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리] “이거 봐, 재사용 용기도 예쁠 수 있어”
바이라인네트워크에서 스타트업을 리뷰합니다. 줄여서 ‘바스리’. 투자시장이 얼어붙어도 뛰어난 기술력과 반짝이는 아이디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스타트업은 계속해 탄생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겠다고 출사표를 던진 이들을 바이라인의 기자들이 만나봤습니다.
플라스틱 재활용에 가장 좋은 방법은? 안 쓰는 거다. 안 쓰기 어렵다면 적게 쓰는 게 좋다. 재활용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선택하는 수다. 효율도 적다. 분리수거 된 플라스틱이 정말 재활용돼 새 제품으로 탄생할 확률은 9%(2022년, OECD)에 불과하다.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플라스틱은 자연 상태에서 수백년 간 분해되지 않는다. 토양과 수질 오염을 일으키고, 부서지며 작아져 사람 몸에 들어 가면 건강을 위협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플라스틱 폐기물을 각각 25%(2032년), 15%(2040)까지 줄이겠다는 목표를 잡았다.
자, 이제 오늘의 본론. 이 플라스틱을 가장 많이 쓰는 산업군은 어디인가. 포장이다. 흐르거나 샐 수 있는 상품을 담아 파는 데 가볍고 값싼 플라스틱이 많이 쓰인다. 한국 하면 케이뷰티. 화장품을 담는 용기의 소재 중 60%가 플라스틱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화장품 좀 판다는 나라와 기업은 고민할 수밖에 없다. 플라스틱 어떻게 줄이지?

화장품 용기를 다시 쓰게 하려면 풀어야 할 숙제
허락보다는 용서가 쉽고, 재활용보다는 재사용이 낫다. [바스리]가 만난 이치원 보틀리스 대표는 “플라스틱이 재활용되는 비중이 매우 낮고, 배출 분리 역시 소비자에게 책임이 전가되는 불편이 있다”면서 “애초에 용기를 만들 때 플라스틱을 적게 쓰고, 이미 만들어진 제품은 재사용이 되도록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말한다.
백번 옳은 소리.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다. 이치원 대표는 우선 “플라스틱 덩어리”인 화장품과 퍼스널케어(헤어·바디 샴푸 등) 제품의 용기를 바꾸겠다고 나섰다. 화장품 회사를 다니면서 영업으로 시작해 제품 내용물을 개발 했고, 디자인에 손을 댄 후 패키징 엔지니어링에 도전했던 독특한 이력이 창업에 용기를 줬다.
화장품 용기에 플라스틱을 덜 쓰고, 두 번 세 번 다시 이용하게 하려면 기본적으로 세 가지 문제를 풀어야 한다.
첫째, 플라스틱을 아예 안 쓸 수 없다면, 적게 써야 한다. 이치원 대표가 낙점한 대안은 필름(연질) 파우치다. 그게 무어냐고 묻는다면, 쭉쭉 짜서 먹는 아이스크림 ‘설레0’을 떠올려 보면 쉽다.
딱 봐도 일반적인 샴푸통이나 화장품 통에 비해서 가볍다. 통상 500ml 용량 로션 용기(빈 것)의 무게는 뚜껑이나 펌프를 포함해 60g 이상이다. 제품마다 다르겠지만, 연질 파우치의 무게는 대략 10g 안팎이다. 이치원 대표는 “일반 플라스틱 용기 대비 (연질 파우치의) 무게가 90% 이상 감소, 배출되는 쓰레기의 양이 매우 적다”고 말한다. 아마도 최대와 최소치를 비교한 것이겠으나, 보수적으로 봐도 플라스틱을 확실히 덜 쓴다.
다음 문제. 재사용이다. 일반적으로 로션이나 샴푸에 달려 있는 펌프 중, 길이가 긴 플라스틱 관이 달려 있는 것을 우리는 딥 튜브 펌프라고 부른다. 이 녀석은 용기 안의 내용물이 밖으로 나오는 만큼 통 안에 공기가 들어가 공간을 메운다. 공기에 맞닿은 남은 내용물이 산화할 위험이 생긴다. 기초 화장품의 유통기한이 짧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용기를 다시 쓰긴 어려우니, 애초에 안으로 공기가 들어갈 여지를 주면 안 된다고 봤다. 그래서, 아예 튜브가 안 달린 ‘에어리스 펌프‘를 연질 파우치에 결합했다. 제품을 짜서 쓰면 빈 공간만큼 용기가 쪼그라들어 말려 올라가는 타입이라, 안으로 산소가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연질 파우치+에어리스 펌프.’
