계에서는 그 등락폭이 더 큽니다. 이는 고스란히 실적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재고 여부가 기업 실적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지난 4분기 인텔과 AMD의 실적이 극명하게 갈린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인텔은 7억달러(약 8575억원)의 손실을 내면서 역대 최악의 실적을 선보였습니다. AMD는 영업손실 1억4900만달러(약 1825억원)를 기록하면서 적자전환을 했지만, 그래도 시장 전망치보다는 높았죠.

AMD가 그나마 선방한 것처럼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미 지난 3분기에 최악의 시기를 지났기 때문입니다. 당시 AMD는 매출 55억6500만달러(약 7조8900억원), 영업이익 6600만달러(약 935억원)를 기록했습니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29% 올랐지만 영업이익은 93% 줄어든 수치죠. 결국 AMD는 이 때부터 재고 정리에 팔을 걷어 붙였습니다. 반면 인텔은 4분기부터 재고 정리에 들어가면서 이번에 직격탄을 맞은 것이고요.

익명을 요청한 한 반도체 시장 전문가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인텔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업이 재고를 털어내기 시작했는데, 현재 AMD는 GPU를 거의 털어낸 것으로 알려졌다”고 말했습니다.

SK하이닉스도 마찬가지로 재고를 소진하기 위해 지난 3분기부터 감산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SK하이닉스 측은 3분기 실적발표에서 “재고 수준이 평균 대비 높고 1분기에 재고 수준이 피크를 찍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수익성이 낮은 제품부터 웨이퍼 투입을 재검토하고 있다”며 “더불어 팹 효율성 증가를 위한 장비 재배치 등 여러 시나리오를 적용해 미래 효율성을 올리지만 단기적으로는 감산에 준하는 효과를 가져오도록 할 것”이라고 설명했죠.

인위적 감산 없다”는 삼성, 사실상 감산 맞다

그런데 재고 소진을 단행하는 여러 기업 사이 유일하게 “인위적 감산은 안 한다”고 외친 기업이 있습니다. 바로 삼성전자입니다. SK하이닉스와 미국 메모리 제조업체 마이크론이 감산을 단행하는 와중에도, 삼성전자는 웨이퍼 투입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감산을 단행하지 않겠다고 두 차례의 실적발표에 걸쳐 선언했습니다.

삼성전자가 인위적 감산을 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120조원이라는 자금력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감산을 단행한다는 말은 그만큼 제품을 적게 납품한다는 의미이고, 이는 곧 시장점유율 하락으로 이어지거든요. 타 기업은 재고를 털어야 수익성을 다시 높일 수 있다는 것을 바라보고, 고육지책으로 감산을 단행했습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약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자금력이 되니 이 때를 기회로 삼아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겠다는 겁니다.

삼성전자는 지난 반도체 하락사이클 때에도 유일하게 감산을 단행하지 않았던 기업이기도 합니다. 반도체 불황이 꽤 심각했던 2008년과 2018년에도 삼성전자 측은 “인위적 감산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비쳤습니다. 타 기업이 감산을 단행하면서 결국 최종 승자는 삼성전자가 됐다는 언론 보도도 당시에 다수 나왔었고요. 삼성전자는 하락사이클을 잘만 버티면 장기적으로 더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오랜 기간에 걸쳐 습득하게 됐죠. 따라서 삼성전자는 이번에도 감산은 없다고 선언할 수 있었죠.

그렇다고 삼성전자가 완전히 감산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삼성전자는 웨이퍼를 투입하는 등 감산을 위해 인위적으로 조치를 취하지는 않겠지만, 장비를 재배치하거나 시설 투자 규모를 늘리지 않는 등 자연스럽게 감산이 일어날 수 있는 방안은 마련할 전망입니다.

이는 삼성전자의 4분기 실적발표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 측은 “캐펙스(CAPEX) 투자를 전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캐펙스란 자본적 지출로, 반도체 업계에서는 설비 투자 비용의 뜻으로 주로 쓰입니다. 늘리지 않고 유지하겠다고 한 것이죠.

삼성전자의 캐펙스 변화 추이

삼성전자는 2018년부터 꾸준히 시설 투자 금액을 올려 왔습니다. 2019년 22조6000억원에서 2022년에는 53조1000억원까지 그 규모를 늘려 나갔죠. 그런데 시설 투자 금액을 올해에 더 늘리지 않는다는 말은 나름의 긴축인 셈입니다. 현재 삼성전자는 평택과 미국 테일러시에 공장을 건설하고 있어 설비에 더 많은 비용이 들 텐데, 이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투자를 줄인 것과 다름없다고 볼 수 있겠죠. 결국 모든 기업이 ‘재고 털기’에 혈안이 돼 있음은 부인할 수 없게 됐네요.

 

재고 소진 다음은 ‘고성능 중심의 제품군 편성’

재고를 다 털어낸 후에 각 기업이 해야 할 일은 하이엔드 중심으로 제품군을 구성하는 겁니다. 중장기적으로 AI, 5G 등 첨단 기술의 발전으로 고성능 반도체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PC와 스마트폰 수요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저조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입니다. 증권가에서는 올해 PC 시장이 전년 대비 10% 정도 더 줄어들 수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스마트폰 시장은 지난 해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소비가 줄어들어 바닥을 찍었기 때문에 올해에는 소폭 반등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반도체 기업의 드라마틱한 실적 성장을 이끌 정도는 아닐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지만 첨단 기술, 특히 AI와 서버⋅데이터센터를 위한 고성능 반도체 수요는 중장기적으로 상승세를 보일 전망입니다. AI는 대량의 데이터를 학습해 특성을 파악한 후 알맞은 결과를 추론해 내는 방식으로 구동이 되죠. 여기에는 거대한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한 고용량의 메모리와 입력된 방대한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고성능의 중앙처리장치(CPU)도 필요합니다. 그 가운데 챗GPT와 생성AI가 급부상하고 있는데요, 이는 곧 관련 부품 수요도 늘어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주요 반도체 기업도 하반기에는 고성능 제품군을 중심으로 반도체 업황이 반등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먼저 삼성전자는 “AI 기술에는 대량 연산이 가능한 고성능 프로세서와 이를 지원하는 메모리 조합이 필수적인데, 관련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2023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고성능⋅고용량 DDR5, LPDDR5 기술을 고도화하겠다”고 말했습니다.

SK하이닉스도 마찬가지로 고성능⋅고용량 메모리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감산을 단행한다고 하면서도 고부가가치 제품에 대한 투자는 이어가겠다고 밝혔거든요. 회사 측은 “2023년 중반에는 5세대 D램(1b)과 차세대 낸드플래시 238단 생산 준비를 완료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모두 고성능 제품이죠.

인텔, AMD 등 기업도 고성능 중심의 제품으로 라인업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AMD는 지난 해 11월 서버용 4세대 에픽(EPYC) 프로세서를 출시했고, 인텔은 올해 1월 차세대 서버용 CPU 사파이어 래피즈를 출시했죠. 앞서 언급한 전문가는 “지난 하반기부터 인텔과 AMD는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물량을 소진한 후, 고성능 제품으로 재고를 교체하려는 모습을 보여 왔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반도체 업황은 반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성능 제품을 중심으로 말이죠. 주요 기업도 이를 인지하고 상황에 맞춰 중장기적인 수요 대응을 준비하는 중이고요. 올해 하반기에는 반도체 시장이 얼마나 반등할 지, 각 기업이 어떤 성적표를 받게 될 지 주목됩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배유미 기자>youme@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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