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석의 입장] 인간의 초초함만 드러낸 번역대결

지금까지 인공지능과 인간이 대결을 펼치는 이벤트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 IBM 딥블루와 체스 챔피언의 체스대결, 왓슨과 인간의 퀴즈대결,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이 대표적이죠. 최근에는 국내 인공지능 엑소브레인의 장학퀴즈까지… 모두 컴퓨터가 인간을 이겼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66800_80434_2828하지만 컴퓨터의 승리 말고 다른 공통점도 하나 있었습니다. 이벤트의 주최자, 즉 도전자의 위치에 컴퓨터가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체스, 퀴즈, 바둑 등 많은 분야의 챔피언이었습니다. 컴퓨터는 챔피언을 꺽겠다고 출사표를 낸 도전자인 셈이죠.

딥블루와 왓슨을 개발한 IBM,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은 자사 기술력을 자랑하기 위해 인간에게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지난 22일 인간과 컴퓨터의 또다른 대결이 있었습니다. 이번 대결 종목은 ‘번역’입니다. 인간 번역 전문가 4명과 3개의 인공지능(AI) 번역기 대결을 펼쳐, 누가 더 번역을 잘하는지 시합을 벌인 것입니다.

결과는 인간의 완승이라고 합니다. 인간 번역사가 번역 품질에서 월등한 우위를 보였다고 합니다. 일부 언론은 알파고에 무너진 자존심을 지켰다는 둥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만끽하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unnamed-5그러나 이번 대결은 좀 이상합니다. 대회의 주최자가 국제통역번역협회(세종대학교, 세종사이버대학교)입니다. 인간은 챔피언이고 컴퓨터는 도전자인데, 왜 인간이 컴퓨터에 도전장을 냈을까요?

최근 인공신경망 기반 AI(인공지능) 번역기의 품질이 기존 자동번역기보다 월등히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기존 영한-한영 번역의 경우 쓸모있는 품질을 제공하는 소프트웨어나 서비스가 전무했습니다. 영한-한영 자동번역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공신경망 번역은 어마어마한 진전을 이뤄냈습니다. 기존의 규칙 기반, 통계 기반에 비해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번역 품질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아직 갈 길은 멉니다. 예를 들어 인공신경망 자동번역은 문장단위로 번역을 합니다. 때문에 문장과 문장 사이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한국어의 경우 주어가 많이 생략되는데, 자동번역기가 문장 내에서 생략된 주어를 인지해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이번 대결에서 인간의 승리를 예상하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AI 번역기를 개발한 구글, 네이버, 시스트란도 자사 소프트웨어가 인간 번역사를 이길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AI번역기는 인간에게 도전장을 던질 수준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현상태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데이터가 쌓일 수록 인공신경망 번역기의 품질은 올라갑니다. 아마 수년 내에 현재보다 훨씬 나은 품질의 자동번역기를 만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면에서 국제통역번역협회가 주최한 이번 행사에서는 인간의 초초함이 묻어납니다. 번역으로 먹고 사는 번역사들의 경우 자동번역기가 더 좋아질수록 직업의 안정성이 깨집니다.

아직 인간이 기계보다 더 우수하다는 걸 애써 증명하려는 모습에서, 언젠가 내가 필요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초초함만 드러낸 셈입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심재석 기자> shimsky@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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