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주는 공짜 ERP, 누구를 위한 것일까?

2000년대 초반 국내에는 전사적자원관리(ERP) 소프트웨어 전문업체를 자처하는 회사들이 100여 개에 달한 적이 있다. 정부가 중소기업 정보화를 위해 정책자금을 지원하면서, 눈먼 돈을 따먹기 위한 회사들이 좀비처럼 늘어났던 것이다.

이 때 많은 기업들이 ERP를 도입했지만 성공적이었던 사례는 많지 않다. 정부 지원금을 노리고 급조한 소프트웨어의 품질이 좋았을 리 만무하고, 이 회사들이 지속적인 기능개선과 유지보수 서비스를 제공했을 리는 더더욱 만무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때 ERP를 도입한 회사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나중에 다시 새로운 ERP를 도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과적으로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된 셈이다.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던 ERP 전문기업들도 시간이 흐르자 대부분 사라졌다.

정부는 중소기업 정보화라는 좋은 뜻으로 사업을 진행했지만, IT업계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시장을 교란한 정책이라는 비판 사례로 남아있다.

그런데 요즘은 자금지원을 넘어 정부가 직접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 소프트웨어 업계의 한숨을 자아낸다.

중소기업기술정보진흥원(이하 기정원)은 지난 2013년부터 ‘경영혁신플랫폼’이라는 서비스를 무상으로 진행하고 있다. 금융관리, 수납지급관리, 매입·매출관리, 전자세금계산서, 부가세관리, 영업관리, 원산지증명 등 기본기능부터 산업별 특화 기능을 클라우드 기반으로 제공한다.

즉, 정부가 ERP를 중소기업들에게 공짜로 나눠주고 있다는 의미다. 기정원 임래규 원장의 언론 인터뷰에 따르면, 2015년 말 기준 1만2727개 중소기업이 해당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국내에는 엄연히 중소기업 대상 ERP 소프트웨어를 판매하고 있는 회사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부족한 자본에도 연구개발 인력을 고용해 수년 동안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시장에 공급해왔다. 공공기관이 무료 ERP를 공급하는 것은 이들에게는 죽으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한 ERP 기업 관계자는 “정부기관이 하는 일이니까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피가 거꾸로 솟는다”고 말했다.

유사한 장면을 우리는 많이 봐 왔다. 지난 2007년 정부는 행정업무 시스템인 ‘온나라시스템’을 개발했다. 그리고 온나라시스템을 각 지자체와 정부부처가 무료로 쓸 수 있도록 제공했다.

그 결과 국내 대표 소프트웨어 기업이었던 핸디소프트가 무너졌다. 핸디소프트는 정부 및 지자체, 공공기관 등을 대상으로 업무 시스템을 공급하던 회사였는데, 정부가 핸디소프트의 등에 온나라시스템이라는 칼을 꽂은 셈이 됐다.

물론 소비자 입장에서 나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정부가 공짜로 소프트웨어를 주면 기업들은 비용을 아낄 수 있으니까 좋은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선의가 언제나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특히 정부의 개입이 시장을 교란시킬 때는 대부분 안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현재 ERP 시장은 저가 경쟁이 한창이다. 라디오를 즐겨 듣는 사람이라면 자주 듣는 광고가 있다. ‘이카운트 4만원’이라는 광고다. 이카운트는 ERP 회사로, 월 4만원에 ERP를 제공한다.

2000년대 초반에는 ERP가 워낙 비싸 중소기업들이 도입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이는 중소기업 정보화를 방해했고, 정부가 ERP 구축 자금의 일부를 지원하는 것은 중소기업이 정보화에 돌입하는 디딤돌이 됐다. 물론 결과는 안 좋았지만…

하지만 이제 월 4만원이면 ERP를 쓸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설마 기업이 월 4만원을 내지 못할까봐 나라에서 공짜로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것일까? 아니면 공공기관이 스스로의 존립을 위해 억지로 사업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

<심재석 기자>shimsky@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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