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을 마감하며…

컴퓨팅 환경의 변화

이제 더 이상 누구도 반도체의 마술을 맨 앞에 내세워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심지어 반도체 기술의 강자인 인텔도 공정의 변화를 강조하지 않는다. 10년 전, 반도체 회로가 마이크로미터 단위로 만들어질 때만 해도 회로 공정을 십 몇 마이크로미터만 줄여도 성능과 전력 소비, 발열 등을 확 잡을 수 있었다. 반도체의 마술이 이뤄진 시기다.

트랜지스터 수가 컴퓨터의 모든 것을 결정해주지 않는 시대는 오래 전부터 서서히 오기 시작했다. 올해는 그 증거들을 꽤 많이 볼 수 있었다. 당장 14나노미터에서 10나노미터로 줄어들면 언뜻 30% 정도의 미세공정 변화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예전만큼 공정이 만들어주는 마술이 반도체 성능을 결정해주지 않는다는 게 점점 여러 분야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xeon_phi_2-2-1024x683

컴퓨팅 환경에 따라 멀티코어 성능이 점점 더 강화되는 상황들이 오버워치같은 게임에서도 이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데이터센터 영역으로 넘어가면 그 변화가 더 극적이다. 올해 출시된 제온E5 v4는 반도체 기술 뿐 아니라 데이터 패킷을 처리하는 방식들의 변화로 프로세서의 근본적인 역할 자체를 바꿔버렸다.

알파고로 한바탕 난리를 치른 인공지능 분야는 더 독특하다. 엔비디아의 GPU 컴퓨팅은 순식간에 주목을 받았고 어디서든 입에 오르내렸다. 인텔도 제온 파이를 내놓고 이에 대응했는데, 그 사이에 구글은 자체 FPGA를 만들어서 발표했다. ‘고성능’이라는 말의 의미 자체를 다시 생각해보게 됐던 게 올 한 해다.

소프트웨어의 가치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많은 소프트웨어를 경험해봐야 한다는 이유로 적지 않은 불법 소프트웨어를 써 왔다. ‘학생이니까’, ‘개인적으로 테스트해보는 용도니까’ 등 핑계와 명분은 다양했다. 하지만 대가를 치르지 않은 소프트웨어 사용은 어떤 방법으로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원하는 소프트웨어를 모두 만지지 못하는 것도 답답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혼자 일하게 되면서 더 이상 ‘회사가 사주지 않아서’ 같은 핑계가 통하지 않게 됐다.

일단 욕심을 줄였다. 이제 더 이상 오피스나 포토샵 같은 놀라운 소프트웨어들이 새로 등장하지도 않는 상황도 도움이 됐다. 먼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365 1년 라이선스를 구입했다. 글을 쓰면서 한 달에 오피스에 1만원을 내는 게 아깝다면 글을 쓰지 말아야 할 게다.

appstore_red

포토샵도 필요했다. 어도비 역시 포토샵과 라이트룸을 묶은 구독 상품을 한 달에 1만원 정도에 제공한다. 하지만 그 구독 프로그램은 가입하지 않았다. 1만원이 아까운 게 아니라 대안을 찾고 싶었다. 마침 사진은 ‘캡처원’이 소니와 제휴하면서 소니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편집할 수 있는 무료 버전을 제공했다. 그리고 맥OS에서 뜨는 어피니티 포토(Affinity Photo)를 써보기로 했다. 50달러를 내고 구입했다.

어피니티 포토는 나름의 편리함이 있지만 포토샵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행인 것은 캡처원이 라이트룸보다 더 나은 사진을 만들어준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이 소프트웨어에 온라인 사진 편집 서비스인 ‘픽슬러(Pixlr)’를 더하니 살 만했다.

게임은 되도록 플레이스테이션 스토어와 스팀을 이용했다. 사실 게임을 즐길 시간이 별로 없었지만 할인 기간을 잘 활용하면 30~40%를 할인 받을 수 있었다. 모바일 소프트웨어는 애초 1~2달러짜리가 많고, 비싸야 10달러 정도다. 소프트웨어 구입의 습관은 사실상 모바일에서 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음악과 영상도 넷플릭스와 네이버뮤직을 주로 이용했다. TV를 거의 보지 않지만 필요할 때는 IPTV로 결제했고, 영화는 구글플레이를 가장 많이 썼다. 아이튠즈는 미국계정으로 꾸준히 쓰고 있었고, 국내에 애플뮤직이 들어오면서 애플뮤직도 썼다.

결국 한 해 동안 불법적인 경로로 소프트웨어나 콘텐츠를 이용하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컴퓨터를 쓰기 시작한 지 30여년 만의 일이다.

코딩과 교육 환경

학교에서 코딩, 소프트웨어 교육이 곧 시작된다. 업계에서는 개발자가 없어서 난리란다. 하지만 우리의 코딩 교육 환경은 사실상 전무하다. 대부분의 개발자들은 독학으로 완성되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올 한해는 그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이 두 번 있었는데, 한 번은 8월, 동아사이언스가 했던 ‘마인크래프트 소프트웨어 교육’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큼직한 공간을 가득 채운 아이들과 부모들이 코딩 교육에 얼마나 많은 궁금증을 갖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10월 국민대학교 이민석 교수님을 중심으로 소프트웨어 업계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전국 단위로 소프트웨어 교육의 필요성을 강의한 ‘소프트웨어의 물들다’는 기대 이상의 그림을 그려냈다. 지역별로 소프트웨어 교육에 대한 인식 차이는 매우 컸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배워야 한다’는 인식을 주는 데 성공했다고 본다.

dsc06541

그리고 이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소프트웨어를 ‘한다’는 사람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이야기를 더 많이 꺼낼 수 있는 자리들이 생겨나고 있다. 개발자라고 하면 으레 떠오르는 ‘너드(nerd)’나 ‘덕후’같은 이미지가 아니라 전문가로서의 그들의 자신있는 모습을 쉬운 언어로 볼 수 있는 기회들이다. 그리고 2017년에는 그들의 목소리가 더 커질 게다.

