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호의 시선] AI 큰 형님의 귀환…IBM 영광의 시대 다시 올까

인공지능(AI)이 세상을 휩쓸고 있다. 겨울 냄새가 나기 시작했던 지난해 11월 챗GPT가 열어젖힌 생성AI 열풍은 여름 햇살이 비치는 지금까지 열기가 식지 않는다. 포문은 챗GPT 개발사 오픈AI가 열었고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 어도비 등 빅테크 기업들은 계속 생성AI를 접목한 서비스를 공개하며 열풍을 이어가기 위한 땔감을 제공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기업이 있다. AI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부터 AI에 진심이었던 기업. 다소 부침은 있었지만 챗GPT가 문을 활짝 열어젖힌 AI 기술 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최근 ‘왓슨(Watson)X’를 선보인 IBM 이야기다.

(자료=IBM)

어릴 적 TV에 나오던 뉴스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룰도 몰랐던 체스 경기에 세계 최고의 체스 기사라는 사람이 진땀 흐르는 얼굴을 연신 매만졌다. 1997년 당시 챔피언인 러시아의 개리 카스파로프(Garry Kimovich Kasparov)가 IBM이 만든 AI 슈퍼컴퓨터 ‘딥블루(DeepBlue)’에 무릎을 꿇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IBM은 빅테크의 맹주였다. 애플이 지금과 같은 혁신의 아이콘이 되기 전이었고 구글은 등장하지도 않은 때였다. 윈도우로 위세를 떨치던 마이크로소프트와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의 인텔이 있긴 했지만, 메인프레임 시장을 장악한 IBM의 아성은 지금보다 훨씬 공고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슈퍼컴퓨팅의 능력은 TV 전파를 타고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체스에 특화한 ‘연산’에 초점을 맞춘 AI의 파장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체스 경기에서 이겼다고 해서 이 기술이 세상을 바꾼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왓슨의 등장…의료까지 발 넓혀

시간이 흘러 2000년대 중반. 끊어진 줄 알았던 IBM의 AI 사랑은 물밑에서 계속됐다. 2004년 미국의 인기 퀴즈 쇼 ‘제퍼디!(Jeopardy!)’를 본 IBM 직원은 연승 가도를 달리던 당시 챔피언을 AI가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미 딥블루로 승리의 맛을 본 IBM은 관련 프로젝트를 승인했다.

‘DeepQA’라고 이름 붙인 프로젝트는 자연어로 제시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AI 기술 개발이 목표였다. 여기서 나온 게 회사 창립자인 토머스 J. 왓슨(Thomas J. Watson)의 이름에서 따온 AI모델 ‘왓슨(Watson)’이다. 수석 개발 매니저 데이빗 페루치(David Ferrucci)의 주도로 개발한 왓슨은 2011년 제퍼디!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IBM의 인공지능 기술을 다시 세상에 알렸다.

파장은 딥블루 이상이었다. 퀴즈 문제를 이해하고 이를 풀어내는 능력은 체스왕을 꺾은 것보다 훨씬 복잡한 기술이 필요한 일이다. 퀴즈쇼 특성 상 다양한 분야 지식을 알아야 한다. 질문 형태도 사람이 말하는 자연어 형태인데다 속에 담긴 의미까지 꿰뚫어 빨리 답변을 찾아야 우승에 가까워진다.

한 마디로 지식이 많고 이해력이 높은 똑똑한 사람이 순발력까지 갖춘 모습의 AI여야 했단 이야기다. 여기서 IBM의 ‘파워 7 서버’가 빛을 발했다.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면서 답변에 신뢰 등급을 부여하는 등 오답을 내지 않기 위한 작업에 자사 서버 성능을 활용했다. IBM은 ‘자연어를 이해하고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더욱 효과적인 컴퓨터’가 왓슨의 콘셉트였다고 설명했다.

(자료=IBM)

인간의 열린 사고 능력까지 흉내 낸 왓슨은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다. IBM은 더 욕심을 냈다. 2015년 별도의 사업 부서를 꾸리고 ‘왓슨 헬스(Watson Health)’를 선보이며 AI와 의료의 접목을 시도했다. 인간이라면 수십년이 걸릴 7만개의 논문 독파를 한 달 만에 완료했다는 왓슨 헬스는 특히 임상 결과와 관련 연구가 쏟아져 나오는 암 분야의 슈퍼 의사가 되는 게 목표였다.

왓슨 헬스를 적용한 암 진료용 소프트웨어(SW) ‘왓슨 포 온콜로지(Watson for Oncology)’는 환자 데이터를 입력하면 학습한 임상 사례를 비롯해 의료기관의 자체 제작 문헌과 의학저널, 교과서, 전문자료를 바탕으로 ▲강력 추천 ▲추천 ▲비추천 등 3가지 수준으로 의료진에게 의견을 제시한다.

