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전략, 무분별하게 받아들이지 말라”
(사진= 11일 오후, 서울 코엑서에서 열린 컴업 2025의 ‘퓨처 토크’ 현장. 왼쪽부터 페르난도 파브레 멘도사 카프만펠로우즈의 CEO, 김경민 500글로벌코리아 제너럴 파트너, 에디 리 화이트스타캐피털 제너럴 파트너, 스테파니 추 포티지벤처스 제너럴 파트너)
세계적으로 약 2000개의 스타트업이 지난 15년 동안 기업가치 10억달러를 넘는 ‘유니콘’ 반열에 올랐다. 이들은 어디서 태어났을까? 실리콘밸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의외로 25% 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25%가 미국의 다른 지역, 그리고 50%는 중국을 포함해 미국 밖에서 나왔다. 투자자들이 미국만 바라본다면 세상 절반의 유니콘을 놓치게 되는 셈이다. 벤처투자 업계는 이제 “실리콘밸리로 가야 한다”는 대신 “로컬에서 성장해서 글로벌 확장이 가능하다”라는 모델이 증명되고 있다고 말 한다. 이런 이야기가 오간 토론이 올해 컴업 2025에서 열렸다.
토론은 벤처투자사 리더십 프로그램인 카프만펠로우즈의 페르난도 파브레 멘도사 CEO가 사회를 봤고, 김경민 500글로벌코리아 제너럴 파트너와 에디 리 화이트스타캐피털 제너럴 파트너, 스테파니 추 포티지벤처스 제너럴 파트너가 패널로 참여했다. 토론자들은 각기 다른 지역 기반과 투자 단계를 대표하고 있어, 실리콘밸리를 넘어 다원화된 글로벌 투자 흐름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이들은 유니콘을 향해 도전하는 창업자들에게 어떤 조언을 했을까.
자신의 거점을 충분히 활용하라
500글로벌코리아 김경민 파트너는 실리콘밸리 모델의 무비판적 수용을 경계한다. 그는 “처음에는 실리콘 밸리의 플레이북이 한국 시장에도 여전히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고 본다”면서 “(한국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다녔고, 한국의 경제 성장기를 겪은 매우 운이 좋은 세대”라고 말했다.
특히, 제조나 화학을 비롯해 교육열까지 한국이 가진 고유한 산업적 유산을 ‘지식 섹터’로 정의하면서, 이를 현대적인 기술과 결합하는 영역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거점의 이점을 활용해 기회를 보는 이들’에게 투자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는 한국형 유니콘이 단순히 미국의 서비스 모델을 카피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산업적 강점을 기반으로 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스테파니 추 포티지벤처스 제너럴 파트너도 유사한 이야기를 했다. “글로벌 확장이 항상 정답은 아니”라는 것. ‘한국은 시장이 작다’는 인식 때문에 창업 초기에 무리하게 해외 확장을 추진하거나, 국내 시장에서 충분한 실험과 제품·비즈니스 모델의 정교화를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글로벌로 나가는 사례가 많은데, 이에 대해 다시 생각할 발언을 한 것이다. 그는 “금융처럼 큰 로컬 시장에서는 국내에서만 10억달러 기업을 만들 수 있다”면서 “먼저 자국 시장에서 이기라”고 조언했다. 글로벌 VC는 오히려 로컬 시장에서의 압도적 우위를 더 선호하며, 탄탄한 홈마켓 포지션이 있을 때, 해외 확장은 선택적 전략이 될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로컬 시장에서의 글로벌 파트너를 잘 만날 필요도 언급했다. 멘도사 CEO는 “성장도 어렵고 엑시트도 어려운데, 왜 굳이 캘리포니아 밖에서 투자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스테파니니 추 파트너는 “우리가 매우 구체적인 ‘전문성(Expertise)’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종종스타트업의 로드맵이 어떻게 될지 말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선진 시장에서 이미 검증된 비즈니스 모델의 진화 과정을 알고 있는 투자자는, 한국이나 동남아 같은 신흥 시장에서 유사한 모델을 키우는 창업자에게 ‘미래의 로드맵’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로컬 자본이 줄 수 없는 글로벌 VC만의 차별화된 가치라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스타트업에 투자하나
