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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가 지난 9월 KDB산업은행과 함께 627억원 규모의 신기술사업투자조합 ‘롯데-KDB 오픈이노베이션 펀드’를 조성했다. 이번 펀드 출자에는 롯데그룹 8개 계열사(롯데쇼핑, 롯데GRS, 롯데하이마트, 롯데홈쇼핑, 코리아세븐, 롯데면세점, 롯데글로벌로지스, 롯데정보통신)가 참여했다. 이번 펀드 결성을 통해 롯데의 스타트업 투자법인 롯데액셀러레이터는 총 1000억원 규모의 자산을 운영하게 됐다.

이번 펀드는 ‘유통물류’에 투자하기 위해 구성된 펀드라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롯데는 이번 펀드를 통해 유통 플랫폼, O2O, 물류 부문에서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한다는 계획이다. 특히나 ‘물류’ 투자를 위해 구성된 펀드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주목할 만하다.

롯데에는 유통과 물류 외에도 화학, 건설, 식품 등 수많은 계열사가 있지만, 굳이 ‘유통물류’에서 먼저 투자 펀드를 결성한 이유는 있다. 롯데가 시장을 이끌고 있다고 평가받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역으로 롯데 유통물류 계열사들이 가장 먼저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는 게 롯데액셀러레이터측 평가다.

이종훈 롯데액셀러레이터 투자본부장은 “전통적으로 롯데가 강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유통물류산업에서 스타트업을 통한 해체(Un-Bundling)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마켓컬리, 메쉬코리아처럼 유통물류를 기반으로 한 신생업체들이 워낙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며 “과거 한국에서 유통 강자라고 하면 다들 롯데와 신세계의 싸움을 이야기했는데, 이제는 쿠팡과 네이버의 대결이 점쳐진다. 스타트업 투자와 협업을 통해서 롯데 계열사들의 시장 생존과 동반 성장을 만들고자 펀드를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왜 물류스타트업인가

그렇다면 왜 물류 투자인가. 물류는 전통적으로 대규모의 인프라 투자를 기반으로 한 기간산업이다. 공간을 기반으로 한 물류업을 하기 위해서는 ‘물류센터’가 필요하고, 이동을 기반으로 한 물류업을 하기 위해서는 ‘화물차’나 ‘항공기’, ‘선박’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다. 이러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금액 투자가 필요하고, 그래서 돈이 많이 든다. 스타트업이 하기는 어려운 산업으로 ‘물류’가 꼽혔던 이유다.

하지만 롯데액셀러레이터가 투자하고자 하는 물류는 기간산업이 아니다. 이종훈 본부장은 롯데액셀러레이터의 물류 투자는 ‘요소 기술’ 관점에서 접근한다고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스타트업이 ‘마켓컬리’처럼 인프라에 엄청난 투자를 하는 업체가 될 수는 없다. 대신에 스타트업은 마켓컬리와 같은 사업자에게 필요한 ‘요소 기술’을 제공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마켓컬리 안에서 최고의 상품을 추천해주는 서비스를 만들거나, 조금 더 최적화된 배차 및 배송 알고리즘을 만드는 식으로 접근을 해야 한다.

이 본부장은 “물류스타트업이라고 모두 거대한 물류를 할 필요는 없다. 전체 가치사슬 요소요소에 들어가는 작지만 정밀한 소프트웨어, 하드웨어들이 스타트업들이 물류에 진입할 수 있는 영역이고,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며 “예를 들어서 두손컴퍼니(품고)와 같이 창고를 직접 운영하는 스타트업이 있지만, 이들은 자기가 창고가 있어서 잘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기술이 있고 기술을 구현하기 위해서 창고가 필요한 곳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크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본부장은 ‘우버’와 ‘에어비앤비’의 예를 들었다. 우버는 자동차 한 대 없이 ‘자동차 회사’가 됐고, 에어비앤비는 부동산 없이 ‘부동산 사업’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창고가 있고, 트럭이 있어야 물류업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전체 물류 프로세스를 끊임없이(Seamless) 연결하기 위한 틈새가 굉장히 많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오픈이노베이션 펀드가 움직이는 곳

롯데액셀러레이터는 오픈이노베이션 펀드 결성 이후 이 펀드를 활용해 두 군데 스타트업에 투자를 집행했다. 투자한 업체들을 통해 롯데액셀러레이터가 바라보는 ‘유통 플랫폼’, ‘O2O’, ‘물류’가 무엇인지 유추해볼 수 있다.

하나는 이커머스 상품통합관리 솔루션 셀러허브를 운영하는 ‘레이틀리코리아’라는 업체다. 레이틀리코리아는 다양한 마켓플레이스에 상품을 판매하는 온라인 셀러를 대상으로 하나의 솔루션으로 상품통합 업데이트 서비스를 제공한다. 정산 및 배송, 교환, 반품까지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물류 서비스는 외부업체인 두손컴퍼니와 연계해서 제공된다.

두 번째 투자 포트폴리오 기업은 2018년 우아한형제들이 200만 달러를 투자해서 유명해진 로봇 기업 ‘베어로보틱스’다. 구글 출신의 하정우(John Ha) 대표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2017년 창업했다. 한국에서는 상용화된 인공지능 기술 기반 자율주행 로봇을 만든 곳으로, 주요 용처는 레스토랑에서 주방에서 식탁까지 음식을 배달하는 것이다.