둘을 결합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부족했다. 사실, 연질 파우치와 에어리스 펌프는 이미 시중에 나와 있는 것들이라 이치원 대표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두 제품을 묶어서 쓸 수 있다. 그러나 시중에 이런 제품이 나왔던가? 뚜껑만 달린 파우치 제품도 대체로 일회용이다. 이런 제품이 재사용으로 아직 보편화하지 않은 데에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어서다.

연질 파우치와 에어리스 펌프를 함께 쓰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앞서 말했듯, 용기 안으로 산소가 들어가면 화장품이 산폐한다. 이치원 대표는 제품 안으로 공기가 들고 나지 않게 뚜껑에 밸브를 달았다. 에어리스 기능을 오래 유지하게 하니까 같은 용기에 제품을 다시 담아(리필) 쓸 수 있다는 논리다. 리필용 파우치에 이 뚜껑만 옮겨 달 수도 있다.
덧붙여, 제품 지지대(핑거 그립)를 만들었다. 파우치 위에 달린 펌프의 뚜껑을 눌렀을 때 제품이 그 압력 받아낼 만큼 힘이 있어야 한다. 다시 한 번 설레0 을 소환해 보자. 설레임의 뚜껑을 세게 누르면 찌그러지지 않겠나. 제품을 손가락에 걸어 누르는 힘을 파우치가 아닌 손가락이 대신 받도록 꾀를 낸 것이 핑거 그립이다.
5년의 준비 기간, 보틀리스가 준비한 무기
바로 이 밸브와 핑거그립이 보틀리스가 믿는 무기다. 이치원 대표는 지난 2020년 ‘에어리스 용기 및 전용 밸브에 관한 개발’을 시작으로, 국내외 총 다섯 개의 특허를 확보했다.
보기에 별거 아닐 것 같아 보이는 이 작은 부품들이 에어리스 펌프와 연질 파우치를 함께 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무려 지난 5년,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창업자의 시간이 흐르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인터뷰하면서 들은 가슴 아픈 사연은, 신파를 싫어하는 요즘 독자님들의 취향에 맞춰 생략한다. 그러나, 이 대표의 말에 따르면 이제 서광이 비친다.
요즘 이 대표는 프랑스와 한국을 반반씩 오가면서, 보틀리스 제품에 관심을 보이는 기업들을 만나고 있다. 프랑스에 사는 유색인종을 위한 케이뷰티 화장품을 만드는 스타트업과 협업, 올 11월에는 결과물을 출시한다. 시장 테스트를 목전에 둔 셈이다. 국내 유명 화장품 대기업, 프랑스의 명품 회사와도 비즈니스 미팅을 가졌다. 글로벌에서 제일 유명한 케첩 회사와도 제품 테스트(PoC)를 진행했다. 모두 플라스틱 용기 규제에 대응해야 하는 입장인 기업들이다. 기업들의 요청으로, 오프라인 스테이션에서 화장품 내용물을 충전해 쓸 수 있는 정수기 타입의 제품을 개발 중에 있다.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단가다. 아무리 환경에 좋아도, 용기 자체가 많이 비싸면 기업이 채택하긴 어렵다. 이치원 대표는 “기존 에어리스 용기와 비교하면 값이 절반 수준이고, 많이들 쓰는 페트병 같은 블로우 용기에 비해서는 단가가 100~200원 정도 밖에 더 안 비싸다”고 말한다. 리필이 충분히 가능한 용기라는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있다는 이야기다. 이 대표 이야기로는 용기 하나로 스무번은 쓸 수 있을 만큼 내구성이 있다.
새로운 제품인데, 시장에서 배척받을 확률은 없을까? 이 대표는 “기존 에어리스 펌프 제품을 그대로 쓸 수 있도록, 벨브와 핑거그립을 기성품에 맞춰 설계했기 때문에 시장에서 기존 업체들과 경쟁할 필요 없이 협업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어쩌면 제일 핵심인 것. 용기가 예뻐야 한다. 화장품 케이스가 촌스러워서 잘 팔리는 경우는, 그 제품의 능력치가 어머어마하지 않고서야 어렵다. 환경을 생각하는 제품은 몇 가지 오해를 받는다. 환경에 더 신경을 쓰느라 제품력이 떨어지지는 않을지, 혹은 비싸거나 덜 예쁘지는 않을지 하는. 보틀리스가 이런 시장의 편견을 깨고 성공할 수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일단 플라스틱 폐기물을 줄여야 하는 수요는 크다. 화장품을 수출해야 하는 기업들도 많다. 의미가 있는데 예쁜 제품을 선호하는 소비자도 있다. 내 방 화장대 위의 제품들이, 어떻게 겉모습을 바꾸는지 관심 있게 지켜 볼 이유가 생겼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