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북은 한국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

# 출판사에서 줄곧 출간을 퇴짜 맞던 한 소설은, 작가의 출판 포기 이후 블로그에 연재됐다. 결국 아마존의 전자책출판(KDP)을 통해 독립출판됐는데, 입소문을 듣고 블로그를 찾은 방문자들의 요구 때문이었다. 그 소문을 캐나다의 어느 독립 오디오출판사도 들었다. ‘주인공이 화성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업무일지를 녹음하는’ 내레이션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형식이었으므로, 오디오북에 최적화됐다는 출판사의 생각은 적중했다. 2015년 이 소설은 아마존의 오디오북 자회사인 ‘오더블’에서 베스트셀러가 됐고, 곧 펭귄 랜덤 하우스라는 큰 출판사에서 정식 출간 제의를 받기 이른다.

영화로도 제작돼 골든 글러브상을 받은 이 소설은, 국내서도 크게 화제를 모은 앤디 위어의 ‘마션’이다.

 

미국이나 영국, 독일 등에서는 오디오북의 성공 사례가 심심찮게 들린다. 오디오북은 이미 출간된 도서를 적당한 분량으로 편집, 목소리 파일로 녹음해 파는 소리책을 말한다. 국내서도 오디오북 꽤 오래전부터 제작돼 왔다. 그러나 성장 속도는 더디다. 구글이 올 초부터 국내 오디오북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반향은 크지 않았다.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국내 오디오북 시장 전체 규모는 100억원이 채 안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국내서도 오디오북 시장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시도를 받아들이는데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는 출판계에서도 최근 외국의 성공사례를 훑어보며 국내 오디오북 시장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를 돌아보고 대책을 마련하려는 등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 국내 오디오북 시장에 대한 뼈 아픈 진단

국내 오디오북 시장은 B2B와 B2C를 다 합쳐도 매출 규모가 100억원이 안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가 파악했을 때 국내 오디오북 시장은 B2B와 B2C를 다 합쳐도 40억원 정도 규모다. 콘텐츠가 없어 사용자가 외면하고, 제작비가 비싸 출판사도 오디오북을 만들지 않는다”

정확한 진단부터 하고 가자. 서정호 미디어창비 디지털사업본부장은 지난달 23일 서울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오디오북 시장 현황’ 세미나에 발표자로 참석, 시장 상황을 이같이 분석했다. 출판사는 제작비가 비싸 오디오북 콘텐츠를 만들 엄두를 못 내고, 콘텐츠가 없으니 이용자는 모이지 않으며, 팔리지 않아 제작비 투입이 더더욱 어렵게 되는 악순환 구조다.

시장 형성을 위해서는 오디오북이 더 많아져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출판사가 오디오북 시장에 뛰어들기 가장 어려운 첫 요인은 높은 제작비다. 오디오북은 통상 원고를 분석하고 이에 맞는 성우를 찾아 녹음 스크립트를 구성하고 녹음 편집 작업을 거쳐 검수, 수정 후 발행된다. 400페이지 분량의 성인 단행본을 연출 없이 1인 내레이션으로 제작할 경우 권당 들어가는 제작비는 700만~800만원 선이다. 실제로 시장에서 오디오북이 제대로 판매가 안 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출판사로서는 만드는 게 곧 손해인 셈이다.

출처=김혜영 한국출판콘텐츠 팀장 발표 자료

가장 큰 비용은 내레이터, 즉 성우의 인건비다. 그러나 이 인건비를 줄이자고 주장하는 것은 당장은 어렵다. 실제로 국내 시장에서 오디오북이 성공하려면 작가나 성우, 둘 중 한 명은 유명해야 한다고 출판계 관계자들은 말한다. 성우가 중요한 것은 오디오북의 특성상, 책의 내용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도록 콘텐츠에 대한 이해와 연기가 병행되어야 해서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의 목소리를 구현한 음성합성시스템(TTS) 덕에 유명인의 목소리를 차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사람이 읽는 것에 비해 매끄럽지 못하다.