육그램과 월향이 지난 6월 오픈한 레스토랑 ‘레귤러식스’에도 베어로보틱스 서빙로봇이 배치돼 있다.(사진: 베어로보틱스)

아직 투자가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논의하고 있는 업체로는 ‘에임트(AIMT)’가 있다. 에임트는 진공단열재 기술을 기반으로 콜드체인 패키징을 만든다. 새벽배송과 신선식품이 화제가 되고 있는 와중, 이미 활용되고 있는 기술이 적용된 포장재라는 설명이다. 롯데액셀러레이터에 따르면 에임트의 포장을 통해 배송자재의 낭비를 줄이고, 드라이아이스 활용도를 줄일 수 있다. 그렇기에 ‘친환경’ 패키징이 된다는 설명이다. 에임트의 포장재는 현재 롯데홈쇼핑, 롯데마트, 롯데슈퍼의 배송 서비스에 활용되고 있다.

에임트의 콜드체인 포장 라인업(사진: 에임트)

투자 원칙 ‘시너지’, 물류에서 찾아보기

이종훈 본부장이 말하는 롯데액셀러레이터의 투자 원칙이 있다. 똑같이 좋은 기업이라면 롯데가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는 영역 내지는 롯데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하지만, 롯데와 함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기업, 롯데와 협업을 통해서 더 성장할 수 있는 기업에 투자한다는 설명이다. 이 본부장은 “스타트업들을 롯데그룹에 소개했을 때 롯데 내부에 있는 사람들도 혁신에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그런 기업을 찾아야 한다”며 “시장에는 분명히 대기업이라서 하지 못하는 영역이 존재하고, 스타트업들이 대기업이 하지 못하는 영역을 보충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서 오픈이노베이션 펀드가 투자한 업체인 베어로보틱스. 이 업체가 만든 로봇은 롯데 계열사인 롯데GRS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빌라드샬롯’에 도입됐다. 하루에도 200~300번의 음식을 나르고 있고, 점차 도입 범위를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롯데GRS가 로봇을 도입해서 ‘사람 직원’을 사라지게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고객 접점에서 더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접객 직원의 근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도입했다는 설명이다.

베어로보틱스의 서빙 로봇을 제조할 때 투입되는 원자재인 플라스틱 제품은 롯데케미칼이 생산하여 공급하기도 한다. 생산량이 안 나오는 스타트업은 대기업으로부터 소재를 공급받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데, 이런 부분을 협업을 통해 제공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협업사례가 있다. 예컨대 롯데액셀러레이터가 투자한 다른 기업인 ‘나우픽’은 도심 거점과 전속 배송기사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시간지정 즉시배송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업체다. 우아한형제들이 최근 열심히 하고 있는 배민마켓을 생각하면 편한데, 유사한 비즈니스를 먼저 한 업체라고 보면 된다.

이 업체의 도심 물류거점에는 드라이기나 충전기와 같은 롯데하이마트의 PB상품이 들어갔다. 나우픽은 판매하는 상품 구색을 늘릴 수 있고, 롯데하이마트는 서울에 새롭게 판매 채널을 얻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는 롯데액셀러레이터측 평가다.

마감할인 판매 중개앱 ‘라스트오더’를 운영하는 스타트업 미로도 롯데액셀러레이터의 포트폴리오 기업이다. 미로는 유통기한이 임박해 당일 소진이 필요한 지역 상점의 식음료를 최대 90% 할인된 가격에 판매 중개해주는 플랫폼이다.

미로앱 구동화면. 다양한 식음료 카테고리를 제공하고 있는데, 고객이 자주 찾지 않는 유휴시간에 할인 가격에 방문 판매를 유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음식점도 눈에 띈다.

미로를 통해 소비자는 저렴한 가격에 상품을 살 수 있다. 음식점은 폐기로 인해 로스가 발생하여 아무 돈을 못 벌게 될 상품을 판매하여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미로는 중간에서 마케팅 마진을 받는다. 현재는 고객이 직접 근방 음식점에 방문하여 상품을 픽업을 해야 하는 구조지만, 향후 배송 모델 결합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게 롯데액셀러레이터측 설명이다.

미로 또한 롯데 계열사인 롯데리아, 세븐일레븐, 크리스피도넛(롯데GRS)와 같은 업체와 협력하고 있다. 간단한 개념으로, 당일소진 상품과 폐기가 존재하는 롯데의 식품 유통 계열사들이 미로에 입점하여 재고관리 문제를 해결하는 식이다. 미로는 고객에게 제공하는 셀렉션(Selection)을 롯데가 가진 프랜차이즈 망을 통해 빠르게 늘릴 수 있다.

이 본부장은 “스타트업들이 물류라고 겁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물류란 덩치가 크고, 무겁고,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스타트업과 같은 가벼운 조직이 움직이기 좋은 산업이 된다고 생각한다”며 “물류는 일반적으로 오래된 사람들이 큰 규모의 물류를 수행하며, 보수적으로 운영된다. 그리고 물류 프로세스 각 단계는 분절돼 있다. 그 사이사이에 시장이 겪는 어려움이 존재하는데, 그 모든 중간점에 기회는 존재한다”고 말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엄지용 기자> drake@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