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뭔가요] 애플의 새로운 비전 ‘공간 컴퓨팅’
애플이 2023년 6월 25일 새로운 증강현실(AR) 헤드셋 ‘비전 프로’를 출시하면서 언급한 키워드는 ‘공간 컴퓨팅(Spatial Computing)’이다. 팀 쿡 애플 CEO는 “맥이 개인용 컴퓨팅을, 아이폰이 모바일 컴퓨팅을 소개한 것처럼 비전 프로는 공간 컴퓨팅을 소개할 것”이라며 “이것은 강력한 개인용 기술에 새로운 차원을 가져올 여정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비전 프로를 “최초의 공간 컴퓨터”라고 소개했다.
공간 컴퓨팅이라는 표현을 애플이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다. 3D 캐드 소프트웨어 등의 업계에서 주로 소개됐던 개념이다. 대중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애플이 이 개념을 차세대 비전으로 제시하면서 상황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애플이 나선 만큼 PC와 모바일에 이어 ‘공간 컴퓨팅’이 새로운 주류 컴퓨팅 플랫폼으로 떠오를 가능성도 있다.
과연 공간 컴퓨팅이 무엇인지,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지 알아보자.
공간 컴퓨팅이란
공간 컴퓨팅이라는 개념이 제시된 곳은 2003년 MIT에 재학중인 사이먼 그린월드(Simon Greenwold)의 석사논문이다. 그는 ‘공간 컴퓨팅’이라는 논문에서 “기계(컴퓨터)가 실제 물체와 공간을 참조하고 조작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인간과 기계가 함께 상호작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지금까지 컴퓨터 속의 세상과 물리적 세계는 단절돼 있었다. 실제 세계는 아날로그이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세상에 디지털 정보를 더하면, 훨씬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 점에서 공간 컴퓨팅이란 현실과 디지털이 통합된 환경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예로 길찾기와 내비게이션을 생각해보자. 현실에는 디지털 데이터화 되어 있지 않은 물리적인 길들이 있다. 내비게이션 지도는 현실의 길들을 디지털 데이터로 만들어 사람이 인식하기 쉽게 그래픽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지도에 위치정보 등을 통합하면 내비게이션이 된다.
그러나 내비게이션은 위치정보라는 매개로 현실과 디지털 세계를 연결한 것일 뿐, 여전히 현실 세계와 디지털 세계는 단절돼 있다. 운전할 때는 현실의 윈도우와 내비게이션을 동시에 번갈아 보면서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동차의 고급(?) 옵션에 들어있는 헤드업 디스플레이를 생각해보자. 현실세계의 길 위에 디지털 세계의 지도와 경로가 표시된다. 운전자는 자동차 앞유리만 보면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있다. 현실과 동떨어진 디지털 세계에서 가는 길을 표현하는 것이 내비게이션이라면, 헤드업 디스플레이는 현실세계와 디지털 세계를 통합해서 보여준다.
애플이 공간 컴퓨터라는 이름으로 AR 헤드셋을 출시한 것은 이 같은 이유다. VR 헤드셋을 쓰면 현실 세계에 디지털 세계를 덧입힐 수 있다.
공간 컴퓨팅은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현실 세계에서 데이터를 뽑아낼 수 있는 사물인터넷(IoT), 현실과 디지털이 복제돼서 상호작용하는 ‘디지털 트윈’, 현실에 디지털 세계를 더해주는 AR 등이 함께 어우러져 존재해야 한다.
이는 메타가 이끌어온 ‘메타버스’ 세계와는 조금 다르다. 마크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이라는 회사 이름을 ‘메타’로 바꿀 정도로 메타버스에 꽂혀 있다. 애플과 구글에 모바일 컴퓨팅 플랫폼을 내줬기 때문에 그들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저크버그의 생각이다. 모바일 컴퓨팅 이후 차세대 컴퓨팅 플랫폼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는 ‘메타버스’가 그 플랫폼이라고 판단했다.
메타가 그리는 메타버스는 AR보다는 VR에 가깝다. 가상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연결되어 함께 커뮤니케이션 하고 협업하고 즐기는 그림을 그린다. 메타버스를 위한 디바이스로 메타는 ‘퀘스트’를 제시하는데, 이 디바이스는 VR에 방점이 있는 헤드셋이다.
공간 컴퓨터와 인간의 인터페이스
우리는 PC를 조작할 때 키보드와 마우스를 주로 이용한다. 일부 랩톱의 경우 화면을 터치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윈도우나 맥OS는 키보드와 마우스에 최적화된 UI를 제공한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같은 모바일 디바이스는 터치가 기본이다. 복수의 지점 동시 터치를 인식하는 멀티터치와 같은 기술이 모바일 혁명을 가져왔다.
공간 컴퓨팅 시대의 인터페이스 도구는 무엇일까? 애플이 비전 프로를 발표하며 제시한 것은 인터페이스는 “눈, 손, 음성”이다.
