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번가는 왜 음성인식 전문가를 대표로 내정했을까

이상호 박사를 처음 만난 건 지난 2011년 3월이었다. 한국에 스마트폰 광풍이 불기 시작한 지 1년남짓 지났을 때였다. 이 박사는 당시 네이버의 음성검색팀장이었다. 그에게 인터뷰를 신청했던 건, 당시 네이버의 음성인식 품질이 갑자기 좋아졌는데 그가 네이버 음성인식 기술 개발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받은 이 박사의 명함에는 ‘검색모델링1팀’이라고 소속이 표기돼 있었다. 이는 그가 검색모델링 업무를 담당하다가 음성인식으로 넘어온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네이버 음성인식 품질이 갑자기 좋아진 것이 그의 결합과 관련있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당시 이 박사는 네이버 음성인식 품질이 빠른 시간에 향상된 배경에 대해 “LG전자에서 이미 한 번 개발해본 기술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네이버 음성인식팀은 LG전자 출신들로구성돼 있었다.

그를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다이알로이드라는 회사를 창업했을 때였다. 다이알로이드는 음성인식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앱을 만드는 회사였다. 이후 다음커뮤니케이션(카카오)에 인수됐고, 이 박사는 카카오를 떠나 SK그룹의 일원이 됐다. 2016년 SK플래닛 기술총괄(CTO)을 역임했으며, 현재 SK텔레콤에서 자사 AI 플랫폼 ‘누구’ 서비스를 총괄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박사는 국내 최고의 음성인식과 인공지능 전문가라고 볼 수 있다. LG전자, 네이버, 카카오, SK텔레콤의 음성인식 기술에 그가 관여돼 있다. 국내 거의 모든 음성인식 기술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일이 벌어졌다. SK텔레콤은 자회사 SK플래닛에서 오픈마켓 서비스인 11번가를 분리해 독립법인으로 운영할 계획인데, 신임 대표에 이상호 박사를 내정했다.

최고 음성인식 전문가에게 e커머스 비즈니스 CEO를 맡긴다? 뭔가 어색하다. 산해진미를 만들 수 있는 요리사에게 주방장이 아닌 음식점 경영을 맡기는 것과 같다.

SK그룹은 왜 최고의 음성인식 인공지능 전문가에게 11번가 대표를 맡기는 걸까? 이커머스 비즈니스에 직접 종사한 경험도 없고, CEO 경력이라고는 조그만 스타트업을 운영했을 뿐인 그에게 말이다.

이 박사의 이력을 생각하면 ‘기술’이라는 관점을 빼고 설명하긴 힘들다. 11번가가 기술로 무언가를 해보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국내 이커머스 시장은 ‘가격’으로 경쟁했다. 누가 얼마나 싸게 제품을 판매하느냐에 따라 시장구도가 휘청거렸다. 출혈경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 더 싸게”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이때문에 많은 이커머스 기업이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쿠팡이 등장하면서 ‘오프라인 고객경험’이 이커머스 시장에 새로운 어젠다로 던져졌다. 로켓배송과 쿠팡맨을 선보이면서 쿠팡은 가격 이외의 포인트에서 경쟁우위를 내세울 수 있게 됐다.

반면 11번가는 숙제를 안고 있었다. 11번가는 국내 1,2위를 다투는 오픈마켓이지만 이베이처럼 수익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쿠팡처럼 차별화 된 고객경험으로 미래를 도모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11번가의 시장점유율은 커졌지만 10년째 적자다. 11번가는 차별화된 자신만의 무기가 필요했다. 언제까지나 출혈경쟁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상호 박사를 새로운 CEO로 내정한 것은 11번가만의 내세울 무기로 ‘기술’을 선택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SK그룹은 이상호 대표 내정을 발표하며 ‘한국형 아마존’이라는 표현을 썼다. 아마존의 성공 비결을 ‘기술’로 보고 이를 벤치마킹해 기술로 차별화하겠다는 의미다.

이상호 11번가 대표 내정자는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이커머스는 고객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기술과 접목하면 추가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며 “11번가는 전자상거래 분야에 고객데이터에 기반을 둔 AI 기술을 접목하는 질적 성장을 통해 ‘한국형 아마존’ 모델 구축에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11번가는 ▲빠른 탐색과 검색 ▲개인화 추천 ▲챗봇 기반의 대화형 커머스 기술 개발에 주력할 듯 보인다.

이 내정자는 지난 2016년 개최된 테크플래닛 행사에서 ‘기술이 이끄는 커머스 경험의 혁신’이라는 주제로 오프닝 키노트를 했는데, 검색, 추천, 챗봇을 고객의 쇼핑 경험에 혁신적인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기술로 제시했다.

11번가 관계자는 “기존 유통산업은 가격경쟁 위주로 움직였는데 가격경쟁을 하면서도 유통과 IT의 결합으로 차별화된 고객경험을 제공해야 한다”면서 “가격의 우위를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기술, 고객이 원하는 상품을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기술, 고객이 더욱 편하게 구매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이상호 박사의 CEO 내정은 기술로 고객경험을 혁신하고 경쟁우위를 가져가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CEO가 기술을 잘 이해하고 이끌면 조직 내에서 누구도 기술 중심 회사로 변화하는데 태클을 걸 수는 없을 것이다.

관건은 인내심이 별로 없는 것으로 평가받는 국내 대기업인 SK그룹이 11번가가 변화하는 시간동안 기다려줄 수 있을지 여부다. 기술 기반 고객경험 혁신이라는 것은 지난하고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이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심재석 기자>shimsky@byline.n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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