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신호 켜진 스타트업 대표들의 정신건강
# 첫 창업으로 식음료(F&B) 스타트업을 시작한 A씨. 당시 요식업이 부흥하던 시기인 만큼 A씨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창업 성공을 꿈꿨다. 사업 초기 A씨의 상품이 대형마트에 입점하고 홈쇼핑에서 완판이 되는 등 승승장구를 하는 듯 했으나, 메르스가 확산되고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을 맡긴 공장의 문제로 사업이 중단됐다. 하루아침에 사업이 고꾸라지자 A씨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정신질환을 앓게 됐다. 오랜 기간 병을 방치한 끝에 증상이 악화된 것을 느낀 A씨는 전문가를 찾았고, 꾸준히 약 복용과 운동 등을 한 끝에 현재는 완치할 수 있었다.
# 스타트업 대표 B씨는 흔히들 이야기하는 죽음의 계곡(데스밸리)을 겨우 넘겼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사업이 안정적인 단계에 접어들수록 사업성과와 수익 등 수치에 집착해야 하고, 스스로의 모습은 잃어가고 있다는 상실감에 휩싸였다고 털어놨다. 회사의 고비를 어렵게 넘겼지만 때로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지속되자, B씨는 전문가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 스타트업 대표 C씨는 투자 혹한기를 겪으며 마음의 병이 깊어졌다. 벤처투자사(VC)가 투자를 보류한 가운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직원들을 내보내는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쌓이며 결국 번아웃 상태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씨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투자유치가 필요한 시점에서 회사를 살리기 위해 마음을 다잡아야겠다는 의지와 함께 지금은 심리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있다.
스타트업 대표들의 정신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디캠프가 지난 2022년 분당서울대병원과 국내 스타트업 창업자 271명을 대상으로 한 정신건강 실태 조사에 따르면, 국내 스타트업 창업자의 스트레스는 경미한 수준 이상의 비율이 79.4%로 나타났다. 이 중 심한 수준이 41%를 차지해 창업자들의 스트레스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울과 불안감도 경미한 수준 이상의 비율이 50%를 훌쩍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투자유치가 얼어붙은 최근 1~2년간 스타트업 창업자들의 정신건강은 더 악화됐을 것으로 분석된다. 5일 <바이라인네트워크>가 만나본 창업자들에 따르면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자금유치가 필요하지만 투자가 말라붙은 상황인 데다가, 긴축을 위해 직원들을 내보내거나 심하게는 사업을 접어야 하는 곳이 속출하고 있다.
익명을 요청한 한 스타트업 대표는 “2년 전만 해도 투자금이 풍족했고 엑시트할 때도 부르는게 값일 정도로 시장상황이 좋았다”며 “그러나 최근 2~3년간 문을 닫거나, 인원을 줄이는 곳들이 많아지면서 창업자들의 어깨가 무거워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특히 창업 초기 함께 했던 사람들을 내보내는 것은 엄청난 심리적인 고통”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스타트업 대표는 “VC업계에서도 스타트업 대표들의 정신건강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을 정도”라며 “몇몇 VC들은 스타트업 대표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연락 등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으로 들었다”고 전했다.
정신과 약 복용이 투자 유치 걸림돌?…VC “과장된 것”
정신건강은 창업자들이 간과하기 쉽지만, 결코 쉽게 넘겨서는 안되는 문제다. 그러나 전문가를 쉽사리 찾지 못하는 창업자들도 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거나 정신과 약을 복용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투자유치에 걸림돌로 작용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결국 불안이나 우울증세가 나타나도 병원에 찾지 못하는 창업자들은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곤 한다.
유쾌한프로젝트는 창업자들의 정신건강을 케어하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스타트업이다. 이 회사 홍주열 대표는 “창업자들 사이에서 정신과 약을 복용하면 투자나 대출을 받기 어렵다는 낭설이 있다”며 “여러 스타트업 창업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면 아직까지도 이런 말이 나온다”고 전했다.