수익을 내야 한다는 비즈니스 마인드 역시 강조한 부분이다. 초기 투자(Seed) 단계에서는 ‘꿈’과 ‘팀’에 투자한다면, 시리즈 A 이상에서는 ‘숫자’와 ‘증명된 수익 모델’이 필수적이라고 에디 리 파트너는 강조했다. 그는 “’상업적인 마인드(Commercially minded)’를 가진 창업자와 유닛 이코노믹스(Unit Economics, 단위당 수익성)을 중요하게 본다”면서 “매출 발생 전(Pre-revenue)이나 제품 출시 전(Pre-product) 단계에는 투자하지 않는데, 제품이 시장에서 어떻게 작동할지 확신을 갖기 위해 어느 정도 숫자를 봐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어 “전체 시장 규모(Market Size)와 엑시트 잠재력(Exit Potential)도 꼭 검토하는데, 결국 우리는 이 비즈니스가 언젠가 인수자를 찾거나 상장(Public market event)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어느 정도 확신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글로벌 VC가 한국과 같은 미국 외 시장에 투자하는 이유로는 ‘시장 비효율’을 꼽았다. 좋은 회사가 자금 부족으로 성장 기회를 놓치는 구조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 한국을 포함한 미국 외 시장에서 벤처 생태계가 초기 단계(Seed~Series A)에서는 자금이 풍부하지만, 시리즈 C나 D 단계의 ‘성장 자본(Growth Capital)’은 극도로 부족한 상황을 짚었다. 현지 로컬 펀드들은 수백억원 단위를 쓸 여력이 부족하고, 글로벌 대형 펀드들은 굳이 해외까지 나와서 리스크를 감수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테파니 추 파트너는 이런 상황이 벤처 투자자들에게는 수익을 창출할 기회라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 밖 성장단계 투자는 5년 전보다 훨씬 적은데, 역설적으로 그게 우리의 기회”라고 말했다. 특히 한국의 초기·중간 단계 스타트업에게는 글로벌 자본의 접근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짚었다. 실리콘밸리 밖의 스타트업은 시리즈 B 이후 단계에서 훨씬 더 엄격한 실적 검증(Metrics)을 요구받게 되는데, 글로벌 벤처투자사들은 이런 상황에서 실적 검증이 된 좋은 스타트업에 투자할 기회를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성공을 위한 몇 가지 유의사항
패널들은 ‘좋은 투자자·좋은 파트너’를 일찍 만나는 것과 ‘태도’를 성공을 좌우하는 요인으로 꼽았다. 김경민 500코리아글로벌 제너럴 파트너는 “초기 투자는 결국 사람에 대한 판단”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2~3개월 동안 창업자와 깊은 대화를 나누며 시장 이해도, 경쟁 분석 사고력, 실행력을 검증한다고 설명하면서 “정말 좋은 파트너를 만나는 것은 자금 조달 그 이상의 의미이며, 함께 성장의 길을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에디 리 파트너는 협상 태도와 자신감을 파트너십의 기준으로 꼽았다. 그는 “훌륭한 창업자일수록 자신이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확신이 있다”며 ”그 확신이 투자자에게도 신뢰를 준다”고 덧붙였다.
많은 창업자들이 궁금해하는 ‘콜드 이메일’의 효용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요약하자면 “투자자와 연결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소개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것. 스테파니 추 파트너는“약한 연결(weak tie)이라도 소개가 있으면 성공 가능성이 50%는 올라간다”고 말했고, 멘도사 CEO는 “VC에게 매일 이메일이 300통씩 오니 모두 읽을 수 없다”고 했는데, 에디 리 파트너는 “그러나 정말 잘 쓰인 콜드 이메일은 기억에 남는다”고 일말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와 관련해 김경민 파트너는 무작위 대량 발송 형태의 콜드메일이 아니라, 해당 투자사의 전략을 잘 이해하고 있는 곳에서 이에 부합한 메시지를 보내는 콜드메일에는 관심이 간다고 설명했다.
투자로 얼마만큼의 자금을 확보하느냐는 회사 가치(밸류에이션) 평가와 관련 깊다. 그러나 에디 리 파트너는 밸류에이션이 무조건 높다고 좋은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초기 밸류가 너무 높으면 후속 투자 유치 시 더 높은 성과를 증명해야 하는 압박을 받게 되며, 이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기업 가치를 낮춰 투자받는 ‘다운 라운드(Down Round)’를 겪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연쇄 창업가는 처음 창업하는 사람보다 밸류에이션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데, 이는 너무 높은 밸류에이션에 숨겨진 비용을 알기 때문”이라며 “향후 3년 동안 수익을 내지 못할 것이라면, 올바른 창업자들은 가격을 너무 높게 책정할 경우 큰 리스크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평가된 밸류에이션으로 다운 라운드를 겪는다면 창업자와 초기 투자자의 지분 희석은 물론 회사의 평판에도 치명적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