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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이 커진 만큼, 우리는 그에 걸맞은 옷을 입고 있는가? 허망하게 들린다. 업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웹툰 성장의 성취를 같이 느끼게 하려면 큰 정책도 중요하지만 매우 작은 디테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예를 들면 계약서에 들어가는 문구가 작가와 업체간 합의를 이뤄야 한다. 작가에 프로 정신을 주장하듯, 업계 사람들도 프로마인드를 갖고 작가를 대해달라. 작가와 우리가 함께 잘 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고 작가가 사는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만화가협회장이기도 한 윤태호 작가가 지난 30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공정한 웹툰생태계 조성을 위한 토론회’에 깜짝 방문해 이같이 말했다. 이 발언은, 국내 웹툰 시장이 1조원 규모를 눈앞에 두고 있고, 매년 20%씩 성장하는 과정에서, 창작의 주체인 작가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거나, 혹은 피해를 입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토론회는 문화체육관광부, 부천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주최한 것으로 웹툰작가들의 피해사례를 발표하고, 작가와 플랫폼 간 상생 방안을 찾기 위해 마련됐다.

윤태호 한국만화가협회장

레진코믹스의 후폭풍이 크다. 레진코믹스는 최근 지각비, 중국 전산 누락, 블랙리스트 등의 문제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작가와 플랫폼 간 갈등은 레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레진코믹스 이외에도 여러 웹툰 유료 플랫폼들이 대체로 작가와 크고 작은 갈등을 빚고 있다. 이날 이림 한국웹툰작가협회 이사가 발표한 작가 피해 사례에 따르면 불투명한 정산, 기한 없는 원고 수정 요구, 투자를 빙자한 2차 저작물 독점, 작가도 모르는 재연재, 강제 연재중단 등이 문제가 됐다.

웹툰산업의 덩치가 커지고, 젊은 작가들이 불합리한 조건에 공식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쉬쉬 했던 작가와 플랫폼 간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토론에 발표자로 참석한 조일영 서울시 공정경제과 변호사는 “웹툰 시장이 성장함에 따라 그 과정에서 불공정 거래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시가 지난 2017년 발표한 ‘만화, 웹툰 분야 불공정거래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작가 중 불공정 계약조건을 강요당한 경우가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36.5%에 달했다.

앞서 열거된 문제 중 다수는, 계약서만 제대로 작성해도 피할 수 있는 것들이다. 조일영 변호사는 “웹툰 계약에 있어 중요한 사항인 연재 기간이나 연재 횟수, 원고료의 지급 기준도 정확하게 정하지 않아서 당사자 간 분쟁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결국 웹툰 작가가 피해를 입는 사례가 발생한다”며 “연재 기간이나 횟수, 계약 종료 후의 저작권 귀속 관련된 사항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왼쪽부터) 황정한 작가,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교수, 조일영 서울시 공정경제과 변호사, 고정민 홍익대학교 교수, 한인철 영화진흥위원회 공정환경조성센터장, 이림 한국웹툰작가협회 이사, 김유창 한국웹툰산업협회장, 이영욱 법무법인 감우 변호사, (사진엔 안나왔지만) 손상민 한국만화스토리작가협회 이사.

특히 유료 플랫폼 계약서 중 비밀 유지에 관한 조항이 독소조항으로 꼽혔다. 해당 조항은 작가와 웹툰사업자가 상대방의 사업상 비밀정보를 사전 승낙없이 제3자에게 누설하면 안 된다는 조항이다. 그러나 이 조항은, 작가들이 무언가 문제를 느꼈을 때 변호사와 만나 상담할 때 부담을 주는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영욱 법무법인 감우 변호사는 “비밀조항 유지 조건을 갖고 소송에 들어가면 오히려 판사에게 혼이 날 것”이라며 해당 조항이 변호사 상담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지적하며 해당 조항이 작가들이 권리를 찾는데 독소조항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조일영 변호사가 샘플로 공개한 표준 계약서.

표준계약서는 그러나, 법적으로 강제적인 효과를 갖지 못한다. 권고 수준에 머무르기 때문에 업체들에 강제적으로 적용하게 할 순 없다. 때문에 표준계약서 활성화를 위한 홍보와 기업에 줄 당근도 같이 필요하다. 김유창 한국웹툰산업협회장은 “정부사업 지원, 금융사업 지원 등의 우대정책이 필요하다”며 “상생협의체 구성 외에도 각 분과 내에서 적극적 의견을 취합할 수 있는 다양한 모임을 지원하고 표준계약서의 방향과 완성을 작가와 기업 모두에게 설명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영화계의 사례가 눈여겨볼만하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만든 ‘대중문화예술인 표준약관’이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이영욱 변호사는 “영화계에서는 85% 정도가 표준약관을 사용하고 있고, 출연자들도 공정위 마크가 없는 계약서에는 싸인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며 “예술인복지법 5조에 가라 표준계약서 사용시 문화예술재정 지원에 있어 우대하도록 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표준계약서가 중요한 점은, 불공정 계약이라고 일컬어질만한 것들로 인한 피해를 신인 작가가 입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토론자로 참여한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수는 “플랫폼의 요구에 실제로 ‘노’를 말할 수 있는 작가가 얼마나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왜곡되고 불공정한 계약을 강요하는 불투명 계약 강요 관행은 수십년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악습”이라고 질타하고 표준 계약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