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일본 스타트업 시장 “딥테크 후기·사업 회사 협업 노려라”
흔히 일본에 대해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말합니다. 지리적으로는 가까우나, 문화 등 여러 측면에서 크게 다르다는 걸 말할 때 쓰는 표현이죠.
스타트업 씬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업 시장의 분위기가 한국과 일본은 크게 다릅니다. 그래서 투자하려는 벤처캐피탈이나 일본 시장에서 투자받으려는 스타트업 입장에서도 한국과는 다른 전략이 필요합니다.
지난 28일 부산 e스포츠 경기장에서 열린 ‘스타트업생태계컨퍼런스(이하 스생컨) 2026’에서 한경욱 인에이블X(enableX Inc.) 이사는 일본 스타트업 시장에 대해 “VC는 딥테크 영역의 후기 라운드에 주목해야 하고, 스타트업은 일본 사업 회사와의 협업을 전제로 투자를 받는 방안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일본에서만 28년을 살고 있는 한 이사는 글로벌 컨설팅 기업의 현지 지사에서 근무한 후 스타트업을 창업, 일본 상장사 인에이블X에 사업을 매각한 후 해당 기업에서 투자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일본 시장에 대한 조언을 들어볼까요?
일본 스타트업 투자 10년 “돈 별로 못 벌지도?”
먼저 일본 스타트업 시장을 보면, 투자가 이뤄진 지 이제 10년이 막 넘은 시장입니다. 2013~2014년 본격적으로 스타트업 펀드 조성이 시작돼, VC들이 이제야 성적표를 받아들기 시작했죠.
일본 자본이 10년 동안 겪어본 현지 스타트업 투자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먼저 스타트업 투자에서 거둬들일 수 있는 돈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닛케이 지수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그로스 시장의 성장률은 제자리걸음입니다.
또 자금 회수도 어렵습니다. 2018년 일본 중고거래 플랫폼 메루카리가 기업가치 7조원으로 상장한 이후, 기업공개(IPO)로 유니콘 이상의 엑싯에 성공한 사례가 전무합니다.
한 이사는 “재무적 투자자(FI) 입장에서는 얼마나 성과를 거둬들일 수 있는지 예의주시하는 상황”이라며 “2014년 조성된 펀드 회수율이 1.5배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에, 앞으로 기존 사례에서 빅딜이 이뤄지지 않는 한 FI가 일본에서 투자를 하는 걸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게다가 최근 들어서는 자본 조달 비용도 늘어났습니다. 다카이치 정권 이후 금리 인상과 중동 정세까지 겹쳐진 지금, 한 이사는 기관투자자들이 스타트업 투자를 망설일 수밖에 없다고 봤습니다.
일본 스타트업 투자, SI 노린 기업이 이끈다
그럼에도 전체 펀드레이징 자체는 크게 줄지 않았습니다. 전략적 협업을 하려는 사업 기업들이 출자자(LP)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한 이사는 “이들이 재무적 수익보다 전략적 시너지를 더 보기 때문에, 회수율이 낮아도 펀드 결성 건수 자체는 크게 줄지 않았다”며 “기업형 벤처캐피탈(CVC) 대비 독립계 VC의 펀드레이징이 2024년부터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금융 기업의 CVC 펀드레이징이 크게 늘어났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펀드의 또 다른 특성으로는 IPO를 통한 엑싯이 어렵기 때문에, 100억원 이상 펀드가 적다고도 짚었습니다.
먹고 살기 어려워진 독립계 VC들의 생존 전략은 2인조 공동운용(Co-GP) CVC 결성입니다. 한 이사는 “일본 사업 회사는 단순 LP로 펀드에 투자하지 않고, 전략적 투자(SI)를 위해 CVC 펀드를 만들고자 한다”며 “사업 회사는 CVC를 운영할 노하우가 없기 때문에 독립계 VC와 협업해 2인 조합 Co-GP 형태의 CVC가 만들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비즈니스 모델은 일종의 VCaaS(VC as a Service)로, 한 이사는 독립계 VC 입장에서는 운용 보수를 챙겨 확실한 수익성을 보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일본 스타트업 창업 트렌드
한국 스타트업 시장을 딥테크가 이끌고 있듯이,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대되는 분야도, 투자받는 분야도, 창업하는 분야도 모두 딥테크입니다.
한 이사는 일본 스타트업 시장에서 가능성이 높은 분야로는 딥테크, 특히 방위를 꼽았습니다. 그는 “다카이치 정권에서 올해 뽑은 집중 육성 산업 대부분이 딥테크고, 특히 일본 방위 예산이 GDP 대비 1%에서 5%까지 올라갈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방산, 우주, 반도체 등이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일본 시장에서 대규모 투자 유치에 성공한 사례는 모두 딥테크입니다.
현장 분위기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주 21~23일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열린 스타트업 업계 1000여 명 규모 컨퍼런스의 피치 대회 우승자는 우주에서 지구로 화물을 되돌려 보내는 운송시스템을 만드는 항공우주 스타트업입니다. 이 외에도 결승 12곳 중 8곳이 딥테크 관련 기업이었습니다.
한 이사는 “일본도 창업자들이 투자 유치가 필요한 분야는 딥테크라고 생각하기에, 딥테크가 아닌 분야의 창업자들은 투자 유치에 대해 보수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젊은 창업자들의 투자 유치 분위기도 변하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입니다. 대표적인 예시는 AI 스타트업 아카리(Akari Inc.)로, 창업 초기 1억엔(한화 약 9억원) 투자만을 유치한 후, 미쓰비시전기 등으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유치해 단숨에 유니콘을 넘보는 회사가 되었습니다. 한 이사는 “AI로 창업해 시스템 통합(SI)로 운영하다가, 협업하던 대기업에 대규모 투자와 협업을 끌어내는 방식을 일본 젊은 창업자들이 본보기로 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 이사는 “일본 펀드 규모가 작아 후기에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많지 않아 딥테크 영역의 후기 라운드도 충분히 시장에 있을 거라 생각된다”며 “스타트업 또한 일본 사업 회사 협업을 전제로 투자를 받는 방안을 고려하길 바란다”고 마무리했습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성아인 기자> aing8@byline.networ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