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블록스 유저에게 인기 많던 캐드 툴, 이젠 로봇 학습 에셋을 만든다
아기는 수없이 넘어지며 걸음마를 배운다. 넘어짐이 곧 학습의 과정이다. 이는 로봇도 마찬가지다. 넘어짐을 반복하면서 제대로 걷는 법을 배우게 된다. 다만 로봇은 현실에서 너무 많이 넘어지면 위험하다. 하드웨어 손상이 우려되고, 자칫 주위에 있던 사람이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봇은 현실보다는 가상 세계에서 먼저 넘어진다.
이를 위해 로봇 개발사들은 가상 학습장에서 로봇을 훈련시키고, 훈련받은 뇌를 장착한 로봇을 현실 훈련에 돌입시켜 격차를 줄이는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시뮬레이션을 현실 세상에 적용한다고 해서 심투리얼(Sim-to-Real)이라고 부른다.
시뮬레이션이 효과가 있으려면 가상 세계의 모습이 현실과 유사해야 한다. 이 때문에 가상 세계에는 현실과 유사한 다양한 물건(객체)이 있다. 각각의 객체에는 질량, 마찰력, 관성 등 물리 정보가 입력돼 있다. 이를 심레디(Sim-Ready)라고 한다.
엔닷라이트는 심레디에 필요한 3D 물건들(에셋)을 제작하는 회사다. 처음부터 심레디를 타깃한 것은 아니었다. 창업할 때는 3D 프린팅을 위한 모델링에 주목했고, 이후 메타버스 붐을 타고 10대 이용자가 많은 로블록스의 아이템 제작 툴로 특히 각광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피지컬AI에 필요한 에셋을 공급하는 기업으로 다시 한번 전환점을 맞고 있다.
3D 프린터, 메타버스, 피지컬AI로 타깃 시장은 그때그때 달라졌지만, 엔닷라이트가 좇던 목표는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박진영 대표는 그 목표를 “쉬운 3D 제작 툴”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했다. 그는 “처음에는 UI·UX를 쉽게 만드는 데 집중했지만, 이제는 대규모 언어모델(LLM) 시대가 되면서 텍스트만 입력해도 원하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이 왔다”면서 “약 7년 만들어 온 CAD 엔진에 LLM을 접목했더니 정말 쉽게 3D 에셋을 만들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 8월 21일 엔닷라이트 판교 본사에서 박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 봤다.
지금의 엔닷라이트가 되기까지 어떤 여정이 있었나요?
저는 원래 디자인 관련 전공이라 3D 툴을 다루던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아티스트의 길은 적성에 맞지 않았고, 디자인보다는 개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삼성전자에서 런처 프레임워크 개발자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갤럭시S 화면에 뜨는 홈 스크린을 개발했습니다. 홈 스크린 화면은 그냥 볼 때는 2D 같지만, 뒷단은 전부 3D거든요.
그 일을 하면서 당시 연구소에 있던 지금의 CTO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현재 부부 사이기도 하고요. CTO는 대학생 때부터 국무총리상을 받을 정도로 게임 엔진에 대한 전문성이 높았습니다.
엔닷라이트는 2020년 1월에 법인을 설립했는데, 당시는 3D 프린터 시장이 성장하던 시기였어요. ‘가정마다 3D 프린터가 보급된다면 3D 모델을 설계하는 데 필요한 기존의 CAD 프로그램은 너무 어렵지 않나’라는 문제의식으로 3D 엔진을 만들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 시절 3D 툴을 다뤄봤다가 포기한 당사자였거든요.
문제는 게임 엔진과 캐드 엔진은 다르다는 것을 간과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3D 엔진을 만들긴 했지만, 너무 힘든 과정이었어요. 이 정도로 어려운 것을 알았다면 시작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로블록스 게이머들에게는 어떤 과정으로 알려지게 됐나요?
한때 로블록스 시장을 봤던 이유는 캐드 엔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와 비슷합니다. 메타버스가 한창 대세였을 시기에 로블록스가 인기를 끌었는데, 10대들이 쓰기에는 가장 유명한 오픈소스 3D 디자인 툴인 ‘블렌더’가 너무 어려웠어요.