컴퓨터에서 파일을 클릭할 때를 생각해보자. 아이콘 위에 마우스를 올려 놓으면 아이콘 색이 바뀌고 클릭하면 파일이 열린다. 비전 프로는 이를 눈과 손으로 바꿨다. 앱 아이콘을 쳐다보는 것은 마우스 포인터를 올려놓은 것과 같다.
비전 프로가 이용자 눈을 추적해서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인식하는 기술이 적용됐다. 또 마우스를 클릭하는 것처럼 허공에서 손가락을 탭하면 앱이 열린다. 화면 아래의 글을 보기 위해 마우스 휠을 돌리는 것 대신 고개를 숙여 내려보거나 허공에서 손으로 가볍게 밀어서 스크롤 할 수 있다. 손가락의 움직임을 인식해 가상의 키보드를 입력할 수도 있다.
음성은 공간 컴퓨팅과 뗄 수 없는 인터페이스다. 눈이 정보의 입력을 담담한다면 목소리는 정보의 출력을 담당한다. 애플은 이미 시리와 같은 AI 음성비서 기술이 있으며, 당연히 비전 프로에 탑재됐다.
무엇에 사용하나
지금까지 공간 컴퓨팅은 주로 CAD 업계에서 화두에 올랐었다. 이들이 지금까지 현실 세계와 디지털 세계를 복제하는 디지털 트윈에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산업 현장에서 공간 컴퓨팅을 활용하면 더욱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예를 들어 매우 복잡한 기계를 수리해야 하는 엔지니어가 있다고 해보자. 자신이 능숙하게 다루는 기계가 아니라면 수리 방안이 담긴 설명서나 사내 인트라넷 지식센터 등에서 방법을 알아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간 컴퓨팅 환경이 구현되면 그는 AR 헤드셋을 쓰는 것만으로 수리 방법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자동차 헤드업 디스플레이처럼 현실의 기계에 디지털 데이터와 수리방법이 안내될 것이기 때문이다.
애플은 비전 프로를 출시하면 더 큰 그림을 그렸다. 이런 산업현장을 넘어 일상의 업무와 생활, 커뮤니케이션, 엔터테인먼트를 할 수 있는 하드웨어 플랫폼으로 비전 프로를 상정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했던 그 역할처럼 말이다.
애플의 발표에 따르면 비전 프로 이용자는 영화를 시청하고, 음악을 들으며, 사진을 탐색할 수 있다. 또 프레젠테이션에서 공동 작업을 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앱, 화상회의 앱, 어도비 라이트룸 등을 열 수도 있다.
공간 컴퓨팅 환경에서는 스크린 크기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영화나 게임을 즐길 때는 그 어떤 큰 스크린보다 몰입감을 경험할 수 있고, 스포츠 경기를 감상할 때는 마치 내가 경기장 위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실제 내가 위치한 공간이 앱을 구동하는 공간이 된다. 영화 아이언맨에서 주인공 토니 스타크가 아이언맨 수트를 설계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허공에 홀로그램처럼 설계도면이 나타나고 토니 스타크는 허공에 팔을 휘저으면서 설계를 완성한다. 영화에서 토니 스타크는 아무런 디바이스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현실에서는 AR 헤드셋과 같은 디바이스가 필요하다. 지금은 고글처럼 다소 큰 헤드셋이지만 기술이 발전하면 안경이나 콘택트렌즈 등으로도 유사한 환경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공간 컴퓨팅을 이끄는 회사들
애플 : 애플은 자사의 AR 헤드셋 비전 프로를 ‘공간 컴퓨터’라고 명명했다. 이 공간 컴퓨터에는 비전OS라는 공간 컴퓨팅 전용 운영체제가 탑재돼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 마이크로소프트는 공간 컴퓨팅이라는 용어 대신 확장현실(XR)이라는 표현을 즐겨 써왔다. 이 회사는 2016년 XR 플랫폼으로 ‘홀로렌즈’를 발표했다. 2019년 홀로렌즈2를 발표했으나 이후에 홀로렌즈3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가 XR 사업을 접는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메타 : 메타는 메타버스에 올인을 선언한 회사다. 이를 위한 VR 및 MR 헤드셋을 제공한다. 다만 메타는 AR보다는 VR, 가상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연결된 환경에 더 집중해왔다. 메타는 호라이즌 월드라는 메타버스 세계를 제공한다. 가상의 세계에서 농구를 즐기거나 코메디 클럽 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호라이즌 월드의 이용자가 점차 감소하고 있다는 뉴스도 나오는 상황이다.
구글과 AWS : 구글과 AWS는 공간 컴퓨팅 가능케 하는 사물인터넷, 머신러닝, 시뮬레이션, 디지털 트윈 등 기반 기술을 클라우드에서 제공한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심재석 기자>shimsky@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