그러나 <바이라인네트워크>가 취재한 VC 다수는 창업자들의 이와 같은 불안이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선을 그었다. 창업자가 정신과 약을 복용하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을뿐더러, 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하더라도 투자유치 시 큰 고려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VC의 투자총괄은 “창업자의 정신과 약 복용 혹은 심리 상담센터 방문 여부는 개인정보로 묻지도 않고 알 수도 없다”며 “이 점 때문에 투자유치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과장된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또 다른 VC 대표도 “관련해 투자사가 알 길이 없다”며 “투자사마다 관점이 다를 수 있으나 창업자가 정신의학과나 상담센터를 다니는 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을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다수 VC들은 투자유치 시 창업자에게 정신과 약 복용과 관련된 증빙을 요청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오히려 창업자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투자사에서 직접 심리상담을 지원하기도 한다.
알토스벤처스는 투자사의 창업자들이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연계 지원하고 있다. 강남, 강북 지역의 심리상담 센터와 제휴를 맺고 창업자들에게 무료상담 5회권을 제공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누가 상담을 받았는지 알 수 없도록 병원에 익명접수를 받도록 하고 있다. 스프링캠프는 포트폴리오사 창업자를 대상으로 상담 비용을 지원하고, 카카오벤처스와 소풍벤처스는 창업자의 스트레스 관리 특강을 열기도 했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과 스타트업얼라이언스, 디캠프, 아산나눔재단 등도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대면, 비대면 심리상담을 지원하고 있다.
정신건강 전문의들 “정신건강, 셀프 모니터링+조기치료가 가장 중요”
정신건강 전문의들은 멘탈케어 방안으로 셀프 모니터링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언제, 그리고 무엇에 주로 스트레스를 받는지 파악하고 운동이나 취미활동 등 자신만의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또 전문가들은 증상을 방치하기보다 조기에 치료하는 것이 효율과 비용 측면에서 효과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지연 한국외대 심리상담학과 교수는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업 특성상 각종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여기에 계속해서 용기를 내고 도전을 해야 한다”며 “우울 등의 증상이 나타나면 사업 운영 시 중요한 선택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울이나 불안, 불면 등의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미리 전문가의 컨설팅을 받거나, 자신만의 극복 방안을 미리 탐색하는 것이 좋다”고 권유했다.
범재명 성모정신과의원 대표원장은 “불안과 불면의 증상이 오래가면 면역력이 떨어지게 되어 빨리 치료하는 것이 좋다”며 “약물 치료가 효과가 빠르지만, 상담 등을 통해 본인이 어떤 점에서 (심리적으로) 취약한지 파악하고 인지하는 셀프 모니터링이 가장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실례로 운동이나 본인에게 맞는 생활패턴을 찾아 극복한 사례가 있다. 이주성 아키드로우 대표는 “투자 혹한기가 와서 비용을 줄이고 매출을 올려야 하는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며 “힘들 때는 술에 의존하기도 했으나 매일 아침 수영을 하면서 체력적, 정신적으로 좋아졌다”고 털어놨다. 이어 “오전에 운동을 하면 생활패턴을 잡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오전 운동을 추천했다.
홍주열 대표도 “회사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기 어려워하는 대표들도 있지만, 스타트업 선배들이나 같은 대표들을 만나 솔직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고 권유했다.
그는 정신건강의학과나 상담센터를 찾는 것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갖지 않기를 당부했다. 홍 대표는 “감기 걸렸을 때 감기약을 먹는 것과 똑같다”며 “여러 활동을 통해 정신적으로 건강해지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당연히 지나가는 통과의례로 생각하고 하루 빨리 전문가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스타트업 대표들의 정신건강 지원을 위한 사회적인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스타트업 창업의 성지인 실리콘밸리의 VC들은 창업가들의 정신건강을 위한 프로그램이나 제도를 통해 심리상담 코칭, 웰니스 프로그램, 멘탈케어 워크숍 등을 지원하고 있다.
백종우 경희대의과대학 정신건강의학교실 주임교수는 “국내에 스타트업, 벤처기업을 지원하는 여러 시스템이 있으나 멘탈케어는 접근성이 떨어지는 편으로, 이에 대한 사회적인 지원을 고려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전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홍하나 기자>0626hhn@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