처음 창업할 때 ‘3D 프린터가 보급된다고 해도 사람들이 캐드 소프트웨어를 쓰기 어려워서 원하는 디자인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로블록스 같은 메타버스 게임플랫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0대들이 원하는 게임 아트가 있는데 툴이 어려워서 제대로 구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당시 학교에 교육 프로그램을 많이 다녔습니다. 교실에 들어가면 로블록스를 하는 아이들의 눈빛부터 달랐고요.
결국에 시장의 타깃은 변화하긴 했지만, 저희가 생각했던 문제점은 늘 같았어요. 기존 캐드 프로그램은 너무 어려우니 쉬운 제작 툴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현재 피지컬AI 산업에도 적용하고 있어요.
피지컬AI 시장은 기존 시장들과 어떤 점이 다른가요?
사실 아직도 산업 디자인 영역에서 저희 툴에 대한 수요는 많아요. 3D 디자이너들도 디자인 업무에 AI를 활용하고 싶다는 니즈가 크거든요.
하지만 산업 디자인 시장의 크기는 한계가 있어요. 저도 놀랐던 부분인데, 미국의 산업 제품 디자이너 수는 3만명밖에 되지 않아요. 캐드를 이용해 설계 자동화를 하려고 해도 3D 디자인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에셋 수도 많지 않고요. 이 산업은 여전히 사업의 한 트랙으로 가져가고 있지만, 피지컬AI 시장이 갑자기 성장하면서 이 분야에 집중하게 되었어요.
피지컬AI 시장은 기존 제품을 양산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로봇을 학습시키기 위한 목적이잖아요. 기존 3D 에셋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거든요. 시뮬레이션에 필요한 에셋은 모양만 정확하게 만들어준다고 전부가 아니니까요. 물리 법칙이 담긴 수치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그것이 기존 디자인 캐드 툴들이 못 따라가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피지컬AI 에셋에는 표면 재질에 따라 미끄러운 정도, 마찰력까지 온갖 물성 정보가 필요해요. 일례로 로봇이 물류센터에서 박스를 들어서 나르려면 박스 종이의 두께 값에 따라서 찌그러지는 정도가 전부 다르기 때문에 그것도 계산을 해줘야 할 정도입니다.
게다가 피지컬AI 시장은 막 성장하는 단계라 3D 디자이너들이 이 산업에 많지 않아요. 반면에 3D 디자인과 에셋은 굉장히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걸 로봇 연구원 분들이 하고 계세요. 본업의 분야가 아닌 문제로 시간을 보내야 하니 당연히 비효율적으로 작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제 피지컬AI 산업을 주요 시장으로 보고, 전문 디자이너가 아니어도 쉽게 에셋을 만들 수 있는 툴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요즘 피지컬AI 산업에서 주목받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나요?
일단 국가에서 중요성을 알아주시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만의 흐름도 아니고 세계적으로 모든 나라가 이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것도 다행이고요. 현재 미·중 패권 전쟁으로 전세계 표준화를 공략하던 중국에 제재가 생겼고, 많은 나라에서 중국의 솔루션을 쓰기에 꺼리는 분위기도 형성되었습니다. 향후 2, 3년간 한국에 주어진 골든타임을 제대로 보낸다면, 피지컬AI의 중심을 한국으로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희는 피지컬AI 산업이 열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아마 그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봅니다.
작년 3월만 해도 저는 어디를 가도 ‘AI 시대가 온다는데 그러면 3D 디자이너도 궁극적으로는 없어지는 거 아닌가요’ 혹은 ‘사람이 왜 디자인해야 돼요?’ 같은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저는 그럴 때마다 역으로 ‘그 AI 시대가 온다면 누가 제일 빠르게 성장할 것 같으세요?’라고 물었어요. 제 생각에는 저희가 제일 빠르게 갈 것 같았거든요.
