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석의 입장] 이재명 대표의 ‘AI 육성론’에서 빠진 것

#1
TSMC가 현존 최고의 반도체 파운드리 회사로 자리잡은 ‘결정적 순간’은 2013년 애플과 파트너십을 맺으면서부터다. 애플은 아이폰에 들어가는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인 ‘A8’ 생산을 TSMC에 맡기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삼성전자가 애플 AP를 생산해 왔었다. A8에 이어 A9까지 TSMC와 삼성전자는 함께 애플에 공급했다. 그러나 A10부터는 아이폰의 모든 AP 물량을 TSMC가 도맡아 만들고 있다.

AP 파운드리를 바꾸는 것은 애플 입장에서도 모험이었다. 하지만 스마트폰 시장에서 경쟁하는 삼성전자에 AP를 맡기는 것보다 자신과 경쟁하지 않는 TSMC와의 모험을 선택했다.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TSMC를 로켓에 태웠다. 애플과 파트너십을 맺으면서 TSMC의 역량이 급상승했고, 이제는 파운드리 시장에서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애플은 단순히 TSMC의 고객이 아니었다. TSMC가 자신들이 원하는 칩을 생산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유도했다. TSMC에 막대한 선금을 지급하며 초기 생산 물량 확보와 최우선 공급권을 약속했다. 이를 통해 TSMC는 신규 팹을 건설했고, 애플의 주문과 요구에 맞춰 양산 품질을 끌어올렸다. TSMC가 애플이라는 고객을 만난 것은 반도체 업계 전반의 판도 변화를 이끈 사건으로 기록할 수 있다.

#2
미국이 반도체 산업을 탄생시키고, 여전히 세계 최고의 반도체 회사들을 보유한 배경도 역시 ‘고객’이었다. 실리콘밸리의 시조인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미 항공우주국(NASA)을 고객으로 만나면서 자신들이 개발한 기술을 비즈니스화할 수 있었다.

NASA는 1957년 페어차일드가 설립된 직후 세계 최초의 집적회로(IC)를 구매한 첫 고객이자, 우수 고객이었다. 당시 NASA는 소련과의 우주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페어차일드 칩이 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무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NASA뿐 아니라 미 국방부도 무기의 성능을 혁신하기 위해 페어차일드의 반도체를 구매했다.

페어차일드의 성공 이후 다양한 디지털 기업들이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남쪽에 모여들었다. 페어차일드의 창업자들은 다시 독립해 이 지역에서 인텔을 설립했고, 반도체가 탑재된 컴퓨터 회사인 HP도 이 지역에서 설립됐다. 지금 우리가 이 지역을 실리콘밸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실리콘이 반도체의 원료이기 때문이다. 즉 미국이 자랑하는 실리콘밸리는 NASA의 반도체 구매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도 있다.

#3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AI 투자 100조 원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이 대표는 지난 14일 국내 AI 반도체 스타트업 퓨리오사AI를 방문해 이같이 밝혔다. 이 대표는 ▲AI 데이터 집적 클러스터 조성 ▲AI 핵심 자산 GPU 최소 5만 개 확보 ▲AI 전용 NPU 개발과 실증 적극 지원 등을 약속했다. 그는 “AI 관련 예산을 선진국을 넘어서는 수준까지 증액하고자 한다”면서 “정부가 민간 투자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가 차기 대통령이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되어서 이같은 정책을 실행해 나아간다면 반가운 일이다. AI는 글로벌 경제나 국방 등에서 헤게모니를 바꿀 수도 있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AI에 뒤쳐질 경우 국가경쟁력이 뒤쳐질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정부가 연구자금을 제공하고, 대규모 국부 펀드를 만들어서 AI 기업에 투자를 하는 것만으로 국가적 AI 경쟁력을 올리기는 쉽지 않다. 돈만 있다고 기술력이 막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눈먼 돈’만 시장에 퍼주고 끝날 수도 있다.

정부가 목표한 바를 이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부가 유능한 고객이 되는 것이다. 애플은 TSMC의 유능한 고객이었다. 아이폰의 메인 프로세서가 필요로 하는 바를 명확히 TSMC에 주문했고, 동시에 TSMC가 자신의 요구를 충족하는 제품을 가져올 수 있도록 지원을 했다. NASA나 미 국방부도 페어차일드의 유능한 고객이었다. 이들은 지구밖으로 우주선과 우주인을 보내기 위해, 더 정확한 무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요소를 페어차일드에 요구했다.

불행히도 대한민국 정부는 기술 기업의 좋은 고객이었던 적이 별로 없다. 기술 기업 입장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혈세를 아끼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은 듯 보였다. 혁신적이고 좋은 제품을 요구하기보다는 싼 제품을 구매하는 데에 혈안이 돼 있었다. 기술을 공급하는 기업들이 혁신적 기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저렴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배경이 됐다.

앞에서 언급했듯 AI 반도체나 AI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정부가 AI 반도체나 AI 기술 업체의 좋은 고객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가 AI 반도체나 AI 기술을 필요로 해야 한다. 무조건 고가로 구매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TSMC가 양산 품질을 끌어올릴 수밖에 없도록 애플이 요구한 것처럼 정부도 고객으로 기술 기업에 요구사항이 분명해야 한다. NASA가 페어차일드에 요구했듯, 우리 정부도 만들려는 것이 분명해야 요구도 분명하게 할 수 있다.

이 대표가 방문한 퓨리오사AI는 얼마 전까지 메타에 회사를 매각하는 방안을 검토했었다. 운영이 불가능할 정도로 자금난에 빠졌었기 때문이다. 이 회사에 가서 이재명 대표는 AI 발전을 위해 GPU(사실상 엔비디아 제품)을 많이 구매하고, NPU는 실증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실증을 지원하는 후견인을 넘어 NASA나 애플처럼 국내 AI 관련 기술의 선도적 구매자이자, 혁신 기술을 요구하는 고객이 되기를 기대한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심재석 기자>shimsky@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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