그러나 사람의 몸은 AI가 점치기에 훨씬 성스러운 것이었고, 의사가 왓슨 헬스의 분석을 그대로 진료에 쓰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다. 병원을 가봐도 “쉽게 나을 수 있다”거나 “이건 언제까지 완치된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을테다. 보수적 성향이 강한 의료계에 책임지지 못할 AI가 뿌리내리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나라의 데이터로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AI와 사람의 의견이 엇갈렸다. 왓슨 포 온콜로지를 도입했던 가천대 길병원이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2016년 12월부터 2017년 11월까지의 1년간 대장암(결장암) 환자 118명을 대상의 의료진과 왓슨의 ‘강력 추천’ 분야 의견 일치율은 55.9%였다. 가장 좋은 치료법에 대한 사람 의사와 왓슨의 판단이 두 번 중 한번은 달랐다는 얘기다.

의견 불일치가 나와도 의사의 판단을 다시 생각해보는 수단으로 쓸 수는 있지만, 최종 책임은 사람이 지는 현실에서 왓슨 헬스는 외연을 넓히는 데 한계가 있었다. 결국 지난해 1월 IBM은 사모펀드에 왓슨 헬스 사업부를 매각하며 AI로 암을 정복하려던 IBM의 꿈은 제동이 걸렸다.

생각해보면 왓슨이 기대만큼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 건 기술력의 한계가 작용한 측면이 있다. 지금이야 그래픽처리장치(GPU)를 활용한 딥러닝이 뿌리내렸지만, 왓슨 초창기만 하더라도 영글지 않은 기술로 정확도를 높이는 데 장벽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엔비디아의 GPU를 활용하긴 했지만 인간과 흡사한 지능을 가질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단 이야기다.

또 하나 생각해 볼 건 AI의 먹거리인 데이터다. 딥러닝을 통해 배우는 AI 모델은 학습을 위한 데이터의 양뿐만 아니라 품질도 담보돼야 한다. 왓슨 헬스의 경우 임상이나 전문 서적에서 의료 지식을 습득하더라도 말 그대로 생물인 사람의 몸까지 감당하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그래도 왓슨의 명맥이 아주 끊어지진 않았다. 지난 2월 한국 대상 기자간담회에서 원성식 한국IBM대표는 왓슨의 근황(?)을 묻는 질문에 “B2B 차원으로 기업용 AI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IBM은 보안 솔루션인 ‘왓슨 포 사이버 시큐리티(Watson for Discovery)’를 내놓은 것을 비롯해 ‘왓슨 애니웨어(Watson Anywhere)’ 서비스를 통해 대화형 AI 툴 ‘왓슨 어시스턴트(Assistant)’, 데이터 분류·분석을 위한 ‘왓슨 디스커버리(Watson Discovery)’, 개방형 클라우드 플랫폼인 ‘클라우드 팩 포 데이터(Cloud pack for data)’등을 제공하며 AI와의 동행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는 X 시대…큰 형님의 귀환

챗GPT 열풍이 계속된 가운데 이달 초 IBM은 자사 연례행사인 씽크(Think) 컨퍼런스에서 ‘왓슨X’를 선보이며 다시 AI 기술 경연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먼저 시장에 뛰어들었던 전력이 있는 만큼 신사업 차원에서도 AI라는 꿀단지를 포기하기 힘들었을 거란 평가가 나왔다.

단 왓슨X는 그 자체로 챗GPT나 구글의 ‘바드(Bard)’와 같은 생성AI 서비스는 아니다. 기업들이 비즈니스에 생성AI를 접목할 수 있도록 돕는 인프라 성격이다. 파운데이션 모델(FM)을 위한 플랫폼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왓슨X는 ▲왓슨X.ai ▲왓슨X.데이터 ▲왓슨X.거버넌스로 각각 요소를 나눠 제공한다. 먼저 왓슨.AI는 파운데이션 모델(FM)을 제공하는 AI 기술 개발 스튜디오다. 왓슨X.데이터는 AI 워크로드에 최적화한 저장소, 왓슨.거버넌스는 정책 설정이나 의사 결정을 돕기 위한 데이터 모델 솔루션이다.

IBM은 AI 스타트업 허깅페이스와 협력해 수천개의 오픈소스 FM과 데이터 세트를 제공해 각 고객사가 가장 적합한 AI 모델을 만들 수 있는 생태계를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IBM도 자연어 명령 기반 코드 생성을 비롯해 기후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자연재해 패턴 등 자체 FM을 제공하기로 했다.

왓슨X의 공식 출시는 오는 7월로 예정돼 있다. IBM은 이후에도 주요 SW 제품에 왓슨X를 적용하기로 했다.  아르빈드 크리슈나(Arvind Krishna) IBM 회장은 씽크에서기업 요구에 맞게 왓슨X를 구축했기 때문에 고객들은 단순히 AI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AI의 이점을 확실히 누릴 수 있다”며 데이터를 완벽하게 제어하면서도 AI를 빠르게 학습시켜 전체 비즈니스에서 맞춤형 AI기능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다시 등판한 AI 기술 큰 형님. AI 전성시대에 편승한 또 한 번의 도전 정도로만 남을지, 아니면 다시 AI의 선구자 자리를 빼앗아 올지 지켜볼 일이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이진호 기자>jhlee26@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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