AI 시대가 온다면 학습 데이터가 필요할 텐데, 엔닷라이트는 자체 제작 툴에서 이용자들이 설계한 디자인 데이터들을 활용할 수 있거든요. 당시에 LLM이 이 정도로 커질지는 몰랐기에 지금처럼 구체적인 그림은 그릴 수 없었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저의 논리였습니다.
그러다가 MCP 표준 규격이 생기면서 진짜로 그 시장에 진입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지난해 3월에 캐드 엔진에 MCP로 LLM을 접목시키면 될 것 같아서 테스트를 해봤더니 너무 잘 작동했어요.
지난해 중국에서 AI 주제로 발표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원래 주력하려던 솔루션보다 이 AI 기능이 더 주목을 받았습니다. ‘우리 회사에도 해줄 수 있느냐’는 요청으로 줄 서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때 이 기능을 조금 더 발전시켜야겠다고 생각했고, 지난해 6월에 첫 계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캐드 엔진에 LLM을 접목시킨 게 ‘트리닉스’인가요? 어떤 기능을 하는지 더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우선, 텍스트나 이미지를 입력하면 기본적인 3D 형태를 만들어줍니다. 여기에 물성 정보를 자동으로 넣어주는 기능을 추가했어요. 이 물성 정보 추론에는 엔닷라이트의 자체 알고리즘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동화 과정을 거치면 사람이 만드는 것보다 확실히 빨라요. 다만, 추론한 값과 실제 물리 정보가 같은지는 직접 확인해봐야 하거든요. 그래서 최근에는 실제와 비교하면서 이 격차를 점차 줄여나가는 작업도 자동화하고 있어요. 추론값과 실제 물리 정보 사이의 이 격차를 ‘심투리얼갭’(Sim-to-Real Gap)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현실과의 정합성을 높이기 위한 데이터 파이프라인을 만드는 산업은 이전까지는 없던 분야입니다. 아직 시장에 진입한 기업들도 없고요. 엔닷라이트는 이 시장을 초기 진입해서 1위 기업으로 성장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피지컬AI 분야에서 고객사는 얼마나 확보했나요?
일단 파이프라인이 확보된 곳은 20곳이 넘습니다. 전부 대기업들과 하고 있어요.
아직 고객사에서 에셋을 직접 만들어서 쓸 수 있는 단계는 아니기에 엔닷라이트에서 시뮬레이션 에셋부터 환경 구축까지 현재는 전부 풀패키지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엔닷라이트에도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고요. 이 파이프라인에서 직접 리얼데이터를 접해 보면서 어떤 것이 효과적인지를 깨닫고 고도화할 수 있으니까요.
아직 시장 초기이다 보니 고객사와 함께 표준을 만들어가고 있는 상태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실제로 모든 에셋 데이터를 현실과 정합성이 일치되도록 100% 똑같이 만드는 것이 중요한지, 아니면 학습에 중요하게 쓰일 만한 일부 70% 정도만 일치하면 데이터 경량화를 하는 방식이 효율적인지도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심레디 에셋 중 가장 구현하기 어려운 유형의 에셋이 있나요?
엔닷라이트에서는 구현하고 있긴 한데, 현재 시장에서 가장 어려운 에셋은 유연체라 불리는 비정형적인 형태를 지닌 것들이에요. 예를 들면, ‘충전 케이블’ 같은 오브젝트요. 수요는 굉장히 많은데, 로봇이 학습할 3D 에셋으로 만들기에는 난이도가 높습니다.
구조를 보면, 플러그와 연결되는 윗부분은 굉장히 단단하잖아요. 반면에 케이블은 굉장히 유연하게 흔들리고요. 케이블 소재에 따라 흔들리는 정도도 전부 다릅니다. 그런데 엔닷라이트는 소재와 물성 데이터까지 추론해 에셋을 생성하기 때문에, 이런 유형도 다 제작 가능하다는 걸 보여드리면 고객사에서 좋아합니다.
해외 사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일단 한국에서의 사업에 집중하려고 하고 있어요. 한국 제조 기업들이 이미 해외에서 영향력 있는 회사라 한국에서의 레퍼런스를 잘 확보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편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레퍼런스가 결국 세계 표준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봐요.
