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반도체]과거 영광 되찾을까…팔 걷은 일본
일본에 반도체 경쟁력 강화에 팔을 걷어 붙였습니다. 니혼게이자이 등 외신은 13일 일본 주요 8개 기업이 반도체 회사를 공동 설립한다고 보도했습니다. 설립에 참여하는 기업은 ▲도요타 ▲키옥시아 ▲소니 ▲NTT ▲소프트뱅크 ▲NEC ▲덴소 ▲미쓰비시UFJ입니다. 회사명은 래피더스(Rapidus), 빠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죠.
여기에 일본 정부는 700억엔(약 6700억원)을 투자한다고도 밝혔습니다. 니시무라 야스토시 경제산업장은 “반도체는 AI, 디지털 산업, 헬스케어 등 첨단 신기술 개발에 중요한 요소”라며 “래피더스는 2027년 2나노 공정 반도체를 양산하고, 2030년에는 본격적으로 파운드리 사업에 진입하겠다”는 포부를 내비쳤습니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일본이 반도체 산업 재건을 위해 힘을 쏟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반도체 자국중심주의가 심화되면서 국가 차원의 자체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해졌을 뿐만 아니라, 일본 반도체 경쟁력이 꽤 약화됐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었거든요. 이번 인사이드 반도체에서는 일본 반도체 산업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살펴보고, 추후 전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일본 반도체의 성장과 하락
약 30년 전에는 일본이 반도체 시장에서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1990년대까지는 세계 반도체 상위권에 NEC, 도시바, 히타치 등 일본 기업이 빠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당시 1~3위를 일본 기업이 차지했고, 4위가 인텔이었으니 그 경쟁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죠. 특히 일본은 정부 지원에 힘입어 메모리, 그 중 D램 부문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품질제일주의를 내세운 장인정신으로 반도체 산업을 이어갔습니다. 매우 정교하고, 꼼꼼하고 오래 사용할 수 있는 반도체를 만드는 것을 주요 전략으로 삼았죠. D램의 개별 회로를 최고의 품질로 만들고자 했고, 장비도 여러 종류를 도입해 더욱 섬세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죠. 반도체뿐만 아니라 일본 산업 전반이 이 같은 품질제일주의를 내세우고 있죠.
얼핏 들어보면 좋아 보일 수 있지만, 메모리 부문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러 종류의 장비를 사용하다 보니 제조 기간이 늘어납니다. 공정을 미세화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바꿔야 하는 시스템도 더 많았고요. 한 번 공정을 개선하는 데 투입해야 하는 비용이 더 많이 드는 겁니다. 이는 반도체 비용을 높이는 방식으로 메워야 했죠.
그 가운데 삼성전자는 1983년 일본 반도체 산업을 따라잡겠다는 ‘도쿄 선언’을 했습니다. 그렇게 1985년부터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기 시작했죠. 당시 삼성전자가 취한 전략은 ‘가격 경쟁력과 생산성 확보’였는데요, 일본 메모리 시장을 따라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일본 반도체 시장은 조금씩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고요.
결정적으로 미국이 일본 반도체 시장을 견제하면서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40대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on) 행정부 당시 미국은 자국 반도체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 정부에 통상압박을 가합니다.
미국은 ▲정부 차원의 저가 공세를 금지 ▲자국 내 메모리 반도체 내수시장 20% 이상을 외국기업이 점유하도록 할 것 ▲외국 반도체 기업의 대일본 직접투자 허용 등을 담은 미일반도체협정을 체결하도록 했습니다. 일본은 불리한 조항이었지만, 압박에 이기지 못해 결국 해당 협정에 서명하게 됐습니다. 현재 미국이 중국에 가하고 있는 압박이랑 비슷한 양상이라 볼 수 있겠죠. 이 같은 여러 상황이 맞물려 일본은 반도체 산업에서 점차 도태되기 시작했습니다.
반도체 왕국 재건 꿈꾸는 일본, 잘 될까
하지만 일본이 경쟁력을 완전히 잃었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한 글로벌 주요 반도체 업체 관계자는 “일본 반도체 산업이 많이 하락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소재나 장비 측면에서는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며 “반도체 산업이 소재⋅부품⋅장비 산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일본이 저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일본 반도체 산업이 몰락할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과거에는 반도체 시장을 메모리 산업이 주도했지만, 지금은 스마트폰, PC외에도 IoT, 자율주행 등 다양한 기술 발전으로 시스템 반도체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거든요. 그 과정에서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역량 강화도 필요한 상황입니다.
일본은 자국 내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개선해야 할 부분이 제조 역량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일본에는 내로라할 파운드리 기업이 없거든요. 따라서 지난 2021년 6월 일본 경제산업성은 파운드리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을 공개했습니다. 이는 해외 파운드리를 유치해 자국 반도체 소재⋅장비 강점과 결합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합니다.
그 일환으로 일본은 대만 파운드리 TSMC 생산라인을 자국 내 유치했죠. TSMC는 일본 정부 보조금과 소니, 덴소 등 기업으로부터 출자한 자금을 통해 구마모토현에 공장을 생산하기로 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TSMC에 최대 4760억엔(약 4조5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는데요,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서라도 반도체 공급망을 강화할 필요성이 있음을 드러낸 대목이죠.
래피더스 설립도 일본 반도체 제조역량 강화를 위한 정부 차원의 전략 중 하나로 볼 수 있겠죠. 로이터통신은 한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일본 정부는 앞으로 수십억 달러를 더 투자할 예정”이라며 “미국 컴퓨팅 업체 IBM과 네덜란드 반도체 제조업체 ASML 등 핵심 업체를 래피더스 설립에 끌어들이려는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고 보도했습니다.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이 깊어지면서, 일본은 반도체 제조 역량 강화를 지속할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 정부는 외국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자국 내에 공장을 짓도록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겠다고도 했죠.
더불어 12월에는 미국과 공동 연구개발을 위한 거점을 정비하겠다는 계획도 밝혔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으로부터 노하우를 터득하고, 반도체 산업을 활성화하겠다는 것이지요.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일본은 기술유출 방지에 유념하는 한편, 미국⋅대만을 비롯한 동맹국과 협력 체제를 강화해 반도체 산업을 영위할 예정”이라고 했는데요, 일본 정부는 자체 지원 정책과 주변국의 기술력의 시너지를 기대하는 분위기입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일본이 반도체 경쟁력 강화에 힘쓰면서도 미국 눈치는 계속 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아무래도 미국에 대항했다 한 번 데어본 경험이 있으니까요. 한 반도체 시장 전문가는 “미국은 자국 중심으로 반도체 산업을 재편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다”며 “지금은 그 대상이 중국이지만, 언제든 미국에 위협이 된다고 느낀다면 어느 나라든 견제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배유미 기자>youme@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