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몽’과 ‘알리타: 배틀 엔젤’의 문제의식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디까지가 인간의 구분점인가에 대해서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작을 보지 않으셨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원작을 보셨어도 재미없을 수 있습니다.

 

총몽의 세계관에서 이상향 자렘은 단순히 적대시되는 대상이 아니다. 자렘 안에서도 분투와 절망, 반목이 끊임없이 일어나며, 결국 반으로 갈려 싸우게 되는 일도 있다. 자렘도 피해자인 것이다. 자렘 위에는 신의 영역일 것만 같은, 그러나 실제론 아무것도 아닌 예루가 있고, 그곳엔 복종만 있을 뿐 희망 같은 것들은 없다. 고철마을와 자렘과 예루를 관통하는 고민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과연 목숨을 버려가며 지켜야 할 만큼 굉장한 것인가.

알리타: 배틀 엔젤의 고민은 게으르고 낙천적이다. 선과 악을 명징하게 나누고, 인간과 사이보그에도 선을 그어 인종차별적 요소를 활용한다. 자렘을 이상향으로, 디스티 노바를 빅 브라더로 규정한다. 이드(이도)와 갈리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으로 포장해 숭고한 이념을 입힌다. 원작의 설정을 축소하다 못해 왜곡한다.

총몽에서 전뇌화를 통해 컴퓨터와 같은 인간이 된 인간들은 여전히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고철마을에 머무는 전뇌화된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갈리도 마찬가지로, ‘내 자신을 인간으로 규정한다’는 생각만으로 인간으로 존재한다.

알리타: 배틀 엔젤은 그렇지 않다. 기계화를 전혀 하지 않은 인간을 인간으로 부르고, 인간과 비슷한 외형을 하고 있는 기계 몸을 가진 이들을 사이보그로 부른다. 극중 알리타는 뇌와 인간의 심장을 갖고 있다. 이 사실만으로 사이보그로 분류된다. 극중 어떤 이는 기계로 된 알리타를 보고 ‘저 쇳덩이’라고 부른다. 이는 주인공을 나락으로 빠뜨려 편하게 갈등을 주려는 제작자의 게으른 생각이다. 인종차별적 요소를 도입한 것이다. 총몽 고철마을의 일원들은 저마다의 비율로 기계 신체를 갖고 있고, 따라서 서로의 기계 몸을 차별적 요소로 보지 않는다. 심지어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의 외형뿐 생물의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은 등장인물도 자신이 인간으로 규정하면 인간으로 받아들인다. 반대로 기계라고 해서 부정당하지 않는다. 갈리의 복제품들은 인간과 기계를 넘어 훌륭한 어떤 존재가 된다. 따라서 신체가 절단된다고 해서 죽음의 절망을 느끼지 않고, 죽음 자체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죽음이 완전한 죽음이라고 볼 수 없다. 원작에서는 인간 신체를 가능성의 한계로 보고 기계화를 서둘러 시도하는 존재들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 복잡함과 인간성을 넘어서는 어떤 성질,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생각들이 원작의 매력이다.

여기서 원작과 다른 질문거리를 찾을 수 있다. 얼마까지 기계화돼야 인간이 아닌 것인가. 알리타: 배틀 엔젤은 인간의 뇌와 심장을 마지노선, 신체 거의 대부분을 기계화했으면 사이보그로 정의한다. 현실에서나 총몽에서는 그렇지 않다. 인공심장과 페이스메이커가 보편화됐고, 장애를 이유로 기계 팔을 사용하는 이들이 많다. 3D 프린터로 만드는 보급형도 존재한다. 인공 안구와 간도, 인공 청력도 만들어지고 있다. 이들은 사이보그인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인간이다. 차별적 시선으로 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선과 악을 나누기 위해 현존하는 ‘인간’들에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

쉬운 몰입을 위해 도입된 알리타: 배틀 엔젤의 또 하나의 시작점은 선과 악의 규정이다. 절대선과 악이다. 악의 기계는 인간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놓고 굳이 파충류처럼 움직이게 했으며, 회한과 부러움의 도시 자렘은 상류층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2019년의 모습을 차용했다. 그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이들이 쉽게 분노하며, 알리타의 의도에 동조하도록.

원작의 선악은 그렇지 않다. 우주에서 가장 강한 존재에 가까운 먼치킨 갈리는 쉽게 패배하며, 그 자신도 불완전하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지속한다. 병을 앓고 있는 모터볼 챔피언은 챔피언다운 근성을, 죽음을 불사하고 저항하는 덴에게서의 리더십을, 바보 같은 우직함의 토지에게서는 무사도를 엿볼 수 있다. 불사의 디스티 노바도 계속해서 패배하며, 신으로 군림하는 컴퓨터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알리타의 등장인물들은 죽음에서 끊임없이 도망치기만 한다. 실제의 선악도 그렇진 않다. 모든 전쟁은 각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했으며 어떤 숭고한 이념 같은 것들은 없었다. 있었다고 믿을 뿐이다.

단순 판타지물이 아닌 사이언스 픽션으로 보이기 위해 원작의 설정을 버리고 나노테크와 같은 기술 이름을 사용했을 때는 다른 영화와의 비교를 피할 수 없다고 본다. 어벤져스에서 나노테크 수트를 입은 아이언맨은 기계인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인공세포로 상처를 치료한 아이언맨과 호크아이는 인간이 아닌가. 왜 알리타는 완벽해야만 했을까. 완벽한 존재를 규정하고 그렇지 않은 존재들을 차별하는 영화가 2019년에 존재해야 할까.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이종철 기자> jude@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