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산업혁명 시대의 적자, SAP의 변신 시도

SAP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단어는 ERP(전사적자원관리)다. SAP가 글로벌 ERP 소프트웨어 시장의 1위 기업이기 때문이다.

ERP는 기업의 전체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시스템이다. 낭비되는 자원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가시성을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ERP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프로세스다. 모든 임직원이 정해진 프로세스에 따라 업무가 진행돼야 자원의 낭비가 적다. ERP 구축 프로젝트가 일반적으로 프로세스혁신(PI)이나 ‘비즈니스 프로세스 리엔지니어링’이라는 이름과 함께 진행되는 이유다.

SAP와 같은 글로벌 ERP 회사는 ‘베스트 프랙티스’라는 이름으로 선도적인 업무프로세스가 소프트웨어에 내장돼 있다. 글로벌에서 성공한 기업이 일하는 프로세스를 소프트웨어에 내장시켜 고객기업이 그 프로세스를 따라 일을 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

즉 SAP가 파는 것은 단순한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선도적인 업무 프로세스’다. 그런 점에서 SAP는 비즈니스 프로세스 전문기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비즈니스 프로세스 전문기업인 SAP는 최근 변신을 꾀하고 있다. 비즈니스 프로세스를 넘어 데이터 관리.분석 기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런 준비는 생각보다 꽤 오래 전부터 진행돼 왔다. 2010년 데이터베이스관리시스템(DBMS) 업체 사이베이스를 인수했고, SAP HANA라는 인메모리DB를 출시하기도 했다. SAP의 ERP 소프트웨어는 이제 자체 DB인 SAP HANA 상에서만 구동된다.

여기까지는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 전략이다. ERP에서는 구조화된 데이터가 생성되고, 이 데이터는 관계형DB인 SAP HANA에 저장된다. 오라클이 DB의 힘을 지렛대로 삼아 ERP 시장에 진출해서 성공한 것처럼, SAP는 ERP 시장에서의 지배적 지위를 이용해 DB 시장까지 확장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최근 SAP는 이런 ERP와 관련된 비즈니스를 넘어 빅데이터 기업이 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런 움직임을 대표하는 제품은 ‘SAP 레오나르도’다. 레오나르도는 사물인터넷(IoT) 플랫폼이다. SAP는 2020년까지 사물인터넷 분야에 총 20억 유로를 투자하겠다고 밝힌 바 있는데, 레오나르도가 그 첫 결과물이다.

센서에서 발생하는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 통찰력을 제공하고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머신러닝, 블록체인, 데이터인텔리전스,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애널리틱스, 대화형AI 등 7가지 구성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기업은 사물인터넷 환경에서 이런 기술을 이용해 디지털 변혁을 시도할 수 있다고 회사 측은 강조했다.

SAP가 빅데이터 기업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중요한 징검다리로 IoT를 선택한 것에는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일단 SAP가 독일 회사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일은 4차 산업혁명의 뼈대인 인더스트리 4.0이 시작한 곳이다. SAP는 지멘스와 함께 독일 인더스트리 4.0 운동의 양대 축이다.

기존 SAP ERP 소프트웨어는 생산성과 표준화를 대표한다. 최대한 적은 리소스로 대량생산을 하기 위해 표준화된 업무 프로세스로 일하도록 하는 것이 ERP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의 키워드는 대량생산과 표준화가 아니라 자동화와 개인화다. SAP가 20억 유로나 이 분야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3차 산업혁명 시대의 종말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를 통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SAP는 3차 산업혁명 시대를 지배했다. ERP 시장을 개척하고 지배함으로써 세계 톱 4 소프트웨어 회사로 성장했고, 독일 주식 시장의 시가총액 최대 기업이 됐다.

그러나 경쟁상황은 SAP가 설립된 1970년대나 R/3가 처음 나온 1990년대와는 다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SAP도 많은 도전자 중 하나에 불과하다. 거의 모든 IT 기업이 이 경쟁에 도전장을 던졌고, 지멘스나 GE와 같은 글로벌 제조기업도 옆 레인에서 뛰고 있다.

3차 산업혁명 시대의 적자 SAP는 과연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겠다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심재석 기자> shimsky@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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