이날 세미나에는 김혜영 한국출판콘텐츠 팀장도 발표자로 참석했다. 그는 오디오북 시장이 형성되려면 내레이터와 제작 스튜디오가 중요한 역을 하는 한 축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판사와 저자는 물론, 성우가 모두 참여해 시장 활성화를 위한 방안을 고민해보자는 제안이다. 제작 원가를 줄이면서 효율적으로 더 많은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구성원을 제대로 모아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외에도 판매가 적다 보니 오디오북에 대한 투자가 일어나지 않은 것도 시장 활성화가 되지 못한 원인 중 하나다. 전자책의 경우 시간이 흐르면서 콘텐츠 뷰어나 단말기가 상향평준화되고 있다. 그러나 오디오북은 아직까지 원서를 그대로 읽어내는 수준에 머무른다. 콘텐츠 형식이나 종류도 대체로 현대문학이나 자기계발서 등을 요약본으로 읽어내는 콘텐츠가 대부분이다. 서정호 본부장은 오디오북에 특화한 기획이나 형식, 판매 모델에 대한 구체적 연구가 활성화되지 않아 사용자 경험을 개선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 인공지능 스피커, 판로의 가능성을 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들어 오디오북에 대한 논의가 새로 일어나는 것은 맞다. 네트워크 발달, 스마트폰의 대중화 외에도 ‘인공지능 스피커’가 호재다. 인공지능 스피커를 만드는 플랫폼들은 오디오북 시장 활성화에 관심이 있다. 더 많은 스피커를 팔려면, 이 스피커에서 쓸 수 있는 콘텐츠를 더 많이 채워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혜영 팀장은 인공지능 스피커가 책을 읽어주는 목적으로서가 아닌,  책을 판매하는 채널로서의 역할이 클 것으로 기대했다. 오디오북 자체를 독서의 목적이라기 보다 휴식으로 듣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으며, 이런 부분에 착안해 청취자의 요구에 맞는 기획을 만들어내면 하드웨어 판로가 늘어나고 있는 만큼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봤다.

김 팀장에 따르면 오디오북은 기존 종이책보다는 오히려 스트리밍에 더 근접한 서비스다. 스트리밍은 젊은 세대에게 아주 익숙한 콘텐츠 소비 방식이다. 스트리밍이 음원시장에서 앨범을 끌어내린 것과 달리, 오디오북은 종이책과 직접 경쟁하지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소구층이 달라서다. 스트리밍 오디오북의 경우 종이책 시장을 갉아먹지 않으면서 새로운 독자를 끌어올 기회라고 김 팀장은 설명했다.

서정호 본부장의 경우도 국내 이용자들이 팟캐스트, 팟빵 등을 통해서 음악이 아닌 음성 콘텐츠를 듣는 학습을 하고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봤다. 음악 외에 다른 콘텐츠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자극하고, 경험을 축적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팟캐스트가 오디오북 시장의 가능성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외국의 성공 사례도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 이날 세미나에서 김혜영 팀장이 발표한 영국 오디오북 시장의 사례가 주목할만한다. 닐슨유케이북스앤컨수머(Nielsen UK Books & Consumers)에 따르면 지난해 영국의 다운로드형 오디오북의 연간 판매부수 성장률은 12%다. 오디오북을 사는 주 이용자층은 25~44세 사이인데 이들 중 상당수는 기존의 종이책 독자들이 아니다. 늘 몸에 지니고 있는 스마트폰에 앱을 깔아 대용량 콘텐츠를 쉽게 플레이하는데 익숙한 신규 독자들이다.

김혜영 팀장은 미국의 출판사나 저자들이 종이책을 건너 뛰어 바로 오디오북으로 직행 하고 있고, 심지어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미국 출판시장은 오디오북을 종이책의 2차적 저작물로만 보지 않는다는 신호이며, 오디오북을 내레이티브 창작물의 독립적 산물로 보는 인식전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출처=김혜영 한국출판콘텐츠 팀장 발표 자료

논픽션 작가인 마이클 루이스는 지난 5월 아마존의 오디오북 자회사 ‘오더블’과 계약을 맺고 오로지 음성으로만 들을 수 있는 4종의 콘텐츠 계약을 맺었다. 브라이엄 프리먼이라는 베스트셀러 작가 역시 자신의 19번째 소설을 오더블과 계약했으며, 지금까지는 3인칭 시점으로 써오던 소설을 오디오북 특성에 맞춰 처음으로 1인칭 내레이션용으로 집필 중이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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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댓글

  1. 성우의 “연기”가 들어가는 순간 오디오북은 오디오북이 아니라 “라디오드라마”가 되어버리죠.
    TTS로 듣는 것이 오히려 내용에 집중할 수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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