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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석의 입장] 오라클 오픈월드에서 AI월드까지

약 20년 전 이맘 때 세계 최대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 업체 오라클이 주최하는 연례 기술 컨퍼런스에 취재차 처음 참석했었다. 당시 행사 이름은 ‘오라클 오픈월드’였다. 아무리 글로벌 기업 기업이라지만, 일개 소프트웨어 회사의 행사에 약 5만명이 참석하는 걸 보니, 입이 쩍 벌어졌었다.

그런데 행사 이름이 왜 “오픈”월드였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IT 업계는 ‘오픈’이라는 단어를 즐겨 쓰니까 의레 그러려니 하고 넘겼나보다. 그러다가 최근 오라클이 이 행사 이름을 AI 월드라고 변경했다는 소식이 듣고 행사의 이름에 큰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됐다. 지난 20년 동안 오라클의 연례 컨퍼런스 이름 변화를 돌이켜보면 거대한 테크 트렌드를 반영하고 있었다.

“오픈”월드는 메인프레임 같은 폐쇄형 시스템의 종말과 이후 등장한 ‘개방형 시스템(open systems)’ 시대를 보여주는 브랜딩이다. 마케팅적 표현을 넘어 기술 트렌드의 전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초까지 주류였던 메인프레임 기반 시스템은 폐쇄적인 아키텍처와 독점적인 운영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메인프레임을 구매한 기업은 특정 벤더(주로 IBM)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하드웨어·운영체제·데이터베이스·애플리케이션까지 모두 해당 벤더의 생태계 안에서만 동작했다. 이는 확장성과 유연성의 한계를 만들어냈고, 비용도 매우 높았다.

반면 1990년대부터는 유닉스(Unix), 리눅스(Linux), x86 기반 서버들이 확산되며 다양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환경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런 기술 트렌드 덕분에 기업은 여러 벤더의 기술을 조합해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 흐름은 곧 ‘탈 메인프레임’, ‘탈 종속화’ 라는 기술 트렌드로 이어졌다. 오라클은 이 트렌드를 이끄는 대표 주자였다. 메인프레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독립적이고, 안정적이면서, 성능이 좋은 DB소프트웨어가 필수적으로 필요했는데, 오라클 DB가 그 조건을 만족시켜줬다.

오라클은 그 대가로 승승장구했고, 래리 앨리슨 오라클 회장은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가 됐다.

그러다가 오라클 오픈월드는 2022년 “클라우드월드”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래리 앨리슨 회장을 세계 최고 부자로 만들어준 기술 트렌드(오픈 시스템)의 종말을 의미하는 네이밍이다.

오픈 시스템 시대에 기업들은 원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직접 구비했다. 기업마다 크게는 데이터센터, 작게는 서버실이 존재했다. 하지만 클라우드 시대에는 더 이상 구매하지 않는다. 기업들은 서버나 소프트웨어를 구매해 설치하고 관리하는 노력을 하기 보다 클라우드에서 간단히 서비스로 이용하길 원했다. 오라클과 함께 오픈 시스템 시대를 호령했던 기업들은 클라우드 시대에 모두 조금씩 힘이 약해졌다.

오라클은 처음에 클라우드 흐름에 올라타지 못했다.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에 비해 클라우드 후발주자가 됐다. 오라클도 오픈 시스템 시절을 호령했던 다른 기업들처럼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라클은 “클라우드월드”를 열고 DNA를 클라우드 기업으로 변모해왔다. 오라클 DB를 비롯하여 모든 제품을 클라우드로 제공했다. 때로는 정치적 힘을 이용해(?) 바이트낸스와 같은 고객을 얻어내기도 했다.

비록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오라클은 클라우드 시장에서 실패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오픈 시스템’ 시대의 소프트웨어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오라클은 올해부터 연계 컨퍼런스 이름을 ‘AI 월드’라고 변경했다. 거대한 기술 트렌드가 또다시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클라우드는 여전히 중요한 기술이지만 AI에 올라타지 않고 클라우드에만 집중하면 기술 트렌드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게 된다.

이런 사실을 아는 오라클은 또다시 생존을 위한 트렌드 변화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클라우드 월드’를 미련 없이 버리고 ‘AI 월드’라인 이름을 과감히 단 것은 이를 보여준다. 현재는 오라클이 AI 시장의 리더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픈AI가 주도하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등 오라클은 AI 시대에도 살아남기 위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2025년 관점에서는 다소 구닥다리 느낌이 나는 오라클이지만, 알고 보면 거대한 기술 트렌드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해 온 기업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 결과 래리 앨리슨 회장은 여전히 세계 최고 부자 반열에 올라 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심재석 기자>shimsky@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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