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김광석’이라 불리는 남자, 최승호

가수 최승호
가수 최승호

최승호는 무명가수다. 여의도 증권맨들에게는 라이브카페 ‘자유2 사장님’으로 통한다. 그래도 20년 넘게 밤마다 통기타 메고 꾸준히 노래를 불렀다. 서른두 살에 첫 앨범을 냈고, ‘마실’이란 3인조 그룹도 했다. 올해로 그의 나이가 마흔넷이 됐고, 3집 가수가 됐다.

“밤마다 김광석 노래를 불러. 손님들 신청곡이 열에 셋은 김광석인걸. 근데 난 원래 발라드 가수야. 이게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노래야”

지난달 30일, 최승호 신곡 ‘제주의 봄’이 나왔다.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아는 최승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노라 읊조리는 허스키한 음색이 아니라,  ‘오월의 싱그런 콧노래’를 마치 성시경 같은 목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제주의 봄’을 타이틀로 한 신보 ‘단상’엔 총 일곱 곡을 담았다. 그중 여섯 곡을 최승호가 직접 작사작곡했다. 생각날 때마다 흥얼거리며 만들어놓았던 수십 곡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것들을 추렸다. 새끼를 세상에 내놓고 설레하는 그를, 여의도 라이브카페 ‘자유2’에서 만났다.

YouTube video

# 영상은 인터뷰 당일, 자유2 라이브 실황 직캠이다.  중간에 두 번 정도 ‘삑사리’가 나는데, 이해해 달라. 사실 술 한 잔 걸친 상태다.

평소 라이브랑 음원 목소리가 많이 달라 놀랐다. 여의도 김광석이 아니라, 여의도 성시경 같다

손님들이 가장 많이 신청하는 곡이 김광석의 노래다. 김광석 노래를 부를 때 목소리를 가늘게 할 순 없지 않나. 그러다 보니 그런 거지. 난 원래 발라드 가수다. 김광석도 좋지만, 발라드도 좋아한다.

언제부터 가수가 꿈이었나

기타를 중2 때부터 쳤다. 소풍을 갔는데 내가 되게 싫어했던 놈이 기타를 갖고 온 거다. 나도 한 번 만져보자, 했더니 싫다고 거절하더라. 꼬라지가 났다. 누나한테 사달라고 졸라서 기타를 얻었다. 우리 누나가 피아노를 쳤었다.

음악가 집안인가

아니다. 누나는 영문학 전공하면서 취미로 피아노를 한 거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다. 내가 음악을 좋아하니까 기타 사달라고 졸랐던 거지. 그때 우리 집에 드럼 풀세트도 있었다.

아버지가 음악 하는 것 싫어하셨을 것 같다

그러니까 기타를 부쉈겠나, 안 부쉈겠나. 아버지가 발로 밟아서 기타를 부쉈던 게 기억난다.

그래도 말 안 들었을 것 같은데

중학교 때 ‘루피앙스’란 밴드를 했다. 스페인어로 ‘깡패들’이란 뜻이다. 드럼이랑 보컬을 맡았다. 그때 멤버 중 하나가 가수 린의 ‘사랑했잖아’를 작곡한 김세진이다. 같이 노래하던 친구 중 잘 된 사람이 많다. ‘나도 노래할 수 있는 환경이 조금 더 좋았다면’ ‘히트곡이 나왔다면’ 가게 안 했을 텐데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생활은 해야 하니까 가게를 인수하고 타협하면서 사는 거다.

자유2는 언제부터 운영했나

원래 자유2에서 노래 부르는 일을 했었다. 그러다가 2014년에 인수해서 운영한 거지. 생계를 위해서 그랬다. 점점 노래 부를 데가 없어지기도 했고, 먹고는 살아야 했으니까.

가수가 노래할 수 있는 라이브카페가 얼마나 있나

많다. 그런데, 직접 기타 치면서 노래하는 곳은 별로 없다. 요즘엔 기계 반주기가 좋아져서 사람들이 굳이 기타를 열심히 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기타를 친다.

대학 땐 어땠나

학교는 6개월 다녔다. 너무 방황을 많이 했다. 아버지랑 그때도 트러블이 많았지. 졸업은 해야 한다고.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때부터 통기타 치면서 밤일을 다녔다. 이종환의 쉘부르 들어봤나? 1973년에 생긴 라이브카펜데, 내가 거기서 1995년부터 10년 넘게 일했다. 내 결혼식에 이종환 선생님이 주례를 봐줬지. 열심히 일해서 예쁘다고.

계속 노래만 불러서 먹고 살았는데

친구들이 학교 졸업하고 취업하면 기껏해야 월급 150만 원 받았다. 근데 나는 업소 몇 군데 뛰면 친구들보다 훨씬 많이 벌었다. 그 달콤함을 못 잊고 노력을 안 했다. 그때 창작을 했었으면 좋았을 걸. 메이저로 올라갈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지금 김씨, 정태춘, 강산에 있던 다음 기획에서 나한테 러브콜을 보냈는데 그런 걸 생각하면 아쉽다. 굴러들어온 복을 내가 걷어찬 거지.

메이저로 가고 싶나

그런 건 아니지만, 나를 대표할 수 있는 노래가 하나 정도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한다. 기타 치며 노래한 지가 벌써 20여 년이 됐으니까.

첫 앨범은 언제 냈나

2005년에 냈다. 내가 서른두 살 때. 음반을 늦게 냈지. 귀거래사라는 노래 불렀던 김신우 형이 내 첫 앨범 제작자였다. 그런데, 잘 안됐다. 활동이 거의 없었지.

음반 활동은 계속하지 않았나

인기 작곡가였던 오태호 형 곡이 ‘응답하라’ 시리즈 때문에 다시 떴다. 그 노래들을 앨범으로 묶어 내면서 신곡이 두 개 들어갔는데 그중 하나를 내가 불렀다. 개인적으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생각만큼 잘 되진 않았다. ‘마실’이란 3인조 팀 활동도 하고, 새 앨범도 내고 그랬지.

자유2는 김광석 노래, 민중가요를 많이 틀지 않나

손님들이 많이 찾는 노래를 한다. 민중가요만 부르고 그러진 않는다. 세대가 바뀌고, 손님들에 따라 거기에 맞는 노래를 불러야겠지.

음반이 나오자마자 라디오를 시작했다

원음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인’노래하나 추억둘’에 2주에 한 번씩 반고정으로 출연키로 했다. 낮 1시다. 진행하는 가수 이규석이 잘 아는 형이다. 라디오는, 예전에 가수 최백호가 진행하는 ‘낭만시대’에 출연하기도 했었다.

앞으로도 계속 노래를 할 건가

가수니까. 잘 알려진 가수들은 자기를 대표할 곡들이 있다. 나도 언젠가 그런 노래를 갖고 싶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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