결국 소프트웨어도 입시나 학원 교육처럼 스펙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들도 나오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소프트웨어 교육이 대중화됐으면 좋겠다. 소프트웨어 교육의 목표는 코딩이 아니라 논리적인 사고를 배울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게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을 게다. 나 스스로도 중학교때 수학을 왜 배우냐라는 물음에 ‘수학에서 배우는 건 계산이 아니라 논리다’라던 선생님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야 깨닫게 됐지만 말이다.

무선의 시대, 끊어진 것은 고정관념

2000년쯤 마이크로소프트가 무선 마우스를 내놨다. 익스플로러 마우스로 기억하는데 이 큼직한 입력장치 안에는 두 개를 건전지를 넣고, 무선 수신기를 통해 마우스 신호를 보냈다. 마우스에서 선이 사라진 효과는 굳이 지금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당시에는 그 충격이 꽤 컸다.

이내 무선 키보드도 구입했다. 컴퓨터에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그저 전선 두 개가 사라진 것 뿐인데 책상 위가 깔끔해졌고, 꼭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 않아도 됐다. 전원 빼고 전선은 다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이제 15년을 막 맞았다.

블루투스는 이제 키보드와 마우스의 선을 잘라냈고, 에어플레이나 구글캐스트 등의 기술은 콘텐츠 재생 영역에서 무선 시대를 열었다. 무선은 편리하지만 늘 속도와 간섭, 연결 문제를 겪곤 한다. 하지만 확실한 기술 개발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유선이 무선을 이긴 경우는 적어도 개인용 기기 영역에서는 없었다.

개인적으로도 키보드와 마우스, 인터넷은 오래 전에 무선으로 바뀌었고, 거의 유일하게 남은 것이 음악이었다. 물론 스피커는 충전독을 제외하고는 이미 소니 X99와 UE 붐으로 바꾼 지 1년이 됐다. 이어폰과 헤드폰은 뭔가 블루투스를 쓰는 게 찜찜했다.

airpod_216-12-18

변화는 애플의 아이폰7로 시작됐다. 블루투스 헤드폰이나 이어폰은 절대 안 쓴다는, 그리고 3.5mm 이어폰 단자를 이용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은 적어도 내 스스로는 뚜렷한 근거 없는 믿음이 됐던 것 같다.

블루투스 오디오 프로파일은 그 사이에 꾸준히 발전했고, 굳이 소니의 LDAC 같은 고급 기술이 아니어도 APT-X나 AAC로도 사실 소리를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다양한 상황에서 편하게 더 많은 음악을 듣는 게 더 편했다. ‘왜 이걸 안 썼지?’ 하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다.

무엇보다 ‘소리보다 음악을 듣자’는 생각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보니 그 소리 차이 자체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게 됐다. MP3면 어떻고, FLAC면 어떨까? 무손실 음원보다 마음을 울리는 음원이라면 지직거리는 라디오라고 못 들을까?

콘텐츠를 만드는 입장으로서의 변화

회사를 나온 지 1년이 지났다. 처음 3개월은 휴가처럼 보냈고, 그 사이에도 비겁하지만 6개월을 버텨보고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자고 마음먹었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환경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잡지나 콘텐츠 경기가 좋을 때보다 외부 글 쓰기에 대한 일은 더 줄어든 것 같다.

다행히도 많은 매체들을 통해 글을 쓸 수 있었다. 온라인, 오프라인, 방송에서 내 이야기를 계속해 나갈 수 있었고, 무엇보다 취재할 수 있는 기회들이 끊어지지 않았다. 물론 회사에 있을 때와 분위기는 분명 다르지만 일에는 더 집중하기 좋았고, 가족들과 시간을 잘 조율해서 보낼 수도 있었다.

애초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목표는 거창하게 훌륭한 콘텐츠나 저널리즘같은 데에 두지 않았다. 조금 더 짐을 내려놓고 쓸 수 있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고, 하나의 상황을 접했을 때의 감정을 여러 독자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나누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일은 네이버 홈 화면에 큼직하게 기사가 걸렸을 때보다 훨씬 즐겁다.

그리고 또 하나는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었으면 하는 목표가 있었다. 이 일에 대한 또 하나의 가능성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내 목소리를 내면서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 역시 ‘돈’일 거다. 그 돈은 계산적이라기보다 내 글, 내 이야기의 값어치라고 생각한다. 아직 그 성공의 단계까지 가야 할 길은 많이 남았다. 그리고 아직 욕심 부릴 단계까지는 아닌 것 같다. 그렇기에 또 내년에 새로운 사고칠 거리를 생각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해나 지날 때는 특별한 것 같다. 그리고 올 한해는 아쉬움이 없다. 즐겁게 글을 썼고, 일을 할 수 있었다.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기적같은 일들도 많이 벌어졌다. 평생 지금까지 이 일을 해 올 수 있었던 데에 90%는 운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달라졌다. 숫자는 99%였고, 그 운은 결국 사람 복이었다. 감사하고 잊지 못할 2016년을 마무리하고 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