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정부는 미국이 TSMC에 기밀을 요구했을 때 거절했는데, 우리나라는 명확하게 거절하지 못했다”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이 지난 5일 열린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 발언이다. 조 의원 뿐만이 아니다. 다수 위원이 국감에서 미국 정부의 압박에 우리 정부가 안일하게 대처한다고 질타했다.

사태의 시초는 미국 정부의 발표다. 백악관과 상무부는 지난 9월 말, 반도체 기업과 화상회의를 갖고 “45일 내로 재고, 주문, 판매 정보를 제출하라”고 요청했다. 회의에 참석한 기업 중에는 삼성전자도 있다.  재고, 주문, 판매 정보는 영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므로 반도체 기업은 해당 정보를 극비에 부쳐왔다.

각 기업은 미국 정부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미국 상무부는 정보 공개 요청에 응하지 않는 기업에는 군수조달 목적의 국방물자생산법(DPA)를 근거로 강제조치에 나설 것이라고도 압박했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SK하이닉스 같은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난처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국감에서 정부의 역할을 지적한 이유다.

더불어민주당 이성만 의원도 “미국이 국방물자생산법을 근거로 억압할 것이라고 이야기한 만큼, 이번 사안은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닌 국가 차원에서 나서야 할 문제”라며 “정부의 능동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국회의 질타와는 별개로 현장에서는 정부가 사태 해결을 위해 나설 수 있는 부분은 적을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국내 반도체 기업의 생산 인프라 구축 현황이나, 외교적 상황을 고려하면 정부가 직접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이번 국감에서 조정훈 의원 등은 TSMC와 대만을 예로 들어 우리 정부가 미국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조 의원은 “미국이 반도체 수급난을 겪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기업을 압박하고 나선 것인데, 산업부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 같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TSMC와 삼성전자가 처한 상황은 다르다. TSMC는 세계 파운드리 시장점유율 1위 업체다. 대부분의 미국 팹리스 기업의 반도체를 위탁생산한다. 따라서 미국은 TSMC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설령 미국이 TSMC와 교류를 끊는다 해도, TSMC는 중국과 다시 손을 잡을 수도 있다. 미국 제재 전 까지만 해도 TSMC는 중국 고객사를 다수 확보하고 있었다. 다시 중국과 손을 잡게 된다면 역으로 생산라인 확보 측면에서 미국이 불리하다. 따라서 대만은 TSMC를 향한 미국의 요구를 배짱 크게 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TSMC가 아니다. 미국 오스틴에 제1공장을 가동하고 있지만, 현재 제2 생산라인 증설을 위해 더 논의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아직 명확하게 결론이 나지 않아서다. 정부 제재에 발목이 잡히기 전에 착공에 들어간 TSMC와 달리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미국의 요구를 마냥 거절할 수 없다.


메모리 사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를 공급하지 않아도, 미국에는 시장점유율 3위 기업인 마이크론이 있다. 삼성전자가 없어도 메모리 수급에 차질을 빚지 않는다. 현재 시점에서는 삼성전자가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정부가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종용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미국에게 기밀정보를 제공하면 그간 쌓아온 반도체 기업들의 기술과 경영 전략 등이 유출될 수 있다.

외교, 경제 문제로 번질 수도 있다. 그간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은 중국에 반도체를 일정 수량 납품하고 있었다. 중국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메모리 중 적지 않은 비중이 한국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중국 내 PC와 모바일 디바이스 등에 포함되는 메모리에도 한국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미국이 반도체 재고, 주문, 판매정보 등을 파악하게 된다면, 미국이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중국과 현재 냉전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기업들을 대상으로 중국향 물자를 줄이라고 명령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기업의 판매량이 줄어들고, 매출과 수익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상황은 이렇지만 현실적으로 산업부나 정부 차원에서 현재 할 수 있는 것은 크게 없다. 익명을 요청한 반도체 시장 전문가는 “미국은 정보를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기업이 중국 물자를 포기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며 “정부 차원에서 잘못 개입했다가 오히려 더 역효과가 날 수 있으며, 기업들이 고심해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문승욱 산업부 장관은 “정부가 손을 놓고 있거나 민간에 맡기고 있는 상황은 아니고, 해당 기업들과 긴밀히 협업하면서 대응책 마련하고 하고 있다”며 “적기에 능동적으로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최대한 하겠다”고 말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배유미 기자> youme@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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