왜냐하면 일본도 사실 한국처럼 피지컬AI를 제조 현장에 투입하는 일에 굉장히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아무래도 한국보다 느리고 기반 기술도 많이 약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잘 만들어 놓은 시스템을 일본에 가져갔을 때 시장에서도 반길 거라고 판단하고 있어요.
그래서 당장은 국내에서 제조기업 대상으로 브랜드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올해 말에서 내년 초에 일본이랑 대만 시장 보고 있고요.
로보틱스 시장과 파운데이션 모델 시장은 미국이 큰데, 프론티어랩들이 연간에 지출하는 예산 규모를 보면 언젠가 미국도 진출해야하는 시장으로 보고 있어요. 그래서 미국 법인에서도 올해 말부터 비즈니스를 해보려고 합니다.
피지컬AI 시장이 열리기까지 타깃하는 시장의 변화를 다채롭게 겪었는데, 경영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창업 초기에 데스밸리를 겪은 시절이 있었어요. 법인을 설립한 후 3개월도 되지 않아서 코로나를 맞이했어요. 코로나 시절에는 투자받기도 쉽지 않았고, 목표로 하던 3D 프린터 시장도 안정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2020년 하반기에 메타버스가 주요 키워드로 등장했어요. 그렇게 메타버스를 주요 시장으로 관심있게 보게 됐고, 첫 시드 투자는 2021년 3월에야 받았습니다. 개인투자조합에서 받았는데, 제조업에 굉장히 인사이트가 있는 대표님이셨어요.
투자금과 함께 법인 대출을 받은 것으로 런웨이를 하다가 자금이 정말 안 남았던 시점이 그해 8월이었어요. 8월 27일에 투자금이 들어왔는데, 8월 25일이 월급날이잖아요. 부족한 금액을 채우기 위해 그때 제 돈을 법인에 넣기도 했습니다.
다음달인 9월 25일에 저도 법인에 월급을 받았는데, 통장에 200만원이 찍혀 있던 것이 기억에 오래 남아요. 제가 창업하고 법인에서 처음 받아본 월급이었거든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하기도 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힘든 점을 말하자면, 부부 창업자다 보니 위안이 되는 순간도 있지만 아무래도 함께 일하다 보니 일과 가정을 양립하기 힘들었던 순간이 많았어요. 아이가 두 명이거든요. 아들은 3살부터 7살까지 200명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하원을 제일 늦게 했어요. 밤 8시 30분에야 아이들을 데리러 갈 수 있었거든요. 아이들의 일기에 엄마가 바쁘다고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면 마음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투자 현황은 어떻게 되고 계신가요?
어려운 시기였지만, 올해 150억원을 투자받았어요. 단순 투자를 받았다기보다 이번 라운드에 기존 주주분들이 꽤 많이 참여해주셨다는 점이 감사한 마음입니다. 네이버 D2SF는 3번 연속으로 해주시기도 했고요. 얼마나 어려운 결정일지 잘 알고 있어서 열심히 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누적 투자 금액은 254억 정도 됩니다. 올해 말에는 시리즈 B를 목표로 투자를 유치할 예정입니다.
향후 로드맵이 어떻게 되시나요?
우선 피지컬AI 산업 업계에서 글로벌 표준을 세우는 일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결국, 에셋을 제작하면서 수집한 데이터와 학습 경험들을 토대로 로봇이 세상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평가할 만한 기준점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역사상 해외 시장에서 국내 소프트웨어가 1위를 한 기록은 없었다고 알고 있어요. CTO가 창업부터 지금까지 목표로 삼는 지점이 있거든요. 쓰는 컴퓨터에도 붙여놨어요. ‘내가 만든 소프트웨어 기술을 기반으로 국가 산업 경쟁력에 이바지한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 말처럼 국내에서 표준이 될 서비스를 만들어 해외에서도 모든 산업에 이바지하는 기업이 되고자 합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오민선 기자>omsoms94@byline.networ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